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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신(神)의 마지막 작품...백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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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늙은 신(神)의 마지막 작품...백령도"

[알림] 섬학교 11월 답사 참가 안내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의 제9강, 11월 답사는 <늙은 신(神)의 마지막 작품 백령도>입니다. 11월 3일(토)과 4일(일)의 1박2일로, 서울보다 평양이 가까운 절해고도(絶海孤島)이며 뛰어난 비경으로 이름난 백령도로 향합니다.

지난 3월 개교한 <섬학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들을 걸으며 사유하고, 소통하며 배우는 학교입니다. 섬학교의 섬 여행은 다리나 제방 등으로 육지와 연결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 위에 있는 섬들만을 답사합니다. 크든 작든 섬에서의 이동 수단은 가급적 두 발에 의존합니다. 섬 여행은 가급적 월 1회 떠나며, 작은 섬은 걸어서 일주, 큰 섬의 경우 섬의 가장 걷기 좋은 길 걷기를 기본으로 합니다.

섬에 남아있는 문화유적, 유배지, 당산, 어부림, 마을 숲, 당집, 사찰, 설화의 무대 등도 답사합니다. 해상 경관이 좋은 섬은 어선을 이용해 해상 일주도 하며, 마을 안길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또 답사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섬과 소통합니다. 섬의 토속 음식 맛보기, 섬 노인들로부터 특산물 구매하기 등으로 섬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오도록 합니다.

▲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 백령도 두무진 전경 Ⓒ옹진군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인 백령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서울보다 평양이 가까운 섬

오랜 세월 섬에 대한 욕망은 이중적이었습니다. 권력의 수탈을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섬은 유토피아였으나 권력으로부터 추방된 이들에게 섬은 형극의 땅이었습니다. 같은 공간이 어떤 이들에게는 천국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지옥이었던 셈입니다. 삶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행복한 이들에게 삶이란 영원히 누리고 싶은 천국이지만 불행에 빠진 이들에게 삶이란 속히 벗어나고픈 지옥이 아닐지요.

▲ 백령도 가마우지떼 Ⓒ섬학교

오늘 황해 바다는 잔물결 하나 없이 평온합니다. 섬으로 가는 통로인 동시에 단절이기도 한 바다. 내일 뱃길을 끊어 놓을지도 모르는 바다가 오늘은 섬으로 가는 통로가 되어 줍니다. 백령도로 가는 여객선 승객의 반은 군인과 군속들입니다. 백령도 거주 인구의 절반이 군인이지요.

서해 최북단의 섬 백령도는 한국에서는 8번째로 큰 섬이니 고대에는 부족국가 하나 정도 들어섰을 법한 땅입니다. 백령도는 오랫동안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지만 지금은 인천시 옹진군의 부속 섬이지요. 인천에서는 229km의 먼 거리지만 북한 장산곶과는 13.5km에 불과할 정도로 지척입니다. 서울보다 평양이 가까운 섬. 백령도는 북한 황해도의 여러 지역보다 위쪽에 있습니다. 백령도에 가기 위해 여객선은 북한 옹진군의 순위도, 어화도, 창린도, 비암도, 기린도, 마암도, 장연군의 월내도, 육도 등을 뒤로 하고 북진해야 합니다.

4시간의 항해 끝에 여객선은 백령도 용기포항에 입항합니다. 해병대 버스가 새로 전입 온 신병들을 싣고 사라집니다. 백령도 여정은 후배와 동행했습니다. 방송 일을 하며 도심 한복판에 사는 후배도 늘 걷기에 목말라 있습니다. 오늘은 둘이 함께 용기포에서 두무진까지 삼십리 길을 걷습니다.

