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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의 길,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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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의 길,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

[알림] 백두대간학교 12월 산행 안내

<백두대간걸작선> 12월 산행(제26강)은 <괘방령-추풍령 구간>입니다. 산행 주제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 흘러든 백두대간>. 옛날 과거 급제를 알리는 방이 걸렸다는 괘방령에서 산으로 들어갑니다.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 대항면을 잇는 고갯길입니다. 몇 차례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헬기장이 있는 가성산에 도착합니다. 이후 장군봉을 지나 시야가 확 트여 시원한 조망을 보여주는 눌의산입니다. 여기서 마루금은 급경사 내리막으로 추풍령을 향합니다. 내리막 급경사에 주의하며 하산하다 보면 과수원에 둘러싸인 시골 고향마을 같은 은편마을을 지나 추풍령에서 산행을 마감합니다. 산행일은 12월 22일 토요일입니다. 산행 난이도는 중하(★★)입니다.

▲ 걷다보면...시린 하늘 속 상고대 ⓒ백두대간학교

[교장선생님의 산행지 설명]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뼈와 같은 큰 산줄기입니다. 하지만 등뼈와 같은 큰 산줄기이기 때문에 백두대간이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던 것만은 아닙니다. 이미 산행지 소개 글에서 여러 차례 말씀 드렸다시피 백두대간은 하늘길이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백두대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단지 하늘에 가까운 높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하늘길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지혜가 깃든 거룩한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있으나 하늘의 영역에 속한 신성한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그 하늘의 지혜란 생명을 품어 키우고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지혜입니다.

백두대간은 소위 1정간, 13정맥이라고 하는 이 땅의 근간이 되는 산줄기들을 풀어내었을 뿐 아니라 열 개의 큰 강을 비롯한 수많은 강들을 품어 흐르게 함으로써 생명들이 몸 기대어 살아가게 한 생명의 터전이었습니다. 사람들도 그 산자락과 강기슭에 터를 잡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산길을 걷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백두대간을 하늘의 지혜가 깃든 땅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던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만나는 것이며, 백두대간이 흘러든 길을 따라 걸으며 이 땅의 모습들을 만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백두대간의 정신을 보다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구간이 12월 산행구간입니다.

▲ 가성산 표지석 ⓒ백두대간학교

백두에서 지리까지 호호탕탕 물결치며 흐르던 백두대간이 고요히 숨 죽여 사람 사는 세상 으로 흘러들어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진 곳이 바로 이번 산행 구간의 처음과 끝인 괘방령이고 추풍령입니다.

산행의 출발지인 괘방령은 해발 357m의 낮은 고개이지만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곳으로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입니다. 빗줄기 떨어져 북쪽으로 흘러들면 금강과 더불어 흐르고 남쪽으로 흘러들면 낙동강과 하나 되어 흐르게 됩니다.

괘방령 고갯마루에 서면 그저 어느 작은 시골마을에 선 듯하고 다소 현대화된 어느 산간마을에 들어선 듯도 하지만 이 고개는 이 땅을 흐르는 열 개의 큰 강 중 두 개인 금강과 낙동강을 구분하여 흐르게 하고 있는 분수령인 것입니다.

이 고갯마루가 괘방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입니다. 과거시험의 급제자들의 이름을 내다 걸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입니다.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후로는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은 당시의 관로였던 추풍령을 이용하지 않고 괘방령을 넘었습니다. 아무래도 '추풍낙엽'(秋風落葉)이 연상되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의 이름이 내다 걸린다는 괘방령을 넘는 것이 위로도 되고 자신감을 갖는데도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괘방령에서 추풍령으로 이어지는 구간에는 잘 알려진 산이 없습니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라 걷는 이들만이 간간이 지날 뿐입니다. 고요한 산길입니다. 눈이라도 내리면 고적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입니다. 떨어진 낙엽과 함께 적막함 쌓이고 내린 눈과 함께 고요함 깃든 산길입니다. 겨울 숲을 만나기 좋은 산길입니다.

