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강의 준비중입니다.
인문학습원의 인도학교(교장 이거룡, 인도철학자)가 새해 봄학기 강의를 준비합니다. 이번 강의 주제는 <깨달음과 사유의 세계, 인도>입니다.
이거룡 교장선생님은 동국대 대학원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한 후 인도 마드라스대 라다크리슈난연구소(석사), 델리대 대학원(박사)을 졸업했습니다. 현재 선문대 통합의학대학원 원장으로 있으며 'EBS 세상보기' 강좌를 통해 심원한 인도의 사상과 문화를 쉽고 생동감 있게 다룬 바 있습니다. 라다크리슈난의 명저 <인도철학사>(전4권)를 우리말로 옮겼으며, 저서로 <아름다운 파괴> <두려워하면 갇혀버린다>와 공저로 <논쟁으로 본 불교철학> <구도자의 나라>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등이 있습니다.
▲ 인도학교 |
교장선생님은 봄학기를 준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초월과 명상, 신비주의와 요가로 대변되는 인도의 사상과 문화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차원 높은 영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위대한 발자취이다. 이번 강의는 인도사상의 입장에서 오늘 우리의 사유방식과 문화를 되짚어봄으로써, 물질만능의 왜곡된 가치관이 지배하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2013년 봄학기는 3, 4월 강의로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총 8강입니다.
<깨달음과 사유의 세계, 인도>
제1강 [3월7일] 다양성 속의 통일
겉으로 나타나는 인도의 다양성과 그 가운데 있는 조화와 통일의 의미를 살펴본다. 이를 통하여 획일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되짚어본다. 조화와 통일이란 우선 다양성을 인정하는 터 위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다양성은 인도 사람들의 느림과 유기적인 관련을 지닌다. 다양하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느릿느릿 갈 수 있다.
제2강 [3월14일] 업(業)과 윤회
자업자득(自業自得)을 강조하는 업사상과 윤회에 대한 믿음은 인도의 모든 종교와 사상의 밑바닥에 깔린 믿음이다. 업사상은 전생이나 내생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 사회에서 업과 윤회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제3강 [3월21일] 깨달음에 이르는 길, 요가(yoga)
요가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이미 인더스문명의 유적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요가의 본질을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베다> <우빠니샤드> <바가바드기따> <요가수뜨라> <하타요가쁘라디삐까> 등 주요 경전들을 중심으로 요가가 어떻게 변천해왔으며, 오늘날 우리나라에 소개된 요가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제4강 [3월28일] 영상 강의 - 인도 종교예술의 이해
① 인도인들의 생활 문화
② 힌두교의 사원 양식 / 북인도의 전형적인 힌두교 사원 양식을 볼 수 있는 카주라호 사원, 코나락 사원 / 남북 인도를 통털어 가장 웅장한 것으로 평가되는 미낙시 사원과 탄자우르 사원 / 마하발리푸람의 해양사원과 유서 깊은 칸치푸람의 카일라샤나트 사원 / 인도 사원 양식에 중요한 모티프로 나타나는 성(性)과 성(聖)의 관계에 대한 사전 이해를 도모한다.
③ 갠지스강 스케치 / 힌두교의 정화의례, 특히 강에서의 목욕의례가 지니는 의미를 이해한다.
④ 타지마할 / 이슬람교가 힌두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건축이나 무용 등에 나타나는 이슬람교 문화의 특징도 함께 이해한다.
제5강 [4월4일] 종교 없는 종교, 힌두교를 모르는 힌두교인들
인도인들에게 종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득적이다. 태어나면서 이미 어느 한 종교전통에 속해 있으며, 평생 그 태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이들은 스스로의 종교를 의식하지 않으며 종교란 삶의 한 방식(a way of life)이다. 우리 주변에는 종교에 대한 논의가 너무 많다. 우리 사회에 종교에 대한 물음과 논쟁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는 종교의 본질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6강 [4월11일] <바가바드기따>의 종교사상
인도사상사를 통하여 여러 경전들이 있었지만, <바가바드기따>만큼 인도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경전은 없다. 마하뜨마 간디는 <바가바드기따>를 자신에게 삶의 지침서라고 했다. 인도의 종교사상을 700구절의 노래로 압축한 이 경전은 흔히 힌두교의 <신약성서>로 비유될 정도이며, 힌두교 경전 중에 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우하게 되는 내면의 전쟁을 드라마틱하게 전개해가는 <바가바드기따>의 가르침을 통하여 욕망과 분노가 어떻게 극복되는가를 배운다.
제7강 [4월18일] 한국과 인도의 문화사상적 교류
아요다 왕국의 공주 허황옥과 김수로왕, 타밀어와 한국어, 인도불교와 한국불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낯익은 J. 끄리슈나무르띠와 오쇼 라즈니쉬, 인도의 IT산업과 오늘날 우리 기업의 인도 진출 등에 대하여 논의한다.
제8강 [4월25일] 이상적인 삶
전통적으로 인도인들은 다음의 네 단계를 거치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을 삶의 이상으로 생각했다. 이 네 단계는 ①종교적 수행과 학습에 전념하는 브라흐마짜린(brahmacārin, 學生期), ②가정을 이루어 후손을 생산하고 경제적인 기반을 조성하는 그리하스티야(gṛhastiya,家住期), ③가장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숲에 은거하며 명상에 전념하는 하는 바나쁘라스티야(vanāprasthya, 林捿期), ④모든 소유를 버리고 탁발하며 유행하는 산야사(saṁnyāsa, 遊行期)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삶의 터전 위에, 혹은 세속적인 삶의 연속으로서 명상과 수행이 가능하다는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가난한 자의 명상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 나가기보다 어렵다.