한때 백령도는 대청도, 소청도와 함께 홍어 잡이로 유명했지요. 1986년에만 배 한 척당 평균 2천만 원의 어획고를 올렸다 합니다. 홍어가 사라진 것은 남획 때문입니다. 인근의 대청도처럼 백령도 또한 예전에는 제주도에서 해녀들을 초청해 수확해야 할 정도로 전복이나 해삼 등 해산물이 흔했습니다. 해녀들은 채취한 해산물을 그들을 고용한 어촌 계원에게 시가의 절반에 파는 것으로 대가를 받아 갔다합니다. 한때는 50여 명의 제주 해녀가 백령도에 상주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해산물도 귀해졌습니다. 그 시절 물질 왔던 해녀들 중 일부는 백령도 남자들과 결혼해서 눌러 살았습니다. 두무진에 있는 제주해녀 횟집은 그때의 흔적일 것입니다.

▲구멍바위 Ⓒ옹진군

해적에 시달리고 관에 시달리고...

백령도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농경과 어로를 하며 사람이 살았습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백령도는 본래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옛 이름이 곡도(鵠島). 고구려 멸망 후에는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지요. 고려 태조 때 백령도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진을 설치하고 진장을 두었습니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진이 폐쇄되고 주민들은 육지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그 후 섬은 왜구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지요.

조선 세종 때 잠시 수군 진이 생겼으나 오래지 않아 폐쇄되었고 광해군 때 가서야 비로소 다시 백령진이 설치되고 주민들의 재입주가 허가되었습니다. 지금의 면소재지가 있는 진촌리에 백령진이 있었습니다. 백령 진장인 수군첨절제사에는 정삼품의 당상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진장은 군사, 행정, 사법권을 가진 막강한 권력자였습니다. 백령 지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즉결 심판권이 있었지요. 심지어 죄인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 후 보고만 하면 되는 선참후계의 권한까지 주어졌다 합니다. 진장은 부장까지 두고 항상 군관 5인의 호위를 받았으니 백령 진장은 가히 백령도의 군주였던 셈입니다.

▲ 콩돌해안 Ⓒ옹진군

절해고도의 고립된 공간에서 절대 권력자의 횡포가 막심했을 것은 자명합니다. 이들 권력자들은 조정에서 받은 녹봉을 하절기에 주민들에게 강제로 대여했습니다. 대여 때는 소두로 주고, 추수철에는 대두로 받아갔으니 고리대금업자가 따로 없지요. 또한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 추포무사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선을 끌고 오면 주민들은 간장, 된장 등의 부식까지 제공해야 했습니다. 해적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관군이고 벼슬아치들이었습니다.

과거 백령도의 어민들이 관의 수탈에 시달렸다면 근세에는 인천 등지의 물상객주들에게 수탈당했습니다. 물상객주들은 초봄에 생활 물자들을 대주고 위탁 해산물을 파는 권리를 독점해 폭리를 취했으며 고액의 위탁 수수료와 저울을 속이는 등의 방법으로 어민들을 수탈해 갔습니다. 육지의 수탈을 피해 섬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다시 뭍에 예속되고 수탈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섬의 운명이었지요.

두어 시간 쯤 걸었을까. 북포1리 마을 해병여단 앞에서 갈림길이 나옵니다. 갑자기 이정표가 없어졌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길 가던 중년의 두 여인에게 길을 묻습니다.
"두무진 방향이 어느 쪽입니까?"
"못 걸어가요."
나그네는 방향을 물었는데 여인들에게서는 걸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군사지역이라 통제되고 있다는 것일까.
"거기까지 얼마나 먼데요. 거길 어떻게 걸어가요."

많은 사람들이 이동수단으로서 걷기를 버린 지 오래입니다. 운동을 하면서는 10킬로도 뛰거나 걷는 사람들이 이동을 위해서는 단 1~2킬로의 길도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걷기는 이동수단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관념이 고착화된 까닭입니다. 그래서 불과 30분 남짓 거리도 멀어서 걸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러닝머신 위에서는 두세 시간쯤 너끈히 걷거나 뛰지요.

