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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를 위한 철학캠프' 3강과 4강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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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3강과 4강 후기

이현지, 조현민, 정순혁의 수강후기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그리고 상상마당이 주최한 '18세를 위한 철학캠프'의 세번째 네번째 수업이 서울 홍대앞 상상마당아카데미에서 있었습니다. 수강후기로 세 학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다른 수강생들도 이 글들을 통해 강의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이연지, 조현민 학생의 글은 3강 수업, 정순혁 학생의 글은 4강 수업의 후기 입니다.) <편집자>

이연지 학생의 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감이란 '내가 보는 나' 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나' 이 두 가지이다.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은 크게 보자면 관점의 차이이다. '내가 보는 나' 의 경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별 생각 없이 하는 평범한 행동들에서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 혹은 무언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할 때 그 행동들의 행위자는 나이기 때문에 내가 행동을 하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낄 수 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내가 보는 나' 보다 더 많이 생활 속에서 볼 수 있고 남들이 다르게 보는 나이기 때문에 조금 더 확실히 느껴진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를 때, 학교에서 인원 확인을 위해 출석을 부를 때, 애들과 함께 껴서 이야기를 나눌 때, 특히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때 등등 그 속에서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같은 소속감이 드는 행동 등을 할 때 내가 정말 존재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의 첫인상, 행동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는 바로 정해지는 편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대게 사람들은 이 두 '나'가 똑 떨어지게 일치하지 않는다. 또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금방 지치고 피곤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남들은 살짝 낮게, 자신은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나' 는 상황에 따라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간혹'다른 사람이 느끼는 나'는 과하면 가끔 문제가 되기도 한다. 지난주 테세우스 신화 강연 내용에서처럼, 테세우스는 자아정체성을 찾기 위해 꽤나 모험적인 인생을 살다가 그 후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이다. 이유는 바로 자신을 찾는 과정 중에 '자신'이 빠져버린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닮은 아들, 사촌 형 헤라클레스를 닮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자아정체성 찾기의 과정이라 볼 수 있지만 크면서 점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변하게 되어버렸고, 결국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된 것이다. 자아 정체성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자自 ,즉'나' 라는 의미가 내포하고 있는데, 그걸 확립하는 과정에서는 무엇보다도 남의 시선 전에 '나'가 제일 중요하다. 나를 중요하게 느끼는 것, 즉 나를 존중해 준다는 것은 자신감의 있고 없고의 차이로 볼 수도 있고 이는 성격으로도 연관되며 성격은 곧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로 연결되기 때문에 서로가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는 셈이다.

진정한 나로 존재하는 것은 완벽하게 가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나에 도달하려면 나를 제대로 관찰하고 때로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남의 시선에 지나치게 휘말리지 말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완벽하긴 힘들지 않을까? 하지만 남이 신경 쓰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볼 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나로 다가가는 방법이라 확신한다.

조현민 학생의 글

존재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독특성이나 가치·능력을 갖고 있음으로써 자립이 인정되는 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을 그대로 대입하면 '나의 존재감'의 의미는 한 줄로 정리가 끝난다. '내'가 '독특성이나 가치‧능력을 갖고' 있어, 하나의 사람으로 자립이 '인정'되었다는 느낌을 느끼는 것. 이제 이 큰 틀을 군데군데 메우는 일만 남았다. 이 의미를 해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단어는 나, 독특성‧가치‧능력 그리고 인정이다.

우선, '나'라는 단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내가 누구다'라고 존재감을 들어내려면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내가 확실히 어떤 존재라고 인지하는 것이 바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크게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으로 구분된다. 외부적인 요인은 사회 관계망을 통해 형성된다.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어낸 관계망 안에서 기억과 감정을 교류하면서 그 안에서 상호간 주고받는다. 스스로 역사를 무의식에 기록하는 것이다. 어떤 감정인지, 어떤 기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느끼고 겪는다. 그러면서 그것들의 대상이 되는 내 자신이라는 존재가 뚜렷해지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를 예로 들자면, 시민들로부터 신임을 받았고 아버지로부터 내 아들이라는 인정을 받았으며 7가지 역경을 거친 영웅 같은 수식어들과 감정교류를 통해 더욱 뚜렷하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신임을 받는 존재, 아들이라는 인정받은 존재, 7가지 역경을 거친 조건을 가진 존재. 다름 아닌 테세우스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내부적인 요인은 조금 더 어렵다. 외부적인 것은 타인과의 교류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느끼고 겪음으로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내부적인 것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 목표를 갖는 것. 다른 말로는 궁극적인 욕구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장래희망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 지 확실히 아는 것이다. 직업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하고 싶은 것. 이를 위해선 거울 단계, 닮아가기를 넘어서서, 스스로의 이상향을 건립해야한다.

