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런던 역이나 시카고 역, 1960~70년대의 서울역 광장에는 촌에서 내몰려 뜰 수밖에 없었던 '촌뜨기'들이 어리숙한 얼굴로 번화한 도시가 주는 위압에 주눅 들어야 했다. 이들은 산업 전사가 되어 시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대도시들이나 산업지대 도시의 아침에는 마치 시위대가 행진하듯 공장 정문으로 향하는 거대한 인파의 무리로 몇 시인지 알 수 있었다.
공장들은 바퀴벌레처럼 앞다투어 질주하는 허름한 검은색 작업복의 노동자들을 삼켜버렸다. 태양신과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대한 진보를 이룩했지만, 그 결과는 출퇴근 기록계에 펀칭 구멍을 내야 하는 비루한 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자기 몸을 팔아 먹고살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은 공장 입구의 작은 시간 기계인 출퇴근 기록계 앞에서 불평 없이 서 있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새 시대를 경험했다.
'시간 통제'의 탄생…"쉬는 시간엔 뭘 했는데?"
시간의 통제에 정면으로 저항한 것은 예술가들이었다. 산업화가 인간의 삶을 확실히 바꿨는데, 예술가들은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통제였고 이것은 시간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확인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타이머가 울리는 종소리에 따라 일손을 멈추고 좀비처럼 움직인다. 벽을 보고 나란히 선 다음 바지 단추를 풀고는 소변을 본 다음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나서야 주머니의 담뱃잎을 말 준비를 한다. 만약 작업 도중 작업반장에게 화장실에 가겠다고 나선다면 "쉬는 시간엔 뭘 했는데?"라는 아주 당연한 추궁을 받았다. 생리적 현상도 시간에 맞춰야만 했다.
대규모 군중이 똑같은 시간에 공장으로 들어가고 똑같은 시간에 싸고 똑같은 시간에 먹는 걸 본 예술가들은, 인간을 파편화하는 근대 산업 자본주의의 모습에 경악하게 된다. 조지 오웰의 1949년 작 <1984>에서는 주인공 윈스턴이 전체주의적 통제를 절대시하는 친구와의 대화 도중 친구로부터 "노동자는 인간이 아닐세"라는 말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지구라는 행성이 24개의 거대 톱니바퀴가 되어 태양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고 태양은 더 큰 은하계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돈다. 24개의 톱니바퀴를 가진 지구의 축에는 또 다른 수많은 톱니바퀴가 돌고 있고 이 톱니바퀴들을 따라가 보면 거대한 생산 공정들이 보이고 그 말단에 포함된 노동자가 보인다. 이 노동자는 각각의 크고 작은 시간의 단위들을 갖는 행성과 공장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인간성이 배제된 채 생산 단위 중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속품 취급을 받는 노동자의 처지를 조지 오웰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폴란드 출신 영국작가 조지프 콘래드의 1907년 작 <비밀첩보원>에서는 기존 질서를 뒤엎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이 영국을 파괴하기로 작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아나키스트들은 다우닝가의 총리관저나 의사당, 또는 여왕이 있는 버킹엄 궁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그리니치 천문대를 폭파하는 게 목표다. 전지전능한 통합된 신적 존재이자 근본적 질서가 되어버린 시간을 파괴함으로써 혁명을 성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교할 정도로 질서를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도전은 화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화가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도 원근법을 과장하고 조정되지 않은 색채나 불안정한 구도를 화폭에 재현했다. 회화가 갖추어야 할 규정과 질서를 정해놓고 마치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얼마나 규정 종목과 자유 종목을 잘했는지 채점하는 심판처럼, 고리타분한 기술을 따지는 기존 미술계에 예술가들은 투항하지 않았다. 화가들의 눈에 비친 근대는 다음 연재에서 더 자세하게 만나보기로 하고 우선은 셜록 홈스부터 만나보자.
