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강의를 맡은 이지영 교수는 강좌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테마를 제시한다. '왜 르네상스 화가들은 그 당시 그렇게 많이 수태고지를 그려야 했는가?', '근대철학의 이성적이고 통일적인 주체가 아니었던 인간의 모습과 위치가 르네상스 그림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었나?', '15~17세기 그림에서 운동과 시간의 문제가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리고 이것들과 연결하여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이 강좌를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문제이다.
앞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 15세기 르네상스 시기는 철학자들처럼 말과 이론을 통해 이성적 가치와 신적 가치의 변화를 판별하고 규정할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이 때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예술가들은 변화하게 될 것들을 미리 자신 앞으로 끌어당겨서 자기의 작품 속에서 그 역동적 에너지를 표현하려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변화를 좀 더 빠르게 느껴 그것을 철학이나 과학에서 이루어내기 이전에 예술의 영역에서 먼저 성취한 사람들이다.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들은 그것을 원근법으로 표현한다. 당시 원근법은 단순히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원근법이라는 구성방식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들도 그랬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원근법을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와 연결시키고 근대 과학의 공간관과 시간관에 연결시키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과정이 생각보다 체계적이지는 않았고 역사적으로 수백 년간 서서히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그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림 속에 서서히 점층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성적 활동으로서의 원근법 : 공간의 통일성
르네상스 이후 인간이 신 대신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면서 데카르트의 세계관이나 17세기 이후의 근대 과학에서 말하는 공간과 시간의 물질적 개념이 등장하였다. 즉 무한히 펼쳐진 동질적이고 측정가능하며 어디서도 지적 차이가 없는 공간, 인간이 계산하여 정복할 수 있는 무한한 물질세계가 존재하며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원근법적 질서이다.
15세기의 원근법은 '코멘수라티오'라고 불리웠다. 코멘수라티오는 '측정할 수 있는' 또는 '같은 단위로 잴 수 있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세계를 보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제 세계는 인간에 의해 측정되는 것으로 다가왔고 신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유한했던 인간존재는 이제 무한한 물질세계 위에서 도구로 세계를 측정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혁명적 변화다. 『서양 미술사의 재발견』에서 저자 다니엘 아라스는 원근법이 우리에게 가장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한 발견을 해낸 부분은 공간과 시간을 기하학화 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세상과 독대해서 자신의 잣대로 재고 바라보는 독자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을 볼 때에도 거리감이라는 기능을 통해 재현된 대상의 조화로운 비례구조를 관람자가 어떤 위치와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림의 의미가 달라지듯이 말이다.
15세기 화가들은 <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려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는 아기예수가 인간의 몸이 되는 순간이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을 의미한다. 수태고지의 많은 그림에서 성육신은 원기둥으로 현현되고 그것은 수태고지의 핵심 그 자체이지만 감히 쉽게 재현될 대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 화가들은 수태고지 그림 안에 구체적인 물질 공간을 담기 시작했다.
▲ 수태고지 ⓒFra Angelico(프라 안젤리코) |
만약 캔버스가 없다면 그림의 소실점은 캔버스를 뚫고 나가 무한한 공간을 지향한다. 원근법은 바로 무한함을 담고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15세기 사람들이 무한(신의 영역)을 그림 안에 표현한다는 것은 두렵고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당시 무한은 상식이 아니었다. 척도로 잴 수 없는 신의 영역인 '무한'과 척도로 잴 수 있는 인간의 영역인 '유한'의 관계가 결국 수태고지에서 성육신의 회화적 수수께끼와 관련하는 지점이다. 능력자인 신이 구체적인 존재로 현현하는 그 포인트가 성육신이며 수태고지의 핵심이다. 이 순간 원근법이 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이 수태고지 그림들은 그림 하나하나의 대상과 요소들이 수많은 상징과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에는 그림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하나의 텍스트로서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모난 창을 통해 그 프레임으로부터 그림의 구도를 관조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단순한 그림의 틀이 아니라 지성 활동으로서의 프레임(생각의 틀)이 되는 것이다.
이지영 교수는 수태고지의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정지해 있는 영원한 시간성'이라고 말했다. 천사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오고가면서 찰나에 성육신이 일어나는 신비의 순간을 담고 있지만 이것은 다 구약의 얘기이다. 이 모든 것은 성서적 사건의 해석이자 그 의미를 영원불멸하게 고정시키려 하는 것으로 보이며 스쳐지나가는 순간의 포착이 아닌 영원한 신적 질서가 느껴지는 그림인 것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 공간의 통일성에서 시간의 통일성으로
바로크 시대에는 종교개혁과 신대륙 발견, 과학의 발달,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해 혼란이 연속되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점점 우주만물의 변화무쌍함과 덧없음을 깨닫기 시작했고 인간의 관습과 이성, 감각, 종교-신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특히 이 시기 바니타스(Vanitas)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그림은 해골이나 먹다 남은 음식, 찰나의 빛을 이용해 죽음과 소멸이라는, 결국은 허무할 수밖에 없는 대상의 한계를 표현하고 있다.