▲ 가성산에서 눌의산 가는 길 ⓒ백두대간학교

겨울 숲은 떨어진 낙엽도 내린 눈도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죽음들과 삶을 잇고 있는 겨울 숲의 고요함을 따라 걷다보면 이내 가성산(730m)이고, 표지석조차 없어 다소 쓸쓸한 장군봉(625m)이고, 눌의산(744.5m)입니다. 추풍령 남서쪽에 솟아 있는 눌의산은 '어눌하게 생겼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나 그 뜻과는 달리 정상에 봉수대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망이 빼어나고 늠름한 산입니다.

눌의산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레 내려오면 추풍령입니다. 추풍령은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구릉에 불과한 해발 200m의 작은 고개이지만 국토의 대동맥이라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백두대간의 유일한 고개이기도 합니다.

백두대간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이 추풍령은 물이 적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해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되는 지역입니다. 이런 이유로 논농사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모두 포도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부산과 한양을 잇는 작은 사잇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번화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곳이 백두대간이 지나는 곳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는지 가수 남상규씨는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 가는' 고개라고 노래했지만, 눌의산에서 내려선 추풍령은 고개라고 하기에도 좀 멋쩍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저 평지에 자리한 어느 마을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고개를 구분하여 말할 때 주로 '영'(嶺), '현'(峴), '치'(峙)로 구분합니다. 엄밀하게 나누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대체적으로 '영'은 큰 고개를 부를 때 사용하고, '현'은 '영'보다 작고, '치'는 '현'보다 더 작은 고개를 의미할 때 사용합니다. 헌데 추풍령에는 '영'(嶺)자가 붙어 있으니 꽤 큰 고개입니다. 그렇게 고개는 크면서 고도는 낮은 탓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금강과 낙동강을 가르는 백두대간 마루금 상에 있는 추풍령에는 사람 사는 분주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정감어린 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2월 산행은 이렇듯 백두대간의 여러 모습을 품고 있습니다. 백두대간이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내려온 괘방령에서 산길로 들어가 겨울 숲의 적막함과 고요함 사이를 지나면 장바닥같이 왁자한 흥겨움이 살아있는 추풍령을 만나게 됩니다. 대간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으로 잠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겨울 숲의 적막함과 대간에 깃든 사람 사는 마을의 분주함을 아울러 만나는 산행 되시기 바랍니다.

▲ 눌의산 표지석 ⓒ백두대간학교

▶구간소개

- 산행코스 : 괘방령-가성산-장군봉-눌의산-은편마을-추풍령
- 산행거리 : 약 10.4km(도상거리)
- 소요시간 : 약 7시간
- 난 이 도 : 중하(★★)

[산행계획]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 두 분이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산악가이드 이철승 선생님은 백두대간 종주 등 산행경력 30년의 공인 등산안내인이고, 엄재용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3회 종주한 공인 등산안내인입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4152-1055 입니다.

01: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01:30 사당역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1:40 양재역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2:00 경부고속도로(하행) 죽전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5:00 추풍령 복돼지식당 도착(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340-2/043-742-2550)
아침식사 및 도시락 싸기
아침 메뉴 : 시원한 콩나물국
06:00 산행 안내 및 등반 교육/버스 이동
06:40 괘방령 도착. 산행 준비 및 스트레칭
07:00 괘방령 산행 시작
09:20 가성산
09:50 장군봉
11:00 눌의산. 점심 식사
13:30 은편마을
14:00 추풍령. 산행 마감
14:10 우리식당으로 이동(충북 영동군 추풍령면/043-742-2910)
옛날짜장면, 짬뽕, 탕수육과 고량주로 뒤풀이
16:00 서울로 출발
19:0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괘방령-추풍령 산행로 ⓒ백두대간학교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 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아이젠, 스패츠. 그리고 반드시 빈 도시락과 수저세트를 가져오세요.