테세우스는 영웅과 왕이라는 롤 모델까지만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아실현을 하지 못했다.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한 가지 예로 들면 꿈 너머의 꿈이다. '아프리카의 아픈 아이들을 치료해 보람을 얻는 국경 없는 의사가 되고 싶다.'처럼 직업을 넘어서 그 직업으로 하여금 하고자 하는 욕구가 확실히 있는 상태이다.

그 다음은 정체성을 기반으로 둔 '나'로부터 독특성‧가치‧능력들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나의 성격, 행동패턴, 강점 영역, 약점 영역, 이상향, 개성이 바로 그 예이다.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을 통틀어 다양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내 성격상 특징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지, 어떤 이상향을 가지고 있는지. 다양한 경험들로부터 스스로가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테세우스는 유전적으로 자신의 신체능력과 정치에 특출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촌이 무려 헤라클레스였고 아버지는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였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로부터 좋은 교육을 통해 건장한 청년으로 자랐다. 7가지 역경을 넘으면서 그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아테네 시민들의 반응을 통해 스스로의 능력과 가치를 증명 받고 확신했다.

마지막으로 독특성‧가치‧능력뿐만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특성을 갖고 있는 개인으로서 존재를 확증하는 계기가 된다. 이 인정은 사회 전체로부터일 수도 있고 사회관계망을 통한 교류일 수도 있다. 인정은 주관적이어서 개개인에 따라 매우 다른 차이를 보이므로 목표가 정확히 어디라고 꼬집기는 어렵다. 하지만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정도의 성취를 보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체성을 파악하고 독특성‧가치‧능력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세간의 인정을 받는다. 세 가지를 전부 만족해, 존재감을 누린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오랜 시간과 다양한 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동물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사고하는 생명체인 인간에게만 청소년기가 길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라나는 청소년기에 지식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탐구도 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바탕으로 존재감을 지닌 하나의 생명체로 진정 홀로서서 세상을 마주보는 것, 이게 바로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정순혁 학생의 글

모험이란 "위험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 나는 이러한 모험이 우리 인생에 3번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나는 각 모험을 소개하고 그 모험을 하게 되는 원인과 그것을 모험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험 중에 진정한 모험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서술하려고 한다.

첫째로 우리가 겪는 모험은 어머니의 배로부터의 모험이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10달간을 머무르다가 이 세상 밖으로 나간다. 이 세상에는 뱃속에는 없던 빛과 여러 가지 색들이 펼쳐져 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이러한 빛과 색들이 낯설기만 할 것이다. 그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보았던 것이 전부라고 믿었고, 그곳에 안주하며 10달을 보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든다. 그러면 아기들은 왜 자신들이 적응하고 안주했던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 낯설고 그들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으로 나온 것일까?

나는 이 같은 아기들의 행위가 플라톤이 <국가>에서 언급한 '동굴의 비유'와 비슷하다고 본다. '동굴의 비유'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동굴에는 사람들이 해를 등지고(입구를 등지고) 벽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고, 그들이 평생동안 볼 수 있는 것은 벽에 비친 그림자뿐이다. 동굴 안의 사람들은 벽에 비취는 그림자가 사실이라 믿고 진리라 여겨왔다. 그러나 어느 날, 그 그림자에 의심을 품고 한 사람이 자신의 발에 채워진 족쇄를 풀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동굴 밖에는 그들이 살면서 볼 수 없었던 빛과 색들이 펼쳐져있었다.(여기서 색과 빛들은 이데아를 의미한다.)

