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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섬' 이작도와 '바다의 사막' 풀등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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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해적섬' 이작도와 '바다의 사막' 풀등 기행

[알림] 6월의 섬학교 <옹진 이작도 답사> 참가 안내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의 제4강, 6월 답사는 <'해적섬' 이작도와 '바다의 사막' 풀등 기행>입니다. 6월 2일(토)과 3일(일)의 1박2일로, 30여만 평의 풀등과 해적섬의 전설이 전하는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이작도로 향합니다.
▲ 해적들도 아름다운 섬을 좋아했을까. Ⓒ섬학교

지난 3월 개교한 <섬학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들을 걸으며 사유하고, 소통하며 배우는 학교입니다. 섬학교의 섬 여행은 다리나 제방 등으로 육지와 연결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 위에 있는 섬들만을 답사합니다. 크든 작든 섬에서의 이동 수단은 가급적 두 발에 의존합니다. 섬 여행은 가급적 월 1회 떠나며, 작은 섬은 걸어서 일주, 큰 섬의 경우 섬의 가장 걷기 좋은 길 걷기를 기본으로 합니다.

섬에 남아있는 문화유적, 유배지, 당산, 어부림, 마을 숲, 당집, 사찰, 설화의 무대 등도 답사합니다. 해상 경관이 좋은 섬은 어선을 이용해 해상 일주도 하며, 마을 안길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또 답사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섬과 소통합니다. 섬의 토속 음식 맛보기, 섬 노인들로부터 특산물 구매하기 등으로 섬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오도록 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 나를 내려놓을 때,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섬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옹진 <'해적섬' 이작도와 '바다의 사막' 풀등 기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왜구의 거점이었던 섬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이작도.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합니다. 서남해의 여러 섬처럼 고려 말에는 이작도가 왜구의 거점이었던 까닭입니다. <고려사> '변광수전(邊光秀傳)'에 "고려 말 왜구들이 이 섬을 점거하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약탈하던 근거지라 하여 이적(夷賊) 또는 이적(二賊)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고려사>에는 공민왕 13년(1364년)에 현물세를 운반하던 배가 이 섬 근처에서 왜구에 의해 자주 습격을 받자 무장 전선 80여척을 동원해 수송케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조선시대에도 소규모 해적 집단이 이작도를 은신처로 삼았다 합니다.

이작도는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두 섬이 마주보고 있는데 소이작도 휘청골에는 임진왜란 이후 살았던 해적들의 집터와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소이작도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휘청골로 갑니다. 휘청골 해변은 작고 옹색합니다. 큰 무리의 해적이 숨어 살기는 좁아 보입니다. 더 큰 무리의 해적들은 대이작도에 숨어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숲속에는 돌무더기들만 더러 남아 있습니다. 숲에는 또 무덤 몇 기가 있지만 관리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해적의 무덤은 아닐 것입니다. 해적의 무덤이 남아있다 한들 비석에 해적의 묘라고 새겨지지 않은 바에야 어찌 찾을 길이 있겠습니까.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였지만 왜구가 아니라도 섬에 숨어 살던 소규모의 해적집단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 해적을 '포작'이라 했습니다. 이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가끔씩 왜구들과 결탁을 해 노략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라가 키운 도적이었던 셈이지요.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해상 지리에 밝은 포작들을 왜군과의 전투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임란 이후에는 일부 포작들이 양민으로 환원됐지만 대부분은 해적으로 남았다 합니다.
▲ 섬에는 더 이상 청춘도 비애도 없을까. Ⓒ섬학교


해양왕국의 역사는 해적의 역사

해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깁니다. 하지만 인류의 해양사에서 해적과 비해적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강한 군사 집단이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노략질을 하고 땅을 빼앗고 백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해적질과 무엇이 다를까요. 역사가들은 이를 정복이란 이름으로 미화시키지만 해양왕국의 역사란 바로 해적의 역사에 다름 아닙니다. 먼저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운 해적 두목은 왕이 되고 뒤에 나타난 세력은 해적으로 이름이 남겨졌을 뿐이겠지요.

중세 유럽의 가장 악명 높은 해적은 바이킹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잉글랜드 섬과 러시아를 침략해 노르만 왕조와 키에프 공국을 세웠습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의 악명 높은 해적이자 노예 상인이었던 호킨스나 드레이크 등은 국가의 공인을 받은 해적이었습니다. 해군제독이 된 해적 두목 드레이크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영 제국의 세계 지배에 일등 공신이 되기도 했지요.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였습니다. 왜구는 단순한 도적이 아닙니다. 지방 호족인 사무라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통솔된 수군 집단이었습니다. 왜구들은 중국 해안을 비롯해 한반도 연안의 각 고을을 노략질하고 강간과 납치, 방화와 살인을 일삼으며 조정의 세곡선까지 약탈해 갔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포도청 종사관과 포졸을 사칭하고 해적질을 한 자들이 있었지만 그 세력은 중국이나 일본 해적들에 비해 미미했습니다. 중국에서는 "관리가 되려면 먼저 도적의 수령이 되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였다 합니다. 그 격언은 여전히 이 시대 이 땅에서까지 통용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정치를 하려거든 먼저 돈을 벌어라." 티켓 다방으로, 건설, 토목업으로 재물을 모은 폭력배들이 일부 지방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이 나라 현실입니다. 얼마 전, 해남 군수는 자신이 한 때 조폭 조직원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떠들기도 했습니다. 이 땅의 '정치꾼'들이 나라를 거덜 내는 도적질을 일삼는 것은 그들의 뿌리가 도적의 뿌리와 같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손가락 바위, 손가락 법문

