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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예술혼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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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예술혼을 깨우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18> 화가들의 눈에 비친 철도

그림 한가운데 밭을 가로지르는 길이 놓여 있고 그 위로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가 외롭게 가고 있다. 커다란 마차 바퀴 위에 놓여진 것은 관처럼 보인다. 말은 힘겨운지 고개를 늘어뜨린 채 걸어가고 있다. 마차는 시골의 이층집을 지나 사람들이 사는 공간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밭의 언저리에서는 농부가 마차에는 눈길도 안 주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림의 상단, 밭이 이어진 끝에는 멀리 기차가 달리고 있다. 증기 기관차가 길게 객차들을 매달고 연기를 내뿜으며 마차와 정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빈센트 반 고흐가 제 죽음을 예견하고 그렸다는 이 그림은 인간의 삶과는 무심한 듯 흐르는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밭의 농부는 외로운 마차에 잠깐의 관심이라도 줄듯하지만 일에 몰두해있다. 삶은 어쨌든 계속되고 있는 것이고 운명을 다 하면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는 투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차 역시 밭 사이에 놓인 길 위의 마차를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내달린다. 그림에서 보이는 마차와 기차의 바퀴 간격은 같다. 앞선 연재에서 밝혔듯이 기차의 바퀴 폭은 마차에서 왔기 때문이다. 같은 폭을 가진 바퀴 위에서 하나는 이제 사라져 가려 하고 있고 하나는 새 시대의 주인이 되고 있다.

▲ 빈센트 반 고흐의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

한국에서 인상파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고흐다. 고흐의 삶과 작품들은 워낙 잘 알려져 있어 웬만한 사람들도 '비운의 천재 화가' 또는 '귀를 자른 미친 화가'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다. 고흐는 자살하기 한 달 전인 1890년 6월에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이라는 그림 하나를 완성한다. 몇 년 전 한국에서는 이 작품이 수십 년 동안 한국에 있었다는 주장이 일었다. 이후 한국에 있는 작품이 진품이라는 확인을 여러 나라에서 받았다는 소장자의 주장과 여러 언론 보도가 있었다. 곧이어 수천억을 호가하는 이 그림이 해외에 팔렸다며 국내 고별전까지 열렸었다. 그러나 그 뒤의 소식은 감감하다.

한국 고별전 이후 이 그림이 누구에게 넘어갔는지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고흐의 그림이 갖는 상징성을 감안 한다면, 수천억을 들여 진품 그림을 품에 안게 된 새로운 소장자가 명화를 꼭꼭 감쳐둔 채 세상을 등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단품으로 진행된 국내 고별전에 전시된 작품은 템페라 화다. 달걀노른자와 아교를 섞어 만든 물감으로 그리는 일종의 수채화를 일컫는다. 이 작품은 주로 유화를 그렸던 고흐의 작품 중에 수채화로 분류되는 몇 안 되는 그림이라고 알려졌다. 원래 진품으로 알려졌었던 작품은 러시아 푸시킨 미술관이 소장한 유화 작품이다.

만약 푸시킨 미술관의 작품이 정말 위작이고 한국인이 소장했다는 그림이 정말 진품이라면, 프랑스에서 2차 대전 독일 지배기를 거쳐 미국인의 품으로 넘어가 한국 전쟁 당시 위문 공연을 했던 마릴린 몬로의 경호원으로 추정되는 이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한국인에게 넘겨줬다는 상상도 가능하다. 이 과정을 필력 있는 소설가가 상상력을 더해 문학 작품으로 만든다면 꽤 흥미진진한 내용을 담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진기의 등장과 사실주의의 도래

회화는 시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예술 분야라고 한다. 서양 미술에서는 19세기 말까지 살롱(Salon)과 아카데미(academy)가 그 기준을 제시했다. 살롱이 가지고 있는 소재와 작법에 대한 가이드라인(지침)을 화가들이 준수했다. 미술관과 평론가들은 더욱더 표준을 강화하여 가이드라인을 정교화시켰다. 화가는 현실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현실적으로 대상을 그려내야 했다. 주름진 옷, 물결의 움직임,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비례를 보여주는 인체 등. 섬세한 현실의 모사는 살롱의 주요 선택 기준이었다. 여기에 완벽한 구도와 색채를 구현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색채는 인간의 눈에 비친 자연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어야 했다. 작품의 소재 또한 신화와 고전, 역사적 사건, 종교, 정물, 풍경 등 신과 인간과 자연의 영역을 엄숙하게 다뤘다.