▲ 춤추는 두무진 Ⓒ옹진군

'서해의 해금강' 두무진

두무진은 백령도의 최서북단입니다. 두무진 앞 바다에는 금강산 만물상처럼 형제바위, 코끼리바위, 촛대바위, 신선바위 등의 기암괴석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그래서 서해의 해금강이라고들 하지요. 광해군 때 유배왔던 이대기는 두무진의 풍경에 매료되어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찬탄했다 합니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두무진이 오랫동안 왜구와 해적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1802년 간행된 <백령진지>는 두무진이 "해로의 지름길이요. 배 대기 편리하여 해적의 출입하는 문지방"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령진이 설치되면서 두무진 앞 낭떠러지 위에 기와로 요망대를 짓고 해적의 출몰을 감시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망을 보던 망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해군기지와 초소들이 들어서 있지요.
두무진 앞 바다의 포식자는 셋입니다. 사람과 물범과 가마우지. 물범은 물개와 생김이 비슷하지만 겉으로 돌출된 귀가 없습니다. 겨울 동안 번식을 위해 중국의 보하이(발해) 랴오뚱만의 얼음바다로 간 점박이 물범들이 봄이 되면 돌아옵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물범을 옥복수(玉服獸)라 했습니다. 당시에도 모피 옷을 얻기 위해 포획됐던 모양입니다. 그 때는 서해 전역이 물범의 집단 서식처였다고 전해지지만 지금 물범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두무진 앞바다 또 하나의 포식자는 가마우지입니다. 두무진 바위 절벽에 집을 짓고 사는 가마우지들은 물 속 40m까지 잠수해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들입니다. 중국에서는 가마우지를 길들여 물고기 사냥에 쓰기도 한다더군요.

▲ 백령도 물범들 Ⓒ옹진군

북한 영해와 인접한 백령도 바다에는 어로제한선이 있습니다. 더 많은 어획고를 올리기 위해 어로제한선을 넘으려는 어선들과 단속하는 군이 자주 대립합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황금어장이 되어가던 어로제한선 해역이 지금은 온통 중국 배들 투성이입니다. 남북이 대립하는 사이 중국 어선들이 몰려와 싹쓸이 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령도, 대청도 지역 어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근래에는 백령도 어선 한 척이 분을 못 참고 돌진해서 중국 어선을 들이받는 사고까지 있었다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중국 어선을 어로제한선 해역으로 처음 끌어들인 장본인이 한국 사람이란 사실입니다. 백령도에서 배를 타다 중국배의 선장으로 취업한 사람이 중국 배를 끌고 와 싹쓸이 해가고 있다 하니 돈 앞에서는 국가도 민족도 없습니다.

심청이 효녀라고?

진촌리 북쪽 산 중턱에는 심청각이 있습니다. 백령도는 황해도 해주와 함께 <심청전>의 무대가 되는 곳입니다.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 두무진에서 15km 정도의 지점에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습니다. 백령도 사람들이 인당수 혹은 임당수라 부르는 이곳은 옛날부터 백령도 어부들에게 물살이 세고 험한 곳으로 악명 높았다지요.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에는 심청이가 연꽃을 타고 올라 왔다는 연봉바위가 있습니다. 백령도에는 또 심청이 연꽃을 타고 떠내려 왔다는 연화리 마을도 있습니다. 설화가 현실의 무대를 빌어 생명을 얻은 것은 아닐런지요. 심청각에서는 북한의 장산곶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건널 수 없는 바다는 수만 리 창해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심청각 앞에는 건립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옹진군에서는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인 효를 관광 상품화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효의식을 고취하려는 뜻에서 인당수와 연봉바위가 보이는 이곳에 시군비 29억 원을 들여 심청각을 건립하고 1999년 10월 20일 준공 개관하였다."