▲ 철도와 전신으로 표상되는 근대적 대표 인물인 셜록 홈스를 다룬 영화 <셜롬 혹스: 그림자 게임> 포스터. |
산업화 시대의 이상적 인간, 셜록 홈스
조지 오웰이나 조지프 콘래드가 속도의 혁명과 시간의 탄생으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성을 고발했다면 시간으로 표현된 근대의 합리성을 나타내는 인물은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창조해낸 셜록 홈스다. 셜록 홈스는 산업화 시대의 영국이 원하는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합리적 추리, 과학적 증거,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가진 탐정 홈스의 활약은 철도와 전신을 기초로 영국이 선도한 근대 산업화의 위대함을 드러내게 한다.
셜록 홈스는 자신의 파트너인 왓슨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제한적인 문구로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해야 하는 전보는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장치이다. 전신에 의해 가능했던 전보에서 시작하는 사건들은 셜록 홈스가 지난 과거의 낡은 수사관이 아닌, 새 시대의 과학적이자 산업적 영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보스콤 계곡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가자며 홈스가 왓슨에게 보낸 전보의 마지막 구절은 "11시 15분 열차로 패팅턴역을 떠나게"였다.
전신과 철도의 결합을 통해 영국의 어떤 곳에 있는 범죄라도, 우리의 영웅 홈스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오늘날의 철도는 신호 시스템이 발달하여 선로 옆에 전신주를 세우고 전신용 전선을 나란히 설치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철도와 전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나의 어렸을 적 기차 여행 기억을 떠올려보면 열차 차창 밖으로 나란히 전선이 달리며 제비가 쫓아오듯 하는 전선의 춤을 보며 달렸던 게 생각난다. 전신은 열차의 신호 체계와 결합하면서 철도 노선 옆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장치였다. 셜록 홈스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전신주를 보며 "시속 93킬로미터야"라고 하고, 몇 분 후 "음 지금은 90킬로미터군"이라고 했다. 열차 객실에 앉아서도 달리는 열차의 속도를 알았던 게다. 전신주의 기둥은 약 55미터 간격을 두고 세워졌는데 1분이나 2분 동안 지나치는 전신주의 기둥을 세어보면 그 시간 동안 이동한 거리를 알 수 있기에 속도까지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셜록 홈스의 방식은 실제 기관사들이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눈으로 측정하는 속도라 해서 목측(目測)법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이 목측법(눈대중법)에 대해 기관사 교육 과정에서 주요하게 다루지 않지만, 내가 신입 기관사로 일하던 시절만 해도 실제 운행 과정에서 운전 지도 팀장이 속도계를 가린 채 달리는 열차의 속도를 알아 맞춰보도록 하는 훈련이 있었다. 열차가 달리는 도중 속도계가 고장 나 현재 속도를 알 수 없게 됐을 때를 대비해 목측법을 익히도록 한 것이다. 열차는 지정 속도를 초과하게 되는 순간,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기 때문에 속도를 짐작하지 못하면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게 된다. 또 거대한 열차의 특성상 운전석에서 감으로 느끼는 것과 실제 속도의 괴리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목측법의 활용 능력은 중요했다.
그러나 현재는 장비의 현대화로 속도계가 두 개 이상 설치되어 있고 고장이 나는 일도 거의 없다. 설사 속도계가 고장 나더라도 대체 기관차로 교체할 수 있다. 게다가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고속 열차에서는 눈으로 속도를 짐작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기 하다. 그 결과 셜록 홈스가 사용했던 목측법은 과거의 추억으로 퇴장하고 있다.