<백두대간걸작선> 제26강 <괘방령-추풍령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3회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백두대간학교 홈피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선생님에게 해주세요. 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에도 많이 놀러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

☞참가신청 바로가기

▲ 눌의산에서 바라본 추풍령 ⓒ백두대간학교

[산행자료]

[괘방령] 357m.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 대항면을 잇는 977번 지방도로 위에 있는 고갯길. 이곳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괘방령이라 불리고 있다. 괘방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이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로서 추풍령 못지않은 큰 길이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을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들의 이름을 거는 '괘방(掛榜)'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고개를 지나 다녔다고 한다. 인근 고을에 부임하던 관리들까지도 한사코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추측도 후대의 의미 부여이기가 쉽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괘방(卦方)'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지명 표기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掛榜'이든 '卦方'이든 한글 표기는 '괘방'이어야 하는데 '궤방'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오기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로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비록 이곳이 해발 300m의 낮은 고개이지만 민족정기의 상징인 백두대간의 기운이 잠시 숨을 고르다 황학산으로 다시 힘차게 뻗어 오르는 곳이며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여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괘방령산장] 전원생활을 그리워하던 산장 부부가 가정집으로 지으려다가 산꾼들의 성화에 못이겨 산장 아닌 산장이 되었다 한다. 부부가 손수 3년여 공사 끝에 2007년 11월에 완공. 아직 대간길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아 산꾼들의 발걸음은 적은 편이지만 한번 다녀간 사람은 산장 부부의 넉넉한 인심에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한다. 대간 상에 많은 산장이 있지만 대간길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이용하기가 힘들지만 괘방령산장은 대간길과 접하고 있어 이용하기 편리하다. 젊은 시절 언더그라운드 기타리스트였던 괘방령 산장 주인과 부인이 산다.
[가성산] 730m. 높은 산은 아니지만 독립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동북쪽 경사면에 김천시립공원묘원이 있는데 규모가 꽤 크다. 동쪽 발아래로 고속도로와 철도가 경쾌하게 뻗어 있다. 동쪽의 가성마을과 외가성마을에서 유래하는 봉우리로서 '가성(枷城)'은 화령권의 '작점'이나 '사기점'처럼 소규모의 진지가 있었던 곳이다.
[장군봉] 625m. 가성산 바로 건너 산이지만 깊게 내려갔다 올라가야 한다. 가성산 정상을 넘으면 오른쪽으로 김천공원묘지로 가는 길과 왼쪽으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몇 십m 나가서 큰 바위를 왼쪽으로 돌아 밑으로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면 장군봉이고, 장군봉을 넘어서 계속 오르면 눌의산 직전 690m 봉우리다.
장군봉은 무사 장군이 아니라 장가 성씨의 총각 '長君'이라고 함.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신갈나무 무성한 부드러운 육산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음.
[눌의산] 744.5m. 추풍령 남서쪽에 솟아 있는 봉우리다. 직선거리로 2km밖에 안 된다. 정상에 헬기장이 있고 낮은 구릉지에는 포도과수원이 조성되어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가 서쪽에서 접근하여 북쪽과 동쪽으로 돌아서 남쪽으로 향한다. 추풍령에서 벌판이나 다름없는 화령지역은 그 성질을 다하고 눌의산 이후로는 덕유산권이 시작된다. '어눌하게 생겼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결코 어눌한 모습이 아니다. '訥嶬山'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눌의'의 또 다른 의미로 더디다는 뜻이 있는데 이는 추풍령 영마루를 사이하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양쪽 인정의 교류가 뜸하다는 것을 뜻한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주변 조망이 뛰어나다. 또한 옛날에는 요긴한 거점 구실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라에 긴급을 다투거나 외적이 침범했을 때 활활 타는 봉화를 피워 올려 제몫의 역할을 다했을 눌의산의 늠름함이 살아 있다.

-영동군
충북 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예전부터 교통로로 이용된 북동부의 추풍령과 괘방령은 지금도 고속도로와 지방도가 지나간다. 금강 상류지역으로 곳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금강에 흘러들고 있는데, 남쪽 석기봉에서 시작, 동부와 북부를 돌아 금강에 합류하는 초강천과 서부의 호탄천, 원당천 등이 있다.
고려 성종 때 계주자사(稽州刺史)를 두었다. 현종 이후에 경상도 상주에 소속되었다가, 조선 태종조에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속시키고 현감을 두었다. 고종에 이르러 영동군이 되었다.