▲ 천연 비행장이었던 사곶해변 Ⓒ옹진군

심청각은 건평 54평, 연면적 109평의 2층짜리 시멘트 건물입니다. 언뜻 보기에 지붕에 기와를 덮어 한옥 같아 보이지만 겉모습만 흉내를 냈을 뿐 한옥은 아닙니다. 벌써 10년도 전에 이런 시멘트 건물 하나와 전시실의 몇 가지 모형을 꾸미는데 29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심청각 공사의 예산 낭비보다 심각한 문제는 실상 심청의 효를 찬양하는 행위입니다. 심청전이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중들이 심청전을 애송한 것은 심청의 효도 때문이 아닙니다. 심청의 효가 엄청난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보상받지 못하는 희생에 대해 민중들은 열광하지 않습니다. 바다에 몸을 던졌으나 용왕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송나라 황제의 황후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심청의 효행에 대한 보상이 대리 만족을 주었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보상을 논외로 하고 심청의 효행 자체만을 놓고 볼까요. 심청은 눈먼 아비의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팔았습니다. 아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딸이 목숨을 버리는 행위를 효도라 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도 효도일까요. 그것이 효도라면 참으로 끔찍한 효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왕조 사회에서는 심청처럼 자식이 아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행위가 칭찬받을 수 있었습니다. 백성의 아비인 왕을 위해 자식인 백성들이 언제든지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왕조 사회의 통치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겠지요. 충과 효가 같은 덕목인 것은 그 때문이지요.

▲ 한때 해산물이 풍부했던 백령도 Ⓒ섬학교

하지만 왕조시대에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린 아비가 있었습니까.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왕이 있었습니까. 왕을 비롯한 지배세력들은 국란이 터지면 제 한 몸 살기 위해 백성의 목숨쯤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심청의 효는 국가이데올로기인 충을 강요하기 위한 억압의 기제로 이용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한 상황은 변함이 없습니다. 심청이 인신매매되어 목숨을 잃는 것은 엄혹한 현실이지만 용궁으로 가고 연꽃에 모셔져 송나라 황후가 되는 것은 판타지입니다. 판타지의 보상을 미끼로 현실의 목숨을 요구하는 행위는 분명 사악한 짓입니다. 심청은 왕조사회 충효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심청의 효행은 안타까움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심청각까지 지어 심청의 효도를 칭송하고 미화하는 것은 목숨을 경시하는 죄악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도 자식도 함께 사는 일이 아닐까요. 자식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효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엽기적이고 잔혹한 효도관

심청각에는 심청의 효행 이야기만이 아니라 또 다른 끔찍한 효행 이야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 시아버지를 살린 며느리 이야기입니다.

"어느 때 시아버지가 산 고갯길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호랑이가 시아버지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며느리는 업고 있던 아이를 호랑이게 던져주고 시아버지를 살렸다. 그 사실을 안 남편이 아내에게 잘 했다고 칭찬하며 절을 했다.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아이를 살려주었다."

술주정뱅이 시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죄 없는 어린 것을 호랑이의 입에 던져준 행위를 효도라 할 수 있을까요. 봉건왕조시대,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의 끔직한 효 이데올로기를 효행의 본보기로 전시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심청각을 만든 관료들이 무지한 것일까요. 아니면 잔인한 것일까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행위는 생명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반생명적인 효도교육 전시는 당장 중단되어야 마땅합니다. 더구나 그런 효도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행위는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합니다. 어느 생명도 존중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효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심청각 마당에는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드는 조형물이 있고, '심청의 효, 인류 구원의 불빛'이라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어째서 인류는 늘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타자의 희생을 통해서만 구원받고자 하는 걸까요. 스스로 희생할 생각은 않고 희생양을 찾아내 인류의 짐을 떠넘기려고만 드는 걸까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인류가 심청을 바다에 던지고도 여전히 뉘우치지 못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백령도 간척사업, 수백억 낭비에도 책임지는 사람 없어