여객선을 타고 가다보면 소이작도 콩돌 해변의 끝에 서 있는 '손가락 바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먹을 쥐고 검지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든 모습이 마치 거인의 손가락과도 같습니다. 거인은 무슨 까닭으로 내내 손가락 하나만을 들고 있는 것일까요?


▲ "그래 불법이 무엇이냐?" Ⓒ옹진군

구지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입니다. 선사는 누구든 불법에 대해 물으면 한결같이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보일 뿐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사를 시봉하는 동자승은 그 모습을 늘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하루는 구지선사가 출타 중인데 어떤 스님이 법을 물으러 왔습니다. 객승은 동자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사께서는 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습니다. 객승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갔습니다. 구지선사가 돌아오자 동자승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구지선사가 물었습니다.

"그 스님에게 했듯이 나에게도 대답해 보거라.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습니다. 순간 구지선사는 칼을 꺼내 동자승의 손가락을 싹둑 잘라버립니다. 동자승은 비명을 지르며 문 밖으로 뛰쳐나갔지요. 선사가 동자승을 불러 세우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불법이 무엇이냐?"

동자승은 순간적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습니다. 아차! 손가락은 이미 잘리고 없지 않은가? 그 순간 동자승은 퍼뜩 깨쳤습니다. <벽암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동자승은 대체 무엇을 깨쳤던 것일까요. '무아(無我)'를 깨쳤던 것일까요. 나를 내려놓을 때, 나의 주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나는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요.

대이작도, '섬마을 선생님'

대이작도는 이름처럼 큰 섬이 아닙니다. 큰 '대'자가 붙은 것은 소이작도에 비해 크다는 뜻일 뿐, 섬은 면적 2.57㎢, 해안선 둘레 18km의 작은 섬입니다. 대이작도의 선착장에는 '영화의 섬'이라는 빛바랜 글귀가 눈에 띕니다. 대이작도는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선생님>을 영화화한 <섬마을 선생님>(1967년 김기덕 감독 작품)의 배경이 됐던 섬입니다. 나그네는 선착장을 지나 큰말 부근에서 대이작도 부아산에 오릅니다. 해발 159m의 부아산. 산정에는 구름다리도 놓여 있습니다. 정상에 오르니 대이작도 주변의 섬들이 발아랜 듯 가깝습니다. 동쪽은 옹진군의 승봉도, 서북쪽은 자월도, 소야도, 덕적도, 서쪽은 문갑도, 굴업도, 각흘도, 남서쪽은 선갑도, 백아도, 울도. 동남쪽으로는 풍도, 육도, 대란지도 등 충남의 섬들도 지척입니다.

이제는 섬 마을의 많은 학교들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됐던 대이작도의 계남분교도 폐교된 지 오래입니다. 더 이상 순정을 다 바쳐서 총각 선생님을 사랑할 섬 처녀는 없습니다. 처녀들, 총각들, 모든 젊은 사람들이 떠나가 버린 섬마을은 적막합니다. 섬도 늙었고 사람도 늙었습니다. 순정을 빼앗고 훌쩍 떠나버렸던 총각 선생님은 이미 은퇴를 했거나 아니면 교장 선생님이 되어 늙어가고 있겠지요. 그때 그 순정한 처녀는 어디로 갔을까요. 뭍으로 나가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으로 갔겠지요. 더러는 술집으로도 갔겠지요. 그녀도 이제는 늙었거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섬에는 더 이상 청춘도 없고 비애도 없습니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부아산 정상, 정자에 앉아 '섬마을 선생님'을 흥얼거립니다. 구성진 가락에 애틋한 가사. 그 시절뿐일까요. 순정을 다 바친 이들에게 돌아오는 보답이란 기껏 비극적 결말뿐인 것이. 하지만 노래의 힘은 비애를 넘어 섭니다.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풀등, 바다 위의 사막

대이작도의 진짜 보물은 섬 안에 없습니다. 큰 풀안 해변 건너 바다 속에 있습니다. 밀물 때는 몸을 숨겼다 썰물 때면 모습을 보이는 모래섬. 사승봉도에서 자월도 서남단까지 펼쳐진 모래밭을 이곳 사람들은 '풀등'이라 부릅니다. 배를 타고 풀등으로 건너갑니다. 고기잡이가 없는 여름철에는 어선들이 자주 운항하지만 요즈음 같은 봄철에는 풀등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민박집 주인에게 부탁해서 낚시 배를 얻어 탑니다. 10분 남짓 가니 망망하던 바다 위로 장대한 모래섬이 솟아 있습니다. 동서 2.5km, 남북 1km의 모래 평원은 이 나라에서는 진귀한 사막의 풍경입니다.