그런데 전통적 미술 흐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학의 발달과 철도의 등장으로 인간을 둘러싼 것들이 정신없이 변화하고 시간의 개념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둘러싼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그중에서도 회화에 영향을 미친 것은 시간 포착기계였던 사진기의 등장이다. 인간은 30분의 1초나 250분의 1초라는 짧은 시간을 잡아낼 수 있는 기계를 갖게 되자 순간의 빛을 잡아버렸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제 화가들은 모두 굶어 죽을 거라고 했다. 어떤 화가보다도 더 사실적으로 순간을 포착하는 기계 문명 앞에, 미술계 질서가 무너졌다.

사진의 등장으로 회화가 사라질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 흐름을 타고 있던 화가들이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형식들을 자의적이고 낡은 것으로 간주하고 또 다른 회화의 지평을 연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회 변화와 그것이 가져다준 인간의 의식 구조 변화에 대해 눈을 떴다. 인간이 인식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인간의 의식은 인식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 두 눈으로 본 것이 사실인가? 믿을 수 있는가? 근대 화가들은 현실과 인식이 과거 살롱의 주인들이나 평론가들이 보듯 단단히 결합하여 있는 게 아니라고 봤다. 현실과 인식 사이의 균열이 만들어놓은 틈 사이로 새로운 빛을 보고 그 빛이 시간에 따라 춤추는 것을 포착한 사람들이 '인상파'였다.

인상파 화가들은 익숙했던 세계와는 질이 다른 세계가 출현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세계를 '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이어지는 '물음'들이 나온다. 과거의 낡은 것들은 정당한 것인가? 낡은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이행기에 필요한 행동은 무엇인가? 이미 무너지고 있는 질서를 옹호하는 아카데미와 살롱의 권력자들은 인상파의 무례한 도전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이미 시간을 담은 열차는 떠난 뒤였다. 인간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색채를 띠고 있다. 모든 대상은 인간의 망막이 인식하는 색채라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이 자명한 색의 세계에서는 어떤 질문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대상을 사진기로 촬영하려고 하면 색채로 구현되는 세계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색채가 아닌 다른 것을 봐야 한다. 필름을 장착한 사진가가 봐야 할 것은 광도의 세계이다. 즉 색이 아니라 빛을 봐야 한다. 빛은 색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도 하다. 색채를 보아야 하지만 색채를 보아서는 안 되는 것에서 새로운 빛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인상파들은 이 빛의 영역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인상파가 이전과는 다른 소재들 - 풍기 문란하거나, 씨를 뿌리는 농민이나 일하는 노동자들, 피곤함에 지친 채 여행하는 사람들 -을 다루게 되는 데 이것은 새로운 눈으로 대상을 현상해 일반인들의 낡은 의식을 바꾸는 도우미가 된다. 인상파 화가들이 도입한 빛의 현상 장치에 리얼리즘(사실주의)이란 상표가 달렸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인간이 걸어 나와 본 최초의 빛이 사랑하고 노동하는 리얼(real)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상파가 일으킨 혁명은 빛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때의 자연은 재구성된 자연, 규격화된 자연, 학계가 제시한 '자연스러움'의 기호들을 벗겨 버리고 화가의 눈으로 다시 본 자연이다.

삶의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느낀 화가의 눈에 비친 들판을 달리는 기차는 꽤 이질적인 대상이었다. 막 인류에 등장한 철도는 고흐에게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질적인 존재였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거대한 쇳덩어리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한없이 왜소해 보인다. 궤도 위에 올라탄 철마가 커다란 기적으로 포효하고 달리기 시작한 뒤에는 인간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길을 비켜줘야만 한다. 기계 문명의 새로운 시대를 연 쇠로 된 괴물을 화폭에 담으면서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던 화가의 심정은 어땠을까?