백령도에서 둘째 날, 오늘은 용기포구 민박집에 숙소를 잡고 사곶해변을 지나, 백령호와 간척지, 중화동 교회전시관까지 걷습니다. 함께 온 후배는 발에 물집이 잡혔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따라 나섭니다. 사곶해수욕장은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함께 세계에 단 두 곳뿐인 천연 비행장으로 유명합니다. 용기포에서 시작된 백사장은 10리길. 이곳의 모래밭은 미세한 규암 가루가 두껍게 쌓여 이루어진 해안입니다. 옛날에는 물이 빠지면 콘크리트 바닥처럼 단단해서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이 천연 활주로로 활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썰물 때면 지금도 자동차들이 아스팔트길처럼 달리기도 하지만 이 해변은 더 이상 천연 비행장 역할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스폰지 현상으로 곳곳이 푸석푸석한 모래밭으로 변해 버렸고 설상가상 갯벌화되고 있기까지 한 까닭입니다. 두발로 걷다가도 자주 발이 푹푹 빠집니다. 바다 가까이 걸으면 그나마 조금 더 단단합니다. 해안가를 따라 수 킬로에 이르는 옹벽을 쌓고, 백령호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방을 막은 까닭입니다. 이 옹벽과 제방이 주변 조류의 흐름을 바꿔 놓아버린 것이지요. 조류가 바뀌면서 점토질의 퇴적물들이 먼 바다로 쓸려 나가지 못하고 해안으로 유입되어 사곶 모래밭에 엉켜붙어 모래밭을 갯벌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심청이 연꽃을 타고 올라왔다는 연봉바위의 일몰 Ⓒ옹진군

이 지방에 전해 오는 말에 "먹고 남는 백령도, 때고 남는 대청도, 쓰고 남는 소청도"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부터 백령도는 농토가 넓어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합니다. 그럼에도 사곶과 화동 사이 820m 바다 물길을 막아 담수호를 만들고 만 안쪽의 갯벌 350ha(100만여 평)를 논으로 만들었습니다. 간척 사업에 40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습니다. 농어촌진흥공사의 작품입니다. 간척이 되기 전 갯벌 바다에는 꽃게와 가자미가 넘쳐났고 김 양식과 굴 양식은 어민들에게 큰 소득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제 갯벌은 사라지고 간척사업이 끝났지만 새로 생긴 100만 평의 논 또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이 있어야 농사도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129ha(40만 평)의 담수호를 만들었으나 염분의 유입으로 담수호는 쓸모없는 저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문을 막아 가둔 담수호에는 망둥어나 숭어, 붕어 따위나 살아갑니다. 가두어놓아 썩어가는 물은 여름 장마철에만 방류합니다. 그때 썩은 부유물들이 백령도 해안을 검은 띠처럼 감싸고 돈다합니다. 백령도에서 만난 주민들은 간척지를 논으로 쓰지 못할 바에야 둑을 허물고 갯벌을 되살려주기를 바라지만 요원한 일처럼 보입니다. 관청의 실패를 자백받기란 쉽지 않은 때문이지요. 간척사업의 실패로 막대한 예산이 낭비됐고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갯벌이 유실됐습니다. 게다가 천연기념물인 사곶해수욕장까지 썩어가게 만들었지만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나라에는 티끌만한 공로에도 표창을 받는 관료들은 부지기수지만 크나큰 정책 실패에도 문책받는 관료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이 이 나라 공기업과 정부 조직의 현실입니다. 정책 실명제가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 백령도의 밤하늘 Ⓒ옹진군

홍합 따는 노인

두무진 길에 비해 중화동 가는 길은 상대적으로 한적합니다. 군부대 수가 적으니 이동하는 차량도 드문 편입니다. 중화동교회는 1884년 황해도 소래에 첫 번째 교회가 세워진 이후 이 땅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라 합니다. 그런 영향인지 섬 주민의 80% 이상이 기독교 신자지요. 중화동 해변에서 노인 한 분이 깐 홍합을 바닷물에 씻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홍합 조금만 파실 수 있으세요?"
"가게 하는 사람이 맞춰 놓은 거라."
노인이 주저합니다.
"그래도 아주 조금만 파세요. 둘이 저녁에 술안주나 하려구요."
마침 손가방에 비닐 팩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하나 가득 담아주십니다.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뭔 돈을 받갔시오."
"그럼 저희가 죄송하지요."
노인은 한사코 손을 젓습니다. 만 원권 한 장을 건네드립니다. 도시의 시장에서 산다면 몇만 원어치는 족히 되고도 남을 양입니다.
"그건 너무 많시다."
받지 않으려 하신다.
"그럼 5천원 드리겠습니다."
노인은 마지못해 돈을 받으시면서 미안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미안하오. 돈을 받아서리."
미안한 건 우리지요. 누가 맞춰놓은 것을 억지로 팔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노인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전거에 홍합 광주리를 싣고 마을로 사라집니다. 노인의 등 뒤로 노을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섬학교 11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2년 11월3일(토) : 버스로 섬 일주 및 두무진 걷기와 유람선 여행>