셜록 홈스가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는 결국 시간에 대한 해석이었다. 알리바이라고 부르는, 사건 당시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결국 시간을 둘러싼 줄다리기였다. 철도와 전신이 가져다준 과학적 합리성을 토대로 범인을 끝내 무력화시키는 셜록 홈스는, 일관되게 냉철한 관점으로 사건 현장을 재현한다. 실마리로 나누어져 있던 퍼즐들을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으로 소환해서 그 시간이 담고 있던 공간을 범인이 부정하지 못하게 한다. 미신과 억측과 오해로 섞여 있던 근대 이전의 혼란을 근대의 시간이라는 판 위에 질서 정연하게 올려놓고는 파이프 담배 연기를 뒤로 한 채 떠난다. 미국 인기 드라마의 배경인 CSI 과학수사대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는 셜록 홈스만큼 과학과 산업이 결합한 합리성을 대변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평양의 주체사상탑 높이가 170미터인 이유
인간들은 이제 태양신의 상징을 박물관에 가둬 놓거나 관광용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면서 태양신에게서 벗어나 과학적 시간의 세계로 진입한 것을 자랑하듯 내세웠다.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을 비롯해 유럽 각지와 미국에 있는 오벨리스크(obelisk·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돌로 된 4각주)는 거대한 태양신의 상징물이었다. 이 오벨리스크들은 모두 태양신을 숭배했던 이집트에서 통째로 약탈해 온 것이다. 나폴레옹을 비롯한 아프리카를 침공했던 많은 유럽 군대들은 너도나도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떼어다가 자신들의 수도에 심어버렸다. 이런 오벨리스크는 거대한 해시계이기도 했다. 태양의 그림자를 만들어 지금이 어느 때인지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신과 왕의 소통로이자 왕의 존엄을 나타내는 오벨리스크는 그 자체로 경외의 대상이면서 일상을 지배하는 상징이었다.
▲ 북한 평양의 주체사상탑. ⓒ 연합뉴스 |
군부독재 치하의 미얀마나 폭력이 일상화된 예루살렘에서의 체류기를 재미있게 담아낸 만화가 기들릴(Guy delisle)의 평양 여행기를 보면 이 주체사상탑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전기 사정이 나빠 평양 시내가 암흑에 빠져 있을 때에도 주체사상탑의 붉은 불빛만큼은 흔들리고 있어 시내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만화가의 컷 중 하나에는 어둠 속 한쪽에 빛나는 불빛이 자리 잡고 있다. 어둠을 밝힌다는 느낌이 아니라 불이 암흑 속에 갇혀있다는 인상을 준다. 평양의 오벨리스크는 김일성의 70번째 생일에 맞추어 1982년 완공되었고 시내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기들릴이 보여주는 주체사상탑의 하단 기단부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축하 메시지와 또 전 세계로 전파되는 위대한 주체사상이 선전되고 있었다. 왕과 나라를 칭송하는 글들을 오벨리스크에 새겼던 이집트의 왕들이 그랬듯, 주체사상탑 벽면 헌시 비에는 주체사상 비문이 조각되어 있다.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이여!"라는 말로 끝나는 신흥 종교 같은 뉘앙스의 비문(碑文)을 합리적 근대성을 바탕으로 한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위대한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님"이란 구호를 1970~80년대 동네마다 울려 퍼졌던 남한의 새마을 운동 노래처럼 강제로 이식받아야 했던 북한에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다. 평양은 태양신을 섬기는 고대의 신성 문화와 대를 이어 왕권을 승계하는 봉건적 유교 문화, 그리고 NBA 농구선수 출신의 유명 인사가 최고 지도자와 격의 없이 우정을 나누는 현대적 감성이 짬뽕 되어 있는 타임캡슐 같은 곳이 아닐까?
고대의 시계 역할을 했던 오벨리스크는 정확한 해시계는 아니었다. 지구의 공전 궤도와 자전에 따라 태양의 위치는 늘 바뀌었고 계절마다 태양이 지시하는 시간이 달랐다. 우주를 평면으로 놓고 가상으로 태양이 움직인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복잡한 경로를 그리는데 그 경로들이 변화하는 시점이 바로 우리가 아는 '절기'이다. 인간은 부정확한 해시계의 문제를 해결했다.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조선 시대에 제작된 '앙부일구'라는 해시계가 있다. 이 해시계를 자세히 보면 시간을 가리키는 장치인 자침이 오벨리스크처럼 수직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누워있다. 지구의 기울어진 자전축과 한국의 북위도라는 위치를 고려하여 시곗바늘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되자 태양의 혼란스런 움직임이 - 지구의 기울기와 공전에 따른 - 바로 잡혔다. 계절별로 그림자의 길이만 다를 뿐 정확한 간격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해시계는 기계시계보다 더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주었다.