▲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속도> (Rain, Steam, and Speed)
(1844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91 cm x 121.8 cm /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나는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풍경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빛을 다루는 능력에 있어서 또 하나의 천재가 있었으니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이다. 터너의 작품들은 아무리 인쇄가 잘된 경우라 해도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와 구조, 펜과 붓의 심오한 차이, 섬세한 채색의 흔적이나 빠른 필치의 드로잉(drawing)구현한 듯 보이는 터너의 작품 중에 내가 꽂혔던 것은, 런던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1844년 작 <비, 증기, 속도>란 그림이다. 1844년이라 하면, 1830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의 성공 이후 영국에서 철도가 폭발적으로 확장되던 시기이다. 1838년까지 영국의 철도 노선은 800킬로미터가 전부였다. 그러나 1851년 런던 국제 박람회가 열릴 즈음에는 영국 전역에 걸쳐 9600킬로미터가 넘는 철도 노선이 깔렸다. 현재 한국의 철도 노선이 3500여 킬로미터임을 볼 때, 19세기 중반 영국 철도망의 폭발이 어떤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다.

터너의 눈에 비친 철도는 혼돈의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정체를 알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철도조차 망막에 의한 인식일 뿐, 그것이 만들어낼 세상은 역시 미스터리였다. <비, 증기, 속도>를 보면 땅과 하늘의 색채가 뒤엉켜 어렴풋하게 서로 경계 지을 뿐이다. 꿈결처럼 춤추는 색채들이 어디가 하늘이고 땅이고 물인지를 묻는데, 명확히 보이는 것은 기차가 달리는 철교다. 철도가 놓이기 전 여행을 가장 방해하는 요소는 비였다. 비만 오면 진창으로 변해버리는 길에서 마차 바퀴를 굴리기 위해 말과 마부는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빗줄기가 조금만 굵어져도 시야를 확보할 수 없게 되고, 더 쉽게 탈진해 버리는 말 때문에라도 비 오는 날의 여행은 특별히 급한 경우가 아니면 시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철도는 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연의 훼방으로 여행을 중단하는 일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빛과 색이 섞여 혼돈의 시공간을 만드는 가운데에서도 일직선으로 굳게 뻗어 있는 철도는 막 질주하기 시작한 근대가 자연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위를 달려오는 터너의 증기 기관차는 카오스의 은하계를 통과해 새로운 출발역인 근대로 다가오고 있다. 터너는 자연을 정복한 증기 기관이 만들어낸 결과인 속도의 세상을 특유의 화풍으로 담아냈다.

철도는 강철 혁명의 결과이기도 했다. 18세기 영국에서 낮은 등급의 철광석 원석에서 철 1톤을 정제하려면 7톤의 석탄이 필요했다. 산출량도 많지 않았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증기 기관이 용광로에 사용되자 품질 좋은 철을 훨씬 싼 비용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1850년대 영국에서는 용광로가 2주에 하나꼴로 생겨났다. 증기 기관은 신철기 시대를 열었다. 선로, 선로를 고정하는 쇠못, 기관차, 엔진 등은 모두 강철로 만들어졌다. 강철의 단단함으로 인하여 더 크고 무거운 기관차를 만들 수 있었고 수송 능력을 높일 수 있었다. 새로 도시 한복판에 등장한 건축물인 역도 웅장한 강철 건물로 들어섰다. 많은 선로와 승강장, 연료인 석탄을 저장하는 창고, 급수 시설과 승객들의 대기 장소를 포함할 수 있는 역은 이전 시대의 건축물과는 용도와 형식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강철 건축물로 만들어진 역은 시간 이동 장치 같은 것이어서, 이곳에 들어서서 기차라는 것을 타면 눈부신 속도로 자연 속을 돌파해 전혀 낯선 다른 시공간으로 연결해주는 포털(portal·관문)의 역할을 했다. 화가들이 새로 등장한 역으로 눈을 돌린 건 당연해 보인다.

▲클로드 모네의 <생-라자르 역>(La gare Saint-Lazare)
(인상주의 / 1877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75.5 x 104 cm / 오르세 미술관 소장)

근대의 철도역을 그린 대표 화가로는 파리의 '생 라자르 역'을 묘사한 클로드 모네가 뽑힌다. 연못에 뜬 꽃들을 그린 <수련> 연작품으로도 유명한 인상파 화가 모네는, 1876년경부터 생 라자르 역을 화폭에 담았다. 생 라자르 역은 삼각의 맞배 지붕형 철골 구조물로, 천장은 투명 유리로 채워져 채광을 돕고 있다. 증기 기관차들이 내뿜는 수증기와 햇빛이 어우러져 뿌연 안개가 덥힌 듯한 공간은 빛의 변화를 따르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인상파에는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면 태양 빛에 따른 물빛의 변화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생 라자르 역 역시 아침이나 오후, 비가 오는 날이나 흐린 날의 빛이 열어주는 다양한 색을 화가가 포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1837년 준공되어 '생 제르맹 앙레(Saint-Germain-en-Laye)'로 출발하는 단선 노선에서 시작한 생 라자르 역은 오늘날 서울역의 두 배가 넘는 27개의 플랫폼을 가진 거대한 역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그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생 라자르 역에 얽힌 일화