07:00 서울 출발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08:00 인천연안 부두 도착
08:50 인천 출항
13:00 백령도 용기포항 도착
13:20 점심식사
(<장촌냉면>에서 주문받으면 직접 뽑아주는 백령도 특산 메밀냉면과 녹두빈대떡)
14:20-15:00용트림바위 일대 산책
15:20-16:00 콩돌해안 산책
(천연기념물 392호)
16:30-17:10 두무진 기암괴석 해상관광
17:10-18:10 두무진 산책로 걷기
(2km)
18:20-20:20 저녁식사 겸 뒤풀이(두무진 <해당화횟집>에서 백령막걸리를 곁들여 자연산 생선회와 매운탕요리)
20:20 숙소 이동 후 휴식, 취침(아일랜드캐슬)

<11월 4일(일) : 심청각, 장산곶 탐방 및 사곶 해변 걷기>

06:30 기상, 아침산책
07:30 아침식사
(해장백반, 아일랜드캐슬 식당)
08:30-09:20 심청각 탐방 및 북한 땅 장산곶 조망
09:30-11:30 천연비행장 사곶해변 걷기
(4km)
12:00 점심식사(한식, 아일랜드캐슬 식당)
13:00 용기포항에서 장보기(백령도산 꽃게나 가리비, 고동 해산물을 어선에서 직접 구매)
14:00 백령도 출항
18:00 인천연안 부두 도착, 서울 향발


▲ 백령도 안내도

[학습자료]
[백령도]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강역이었다. 백령도의 원래 이름은 곡도(鵠島), 따오기[鵠]가 흰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법정리 5개(행정리 17개), 섬이지만 농토가 많아 농사가 주업이다. 농가 45%, 어가 8%, 기타 47%. 동경124도53분 북위37도52분. 면적 50.99㎢, 한국에서 8번째로 큰 섬이다. 총 인구 약 1만여 명중 민간인은 2,530세대 5,006명, 나머지는 군인. 초등학교 2개와 중·고교 각 1개. 인천 서북단 222㎞ 거리.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많다.

[두무진] 명승 제8호. 백령도의 북서쪽 포구다. 뾰족한 바위들이 많아 머리털 같다고 하여 두모진(頭毛鎭)이라 부르다가 후에 장군머리 같은 형상의 두무진으로 변했다고 한다. 해적의 출입이 많았다고 전해지며 1832년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가 두무진을 통해 상륙하였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기암괴석이 솟아 있어 금강산의 만물상과 비견되어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린다. 특히 선대암은 1612년(광해군 5) 백령도로 귀양 온 이대기(李大期)가 <백령도지(白翎島誌)>에서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풍광이 빼어나다.

[사곶해변] 천연기념물 제391호. 사곶해변은 규암가루가 모여서 이루어진 4km 길이의 해변이다.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이 임시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하기도 했다. 천연 비행장으로 쓸 수 있는 해변은 전 세계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해변과 백령도 사곶해변 두 곳뿐이라 한다. 하지만 간척사업으로 인해 조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모래사장의 훼손이 심각하다.

[콩돌해안] 천연기념물 제392호. 백령면 남포동에 위치한 해변. 길이 2km 폭30m. 콩알 모양의 작고 둥근 자갈들이 해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백령도 여러 해안에는 규암으로 구성된 콩만한 자갈들이 많다. 진짜 콩인 듯 착각이 들 정도다.

[물범바위] 진촌리 뒤편 바다에 있다. 천연기념물 331호인 물범 300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으나 육안으로는 보기가 어렵다.

[용틀임바위] 장촌마을 해안에 있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자바위] 고봉포구 위치. 사자 모양의 바위이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일부 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스틱, 물통,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배가 섬에 들어가지 않음)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학교 제9강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27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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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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