-김천시
백두대간의 동남부에 위치한 김천은 당초 산간 취락에 불과했으나 조선 초 역마제도가 생긴 후 교역의 요충지로 탈바꿈 되었다.
삼한시대에는 감문국, 주조마국, 문무국, 배산국, 어모국이 감천 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신라 조분왕 때 장군 석우로가 감문국을 정벌하고 감문군을 설치했으며, 조선조에 김산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의 김천은 지난 1995년 과거의 금릉군과 통합된 후 시로 운영되고 있다. 금릉이라는 지명은 중국 동진의 수도로서 경관이 빼어났다고 알려진 금릉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지며, 김천(金泉)은 옛날에 이 고장에 금이 나는 샘이 있어 김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샘에서 나는 금은 나라에서 모두 가져가버려 부역이 두려운 이곳 사람들이 샘을 메워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추풍령] 221m.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룸.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 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가수 남상규씨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옛날 남쪽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秋風'으로 불리고 있다.

-군사적 요충지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 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 이제 칠팔 년이 지났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강점기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내륙 한양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6로에서 각각 지로(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새재가 조선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m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추풍령과 괘방령
옛날 과거 보러갈 때 괘방령으로 넘어가면 장원급제 방이 내걸렸고 추풍령으로 넘어간 벼슬아치는 추풍낙엽처럼 벼슬자리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괘방령과 추풍령.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내전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져 오는 이 두 고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 순간에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추풍령에 비하면 괘방령은 한적하다. 진군과 퇴각. 번다함과 적막함.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 전문가이며 작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인문학적 산행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했습니다.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등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등 민중가요들을 작곡하였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12걸작선> 3기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백두대간을 걸어야 하나요?"


백두대간이 아니더라도 산은 지천이고 발 닿는 곳마다 길인데 굳이 힘들게 백두대간을 걸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본래 산길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길 따라 걷는 것이니 굳이 백두대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대답합니다. 백두대간이 한반도를 하나로 잇는 큰 산줄기이기 때문에 굳이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백두대간을 걷는 사람들,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길 따라 걷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백두대간이 부르고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만이 백두대간 1,625km, 남한 구간 684km의 깊은 산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백두대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품어 키운 생명의 땅입니다. 생명을 품어 키운 자비심과 지혜가 깃든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신성하고 거룩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산의 이름이 백두산이어야만 하고, 남쪽 끝인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인 산의 이름은 지리산이어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백두산(白頭山)은 '지혜의 머리가 되는 산'이라는 의미이고, 지리산(智異山)은 '머물면 사람 사는 세속과는 다른 종류의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백두대간은 발로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걷는 길입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이어진 신심과 평화의 길 '산티아고'를 걷는 것처럼 제각기 마음에 담긴 신심으로 걷는 하늘길이다. 평화를 얻고 누리고 지키는 생명길입니다. 그러니 어찌 아무나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품고 걷는 자만이 백두대간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고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백두대간의 속살을 보며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 3기를 시작합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도반들과 함께 산길 걸어 온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백두대간 남한구간 약 684km 중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비법정탐방로로 지정하고 있는 79.9km를 제외하면 걸을 수 있는 구간은 약 604km 정도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제법 많이 걸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3기를 마치면, 비법정탐방로와 험난하고 힘든 코스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걷지 못한 다른 구간들을 걷고 싶으신 분들은 대간 종주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백두대간12걸작선> 3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 3기의 산행 코스를 정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초보자 코스와 중상급자 코스를 철저히 분리하였습니다.
둘째, 초보자들을 위한 산행을 늘렸습니다. 산행거리도 이전보다 짧게 조정하였고 상대적으로 쉬운 코스를 선택하였습니다. 트레킹 여행의 의미를 담아 겨울의 끝인 2월에는 초급자들을 위한 1박2일 산행도 계획하였습니다.
셋째, 중상급자들을 위해 1박2일 산행을 3회로 늘렸습니다. 평소에 혼자서는 산행하기 쉽 지 않은 종주 산행을 포함했습니다.(설악산, 덕유산, 지리산 종주 등)
넷째, 산행 구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구간별 난이도 표시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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