2008년 고대하던 끝에 생 라자르 역에 도착하자마자 모네의 그림이 그려졌을 장소로 달려갔다. 세월의 때를 듬뿍 안고 있는 백 년이 훨씬 넘은 옛 철골 구조물들을 볼 수 있었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사각 창을 만들어 모네의 그림을 담았을 법한 화각이 있는 자리를 찾았다. 백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화가가 섰던 자리에 서고 싶었다. 이쯤일까? 열심히 자리를 찾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야! 너!"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위장 무늬 전투복에 기관총을 멘 두 명의 경찰이었다. 경찰은 이어서 알아듣지 못할 불어로 말했는데 요지는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이었다.

"왜 사진을 못 찍게 해?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투어리스트(여행객)라고!"

내 항의에도 불구하고 경찰들은 고개를 저었다. 햇빛이 차단된 역 구내임에도 폼을 잡느라 스포츠 글라스 형태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한 경찰이 글라스를 위로 올리며 간단한 영어로 말했다.

"넌 여기 오래 있었고 계속해서 역 구석구석을 찍었어. 찍어도 너~무 많이."

"너 '마니아'란 말 알아? 난 역에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그래! 사진 좀 많이 찍는다고 뭐가 문제야? 봐봐 곳곳에서 사진 찍는 사람투성이잖아! 멍청한 놈아(이 말은 안 했지만 표정에는 담겨있었다.)"

"그래도 안 돼! 네가 자꾸 그러면 널 연행해서 조사할 수도 있어. 관광객이면 대충 보고 가!"

"알았다! 사진 안 찍고 눈으로만 볼래!"


약이 오른 나는 손에 든 카메라를 목에 걸어 렌즈가 바닥으로 향하게 한 채 역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유심히 나를 관찰하는 경찰이 한눈을 팔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다.

나중에는 다시 경찰에게 가 바로 코앞에서 고급 카메라로 연속 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단속하라고 다그치다가 경찰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역을 떠나겠다고 하고는 지하철 환승 통로 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저 멀리 경찰이 사라져 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작별의 인사로 감자를 먹였는데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경찰도 나를 향해 같은 모양의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모네가 생 라자르 역을 그릴 때에는 역장이 나서서 기관차들을 플랫폼에 대기시키고 사람들을 통제한 채 엔진 출력을 올리거나 수증기를 배출하면서 화가의 영감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데 지구촌에 테러가 일상화된 시기에 살다 보니 사진 좀 찍었다고 역에서 경찰에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2012년에 다시 찾은 생 라자르 역에서는 연륜이 묻어나는 할아버지 같은 역장님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프랑스 철도 공사 직원들의 호위 속에 경찰들의 간섭이 있든 없든 많은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지만 사진보단 인터뷰가 우선이었기에 정작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는 없었다. 적절한 기회란 흔치 않은 법이다.

▲모네가 즐겨 그렸던 생 라자르 역. 그림에 등장했던 증기 기관차 대신 전기로 달리는 열차가 운행된다. ⓒ박흥수

1등·2등·3등 실 기원

철도가 탄생한 뒤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멸시와 냉대를 받았던 대상인 하류 인생들과 여성들이 가시적으로 사회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산업자본주의는 대규모 생산을 필요로 했다. 당연히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자본가가 원한 노동력에는 여성과 아이라는 예외를 두지 않았다. 새로운 형태의 집단 거주지도 필요했다. 도시라고 일컫는 새로운 인간의 생존 공간은 오직 주거를 위한 목적으로 지은 집들이었다. 농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중세의 도시와는 분명히 다른 성격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산업화 시대의 도시에는 인간들의 자립이나 생존을 도와줄 생산 수단인 논과 밭이나 가축을 방목하는 평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반도체 집적회로처럼 좁은 공간에 집들이 형성됐고 시간이 갈수록 이 집적도는 더 조밀해졌다. 이 과정에서 생산을 담당할 밑바닥 인생들의 대규모 이동이 시작됐다. 산업화는 인류의 대부분이 태어난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던 역사를 바꿔버렸다. 도시라는 곳은 전혀 다른 곳에서 성장 과정을 거친 이방인들이 두려움과 의심 속에 십여 센티미터의 벽돌 블록을 사이에 두고 생활할 것을 강요했다. 탄광이나 공장에 나가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도시의 흥망성쇠에 따라 유목민들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듯이 이동해야만 했다.