여기서 '동굴의 비유'와 '태아의 출생'간의 공통점을 알 수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오랫동안 어둠만을 보아왔고, 그 어둠에 비치는 몇몇 형태만이 진리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둘 다 밖으로 나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이 다 허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토대로 '태아의 출생' 원인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굴의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보는 그 형상을 의심한 것과 같이, 태아도 자신이 보았던 형상들이 거짓은 아닐까하고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태아는 동굴의 입구라고 말할 수 있는 어머니의 질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나온다. 이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첫 모험을 겪는다. 태아가 어머니의 질을 지나는 과정은 태아나 산모 둘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태아나 산모 모두 그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을 한다.(산모는 태아를 도와주는 조력자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힘들고 험난한 일을 인내하며 목표를 달성한 우리는 모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하는 우리의 삶의 모험은 방황의 모험이다. 우리 같은 청소년들은 이 풋풋한 청소년기에 최대의 고난을 겪는다. 바로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이 되면 사춘기라는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이 시기에 우리의 몸은 성인과 비슷하게 성숙하게 변화한다. 그러나 이 사춘기의 가장 큰 문제는 육체는 성인과 유사하게 변해가나 정신은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의 지체 현상으로 인해 우리는 방황하게 된다. 방황의 사전적 말 뜻 그대로 그 시기의 청소년들은 정말 분명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를 헤매어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그들은 위험하고도 해서는 안 될 경험들을 겪게 된다.(아닌 사람도 당연히 존재한다.)흡연이나 음주, 절도 등의 청소년이 해서는 안 될 행위들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직접적인 행위가 아니라도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 같은 정신적인 위험도 경험한다.(너무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지만 요즘은 저런 사례들이 급증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이렇게 사춘기라는 방황의 시기에 여러 가지 위험을 견디고 인내하며 나중에는 성인이라는 목표에 도달한다. 즉, 성인으로 성숙하기 위한 모험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이 방황의 모험은 모두 정신의 지체현상 때문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조력자의 부재와(사춘기에는 부모와 자녀간의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면서 부모가 조력자의 역할을 잘 하지 못한다.) 사회로부터의 소외 또한 이 모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모험은 껍질로부터의 모험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이상향이나 꿈, 즉 목표를 세운다. 우리는 진로를 설정하고 장래희망에 대해 고민해왔다.(내가 학생이므로 학생의 입장에서 서술하겠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그다지 자신의 진로나 장래희망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인다. 왜 그럴까? 나는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로 개인의 사유재산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그것을 불리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더불어 물질만능주의가 맞물리면서 사람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져갔다. 이러한 사회의 흐름으로 인해 모두가 돈을 추구하고 갈구하는 인생이 자연스러워지고 말았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학생들의 꿈은 경제, 경영 전문가, 판사, 변호사 등 돈을 많이 버는 직업들로 획일화 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물질 만능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 획일화된 꿈을 학생들은 진정한 자신의 꿈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몇몇 학생은 그것이 진짜 꿈이자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의 꿈은 과일의 껍질에 불과하다. 과일을 하나 떠올려 보자. 우리는 이 과일에서 껍질을 보고 그것이 무슨 과일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먹는 부위가 껍질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먹는 부위는 껍질을 까고 남은 속이다. 즉, 실제로 우리가 그 과일을 정의하는 것은 껍질이 아니라 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학생들의 꿈을 보면 껍질은 사과인데 속은 귤이나 수박, 배 등의 다른 과일들로 채워져 있다. 학생들은 그 과일의 껍질이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진리이자 이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 껍질은 그저 허상이자 나중에는 버려질 잉여물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허상이자 잉여물인 껍질을 추구하는 허망 된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진실 된 자신의 속을 찾아, 진리를 찾아 모험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선 일단 우리의 꿈이라는 과일의 껍질을 도려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우리의 진리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꿈의 껍질을 벗겨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 껍질은 우리가 진로를 설정하면서부터 굳어져 두터워졌다. 이러한 허상이 우리의 뇌리 속에 너무 깊이 박혀버렸기 때문에 그 허상을 추출해 내기 위해선 자신의 자아를 직접 바라보려는 노력과 의심의 자세(의심이 변화의 시작이다.)가 요구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우리 몸에 배어 있지 않아 다시 적응하기 위해서는 여러 고난을 겪어야한다. 이러한 면에서 진리를 찾는 껍질로부터의 여정은 여러 고난을 인내해야 함으로 모험이라 정의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모험은 위의 두 가지 모험과는 다르다. 이 세 번째 모험은 삶의 진리를 찾는 모험이며, 이는 진정한 삶의 태도이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세 번째 모험을 성공한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사고가 '변화'할 것이며 우리의 생각들 또한 재정비 될 것이다. 이렇게 껍질로부터의 모험과 같이 진정한 모험이라 정의되는 대부분의 모험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 또한 변화시키는 그런 모험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다시피 우리가 모험이라 부를 수 있는 모험, 다른 말로 진정한 모험은 변화를 동행하는 모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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