카라바조(Caravaggio)의 그림들은 15세기 수태고지의 그림과 비교할 때 인간세상의 느낌과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세의 허무함을 운동성을 통해 드러낸다. 그런데 운동은 시간의 문제이다. 찰나적 운동의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순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간은 텅 비어있는 곳으로, 죽음으로, 無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하인리히 뵐플린은 『미술사의 기초개념』에서 16세기는 평평하고, 정적이고, 부동하며, 선(線)을 강조하지만 17세기는 운동을 강조한다고 했다. 그러니 17세기의 그림은 구도자체가 이전과는 달라진다. 수태고지의 그림들은 일렬로 배치되어 평평하고 운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그림은 인물들의 위치가 매우 다양하게 배치된다. 17세기 그림들을 관통하는 운동성은 운동의 한 지점으로서 찰나의 순간을 통해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9 ⓒCaravaggio(카라바조) |
17세기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시녀들>은 그림 속 대상들의 위치와 시선, 전체적인 구도, 빛의 효과적 사용을 통해 캔버스 앞 실제 공간의 관람자를 그림 쪽으로 끌어들이고 그림의 대상을 실제공간으로 끌어낸다. 그리고 이 그림의 미묘한 시선처리와 오묘한 대상의 배치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상호교환을 끊임없이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항상 보이는 자와 보는 자가 누구인지 헛갈리게 만든다. 푸코의 말에 따르면 <시녀들> 화면 밖의 실제 자리는 관람자와 모델과 화가의 역할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자리라고 말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2차원의 평면공간과 3차원의 실제공간이 시점 문제로 끊임없이 연루되고 서로 공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에는 고전주의 시대의 표현법에 대한 '재현'과 그 재현이 우리에게 열어놓은 공간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시녀들>에서의 재현은 재현의 모든 요소들, 즉 재현의 이미지들, 재현이 향하는 시선들, 재현을 통해 보이는 얼굴들, 재현을 낳게 한 몸짓들과 더불어 스스로를 재현하려 한다." - 강의록 중에서 -
<시녀들>은 벨라스케스가 다시 재현한 것이지만 그 재현을 가능하게 한 주체의 출발점은 근대인들이 얘기하는 주체와는 달리 끊임없이 헛갈리는 자리여서 하나의 확고하고 통일된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이 들어갈 자리는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재현을 이루어 낸 것의 시작점은 르네상스의 인간과는 다르지만 근대적인 주체와도 다르다. 이 그림은 당시 명확하게 확립되지 않았던 이른바 인간의 주체성과 같은 것을 고전주의적인 재현으로 보여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시녀들 ⓒ벨라스케스 |
푸코는 <시녀들>의 분석을 통해, 그림 안에서는 무관심적으로 드러나지만 실제 그림 속에는 생략되어 있는 국왕부부의 대상적 소멸을 통해 고전적 재현 방식(수태고지의 방식처럼)의 재현이라는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Epistēmē,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된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는 아직 주체가 탄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인간이란 그저 재현을 이루는 한 요소에 불과할 뿐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통일적 근거도, 주체도 아니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선험적 주체'라는 것은 고전주의 시대 이후, 근대라는 특정 에피스테메의 틀 안에서 탄생된 역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지영 교수는 이 강의를 준비하며 발견한 것 중 하나가 바니타스화(Vanitas와 Memento mori의 그림처럼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미술에 표현한 것)와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던 '빛의 허무함'이라고 말했다. 끊임없이 나누어지고 확정되지 않아서 뺏길 수 있고 교환될 수밖에 없는 자리가 결국 '인간의 자리'라는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은 알았다는 것이다. 재현에 속해 있고 재현을 가능하게 하지만 모든 재현의 중심점이라고 할 수 없는 주체이다. 이 그림들은 여전히 신적 질서 안에서 평화로이 살 수 있는 인간도 아니고, 중세적 관념을 모두 버리고 과학을 믿으며 이성을 통해 강력한 이성적 주체인 인간 자신을 믿으면서 살 수 있는 인간도 아닌, 그 중간에서 한계를 목도하고 끊임없이 고뇌하며 한계에 시달리는 인간의 위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정리하자면, 르네상스에서 16세기까지는 운동이 잘 표현되지 않고 17세기에 운동이 드러나는 여러 구조상의 차이들이 등장한다. 결국 이 변화의 차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태도의 차이이며 한계를 직시하는 인간존재의 모습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 7월 14일에는 '기억의 재배치가 필요한 시간 - 코로의 <모르트퐁텐의 추억>과 베르그송의 예술 감정'이 류종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의 강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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