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철도는 주목을 받았지만 부자들과 권력자들에게는 곤혹스런 일도 파생시켰다. 대량 수송을 보장하는 철도의 특성상 신분이 다른 족속들과 한 배를 아니 한 열차를 타야만 했기 때문이다. 교양 없고 냄새나는 삼류 인생들과 섞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 사람들은 호화로운 1등 실을 만들어 자신들과 밑바닥 인생들을 분류했다. 2등 실은 귀족이나 최상위 부르주아지(bourgeoisie)는 아니지만 3등 실에는 들어가기 싫은 정부의 관료들이나 고등 교육을 받은 먹물들의 차지였다. 열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3등 객실은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몰락한 부자와 2등 실에 끼이지 못하는 가난한 먹물들, 승객의 대부분인 노동자들을 포함해 남녀노소가 비좁은 객차 안에 어울린 채 열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 열차>
(1862년경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90 x 65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생소한 지역 사투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음식을 나누고 곳곳의 정보와 소문이 교차하는 3등 객실의 모습은 신화나 성서의 한 장면을 정교하게 그리는 것에 싫증 난 사실주의 화가들에게는 흥미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풍자 만화가이기도 했던 프랑스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는 1860년대 열차의 삼등 객실 풍경을 남겼다.

오노레 도미에는 부자들과 결탁한 국왕을 풍자하고 하나같이 돼지 같은 배를 두르고 있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조롱하는 등 현대 사회에선 일반화된 시민을 외면하는 권력과 의회를 고발했다. 반면 사회의 진정한 주춧돌이 되고 있는 평범한 서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그가 사실주의 화가가 가져야 할 날카로운 현실 분석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과 뜨거운 감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산업 혁명이 몰고 온 거대한 파도에 휩쓸렸지만 새로운 희망으로 미래를 기대하는 삼등 열차 칸의 사람들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 오를 거야"란 표정으로 건강한 민중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화폭 전면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여자와 어린아이이다. 젊은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잠을 재우는지 젓을 먹이는지 아기를 내려다보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가운데 앉은 할머니는 바구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잔잔하지만 힘 있는 얼굴로 쉽게 지치지 않는 민중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래를 책임질 꼬마는 아직은 더 커야 할 듯 할머니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다. 그림 가운데 보이는 세 명의 뒤쪽에는 3등 실의 사람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정원 댓글 문제의 파장이 어디까지 번질까요?",
"국토교통부가 정말 미친 척하고 연말에 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일까요?"
"집권당 공약은 이제 기대 안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거요."

요즘 같았으면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을, 시국을 걱정하면서도 결의에 찬 얼굴들의 모습을 오노레 도미에는 화폭에 담았다.

▲ 아카마츠 린사쿠의 <밤 기차>

▲ 레지날드 마쉬의 <3번가의 고가 철도>.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과 비슷한 작품은 아시아에서도 그려졌다. 2010년 7월부터 10월까지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아시아 리얼리즘전에서 만난 <밤 기차>는 철도 광인 나를 오랫동안 그림 앞에 잡아 두었다.

1901년 일본 화가 아카마츠 린사쿠가 그린 밤 기차에도 어김없이 신념에 가득 찬 표정의 여인이 보인다.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에 앉았던 할머니가 <밤 기차>에서는 뒤편으로 자리를 옮겨 낙관적인 미소를 짓고 있고 앞에는 어린아이를 잠재운 아기엄마가 생각에 잠겨있다. 객실의 사람들 역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미국 화가 레지날드 마쉬의 1931년 작 <3번가의 고가 철도>의 객실 풍경은 이미 일상으로 다가온 철도를 보여준다. 어쩌다 해야 하는 여행이 아닌 생활의 한 부분이 된 철도는 이제 도시에 갇힌 서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여성들에게도 세상이 열렸고 가난한 사람들도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고속 이동 수단인 철도가 가진 에너지는 더운 심장을 가진 예술가들의 잠자는 영감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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