*강의 참고문헌 / 이거룡 지음 <아름다운 파괴>, 한길사 2010.
이번 강의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인문학습원 강남강의실에서 열리며 자세한 문의와 참가신청은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세요.
이거룡 교장선생님은 <인도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비행기가 어떻게 땅에서 뜨는지,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앞 날개에 제트엔진이 달려 있어서 마치 고무풍선에 가득 채워진 바람이 일시에 빠질 때 풍선이 일정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비행기도 그렇게 이륙하고 비행한다는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지요. 아마 중학교 때였던가, 비행기 동체는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듀랄루민'이라는 가볍고 단단한 합금으로 만든다고 배웠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군요.
설사 그렇다 해도, 아무리 날개에 성능 좋은 제트엔진을 달고 듀랄루민으로 가벼워진 몸이라는 것을 안다 해도, 막상 활주로에 몸을 뉘인 그 큰 덩치를 보면, 탑승구 앞에서 기다리는 그 많은 사람들과 이미 실었을 그 무거운 짐들을 생각하면,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난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가사의처럼 느껴집니다. 그 큰 덩치의 이륙과 비행은 저에게 다만 기적으로 다가올 뿐이지요. 무거워진 몸을 느낄 때, 시시각각으로 내리누르는 시간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저는 활주로 위에 맥없이 누운 비행기를 생각합니다.
도무지 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큰 덩치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도무지 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나의 현존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문득 이 무거운 중력을 떨치고 이륙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생각해 보면, 비행기는 그냥 뜨지 않습니다. 도무지 그 큰 덩치를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작은 바퀴 세 개로 노심초사 활주로까지 기어가서, 온 몸을 떨며 땅을 박차고 날아오릅니다.
비행기라고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땅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 무엇이든, 일정한 방향과 목표를 지니는 한 온 몸을 떨며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노력하는 한 방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괘도를 상실하지 않은 휘청거림, 그 서투른 몸부림의 궤적은 차라리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여 년의 인도 공부를 통하여 저는 체념과 초월의 경계를 넘나드는 숱한 구도자들의 아름다운 몸부림을 보았습니다. '길 위의 삶'을 보았습니다. 살아있는 자만이 그을 수 있는 신선한 궤적도 보았습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괘지 않고 흐른다'는 말이며, 흐름은 한쪽으로 기우뚱할 때 일어나는 것이지요. 기우뚱한 균형은 위험하지만, 살아있는 흐름을 원한다면 기우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삶이 기우뚱하지 않다면, 그래서 위험하지 않다면, 죽음이 오기 전에 이미 죽어있는지도 모릅니다. 고인 물이 그렇듯이, 흐르지 않는 삶은 결국 썩게 됩니다. 의식이란 미래로 이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흐르지 않으면서 흐름을 생각하기 때문에 썩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지금 이 순간에 있지 않을 때 썩기 시작합니다. 시루에 담긴 콩나물은 썩지 않고 잘 자라지요. 물이 지나가는 순간 온몸의 촉수를 뻗어 영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다시 물이 지나갈지 모르고, 다음 순간이 보장되어 있지 않을 때, 콩나물은 오히려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순간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예 콩나물을 물에 담가두면 금방 썩어버리지요.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순간이 느슨해진 것입니다.
누구든 무엇이든 현재의 순간이 느슨해지면 썩기 마련입니다. 고대 인도의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유행(遊行)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이나교에서는 한 곳에서 이틀 이상 머리를 눕히는 것을 금했습니다. 어디엔가 머문다는 것은 다만 다시 떠나기 위한 멈춤일 뿐이니까요. 걸식이 식사의 기본원칙이었던 것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에서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삶일지라도, 스스로가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며 사는 것이 수행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누구든 무엇이든 괜찮은 놈이 잘 썩기도 합니다. 음식은 잘 썩어야 괜찮은 음식이지요. 만일 빵을 샀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면, 그 빵은 먹을 수 없는 빵입니다. 식물도 괜찮은 놈들이 잘 썩습니다. 난이 그렇고 콩나물이 그렇지요.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괜찮은 사람이 잘 썩습니다. 세간에 닳고 닳은 사람은 잘 썩지도 않더군요. 저는 마음바탕이 괜찮고 민감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잘 썩는다고 생각합니다.
잘 썩는 사람들 중에는 이른바 성직자나 수행자들도 포함됩니다. 쓸 만한 바탕을 타고 났기 때문에 성직자가 되고 구도의 길을 떠나지만, 그 누구보다도 썩기 쉬운 이들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독 성직자나 수행자들에게 엄격한 계율이 강조되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편안한 일상에 만족하는, 안전한 사람들은 잘 썩지 않기 때문에 굳이 이런저런 계율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폐인이 될 가능성이 적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또한 안전한 사람들은 초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적습니다. 잘 썩는다는 것은 쉽게 전환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는 것은 '초인'이냐 '폐인'이냐의 기로에 서있다는 말입니다. 목을 꺾고 죽을 수도 있는가 하면 또한 찰나 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도 있는 순간이 바로 위험한 순간입니다. 위험하다는 것은 '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다만 '조심하라'는 말일 뿐이지요. 위험하다고 피하기만 한다면 삶은 무의미할 뿐이겠지요. 삶이 위험하지 않다면, 가슴 떨리는 삶도 있을 수 없습니다.
초월과 명상, 신비주의와 요가로 대변되는 인도의 사상과 문화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차원 높은 영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위대한 발자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8년 가을에 문을 연 인도학교는 인도사상의 입장에서 오늘날 우리의 사유방식과 문화를 짚어봄으로써, 물질만능의 왜곡된 가치관이 지배하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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