▲ 조선시대의 해시계 앙부일구. |
일제가 빼앗은 한양 표준시, 박정희가 한 번 더…
한양(서울) 표준시를 말하는 종묘에 설치되었던 해시계의 바늘이 가운데 정중앙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오시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정오, 즉 12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이 해시계 바늘이 한가운데에 있을 때, 서울 표준시는 12시 30분을 가리킨다. 서울의 태양 정오가 아니라 도쿄의 태양 정오를 한 일본 표준시를 따르기 때문이다.
한양을 지나는 경도선인 127도를 기준으로 선정했던 조선 표준시. 대한제국은 그러나 1908년, 한국이 동경 124도와 132도에 걸쳐 있음을 고려해, 127도 30분의 태양 정오를 새로운 표준시로 제정하였다. 대한제국이 출범하면서 내세운 것은 자주독립이었다.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겠다는 각오를 만방에 알렸다. 그리하여 청나라에 대한 충성의 표시인 서대문 밖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기도 했다. 나라의 독립은 시간을 소유하는 것에서도 출발한다. 127도 30분이라는 대한제국표준시의 선포는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의 모든 사람들은 그리니치 세계표준시의 기준과 대한제국의 태양 자오선에 맞춘 시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08년은 경부선과 경의선의 직통 연결이 시작되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급행열차 융희(隆熙) 호가 달리게 된 해다. 경부선과 경의선은 일본이 조선 침략 완수의 핵심 도구라는 인식 아래 사활을 걸고 추진했던 철도 노선이었고 1904년과 1905년에 잇따라 완공되었다. 1905년은 일본이 을사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강제 병합을 가속한 시점이었다. 을사조약 이후로 대한제국이 망하는 1910년 강제병합까지 5년의 세월은 일본 제국주의에 따라 조선 왕실이 유린당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속에서 왕실이 대한제국 표준시를 선포했던 것은 난파선에서 마지막 희망의 구명정을 내리는 행위였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을 통해 조선의 식민지화를 완수하고 마침내 시간을 빼앗아 간다. 1912년 1월 1일 동경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했던 한국 표준시를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한 일본 도쿄 표준시로 변경한다. 일본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아침을 맞을 때 한국의 같은 시간에 비해 해가 일찍 뜬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일본이 오래전 조선의 시간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시간을 되찾아 오자는 노력이 있었지만 남한의 통치를 맡았던 미 군정은 작전 편의성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도쿄 표준시를 여전히 고수했다.
한국 표준시를 다시 찾아온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원정 왔던 미군의 철수가 이루어진 뒤인 1954년 3월이었다. 21일 0시 30분 부로 대통령령에 의해 다시 동경 127도 30분을 표준자오선으로 하는 대한민국 표준시를 지정한다. 1954년 3월 21일 대한민국은 0시 30분을 두 번 경험하게 된다. 한 번은 도쿄 표준시로 한 번은 서울 표준시로. 그러나 이 서울 표준시는 오래가지 못한다. 7년 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필두로 한 군부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우리나라의 표준 시간을 일본 도쿄 표준시로 다시 바꿔 버렸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총칼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군대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의 시간을 빼앗아 도쿄 표준시로 바꾼 역사를 그대로 반복했다. 서울 표준시는 공교롭게도 군사력을 앞세운 힘으로 두 번씩이나 무력화되는 역사를 갖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해가 하늘 가운데에 떠 있음을 의미하는 정오의 기준이 도쿄이고 "정오의 희망곡"같은 라디오 프로그램도 "서울은 아직 오전이지만 도쿄는 정오의 희망곡"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민족적 분노 같은 것과 무관하게 60여 년 가까이 자리 잡은 한국의 도쿄 표준시를 바꾸는 것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엄청난 비용과 혼란의 유발을 걱정하는 항공사, 여행사, 증권사 등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수많은 구성원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버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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