풀등에 발을 내리자 곱고 부드러운 모래땅이 나그네의 지친 몸을 받아 줍니다. 예전에는 썰물 때면 풀등의 웅덩이에 갇힌 꽃게, 새우, 광어 등을 거저 주어 담을 수 있었다 합니다. 서해 바다에 물고기들이 넘치던 때 이야기입니다. 오늘 풀등은 사막처럼 황량합니다. 겨울 동안 풀등을 떠나 있던 거주자들 대부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수온이 높아지는 5, 6월이면 그들이 다시 몰려 올 것입니다. 그 때는 깊은 바다 속에서 추위를 피하던 골뱅이도 풀등으로 올라와 몸을 숨기고 게들도 무리지어 다닐 것입니다.

풀등 유역 바다의 광대한 모래밭은 옹진군이나 토건업자들이 탐낼 만큼 질이 좋습니다. 토건업자들에게는 건축 자재일 뿐인 모래가 바다생물들에게는 산란과 생존을 위한 생명의 터전입니다. 오랜 세월 이 바다 모래밭에서 나고 자란 갯것들이 섬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20여 년 간 인천 앞바다에서 사라진 모래는 무려 2억㎢에 달합니다. 풀등도 그로부터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50만 평에 달하던 거대한 풀등이 지금은 30여만 평만 남았습니다. 옹진군이 10년 넘게 풀등 인근의 모래 채취를 허가해준 탓입니다.


▲ '바다의 사막' 풀등의 앞날이 위태롭다. Ⓒ섬학교

'생태계 보전 지역' 지정, 그러나 계속되는 탐욕

토건공화국인 이 나라는 농어촌 섬 지역까지도 땅을 파헤치고 모래를 채취하고 산을 뭉개는 기계음으로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국회의원과 지방자치 단체장과 지방의원, 지역 토건업자들은 이 나라 자연을 파괴하는 또다른 주역들입니다. 이들은 지역의 절대 권력자입니다. 지방분권이 과거에는 경제 권력만 쥐고 있던 토호들에게 정치권력까지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많은 토호들이 토건업자들입니다. 이들은 의원이나 단체장이 되면 '바지' 사장을 세워두고 여전히 토건업체를 운영합니다. 세비를 받아가며 지역 주민이 아니라 자기 사업체를 위해 일하는 셈이지요.

인천시의 토호들도 인천 앞바다와 풀등의 모래 유실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정부는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압력에 자극 받아 뒤늦게 풀등의 경관과 생태적 가치를 깨닫고 2004년, 풀등을 '생태계 보전 지역'으로 지정 고시했습니다. 풀등은 생태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 희소성 때문에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도 큽니다. 하지만 정부는 애초에 주민들과 약속한 74㎢가 아니라 55㎢만을 생태계 보전 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모래 채취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자치단체와 지역 토호들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지요. '생태계 보전 지역'에서 제외된 19㎢의 모래밭은 언제든지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바다의 모래 채취가 재개되면 '생태계 보전 지역'으로 지정된 풀등 또한 무사할 수 없습니다. 24시간 바다 속에 유압 호스를 넣어 모래를 빨아들이면 허가 지역뿐만 아니라 물길을 따라 인근의 풀등이나 해수욕장의 모래 또한 유출될 것은 자명합니다. 최근에도 옹진군은 모래 채취 허가를 내주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습니다. 그나마 주민들이 풀등 가치를 깨달아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풀등의 소중함을 알고 함께 지켜냈으면 좋겠습니다.

굴을 깨는 마지막 세대

부아산을 내려와 작은 풀안 해변을 걷습니다. '조금' 때라 물은 조금밖에 빠지지 않았으나 오늘도 할머니들은 굴을 깨러 나옵니다. 할머니 두 분이 조새가 담긴 대바구니를 매고 등에는 배낭을 지고,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모래밭을 걸어 해안가 바위로 갑니다. 바다가 굴을 살리고 굴은 사람을 살립니다. 이 할머니들이 떠나고 나면 누가 굴을 깨러 갈까요. 할머니들은 바다에서 굴을 깰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할머니 한분은 굴 밭으로 가기도 전에 힘에 겨워 주저앉고 맙니다. 대체 몇 십 년을 바닥에 엎드려 굴을 깬 것일까요. 더 이상 펴지지 않는 허리. 할머니의 굽은 등이 굴 깨는 조새처럼 휘어졌습니다. 또 한 분의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해변을 걸어갑니다. 할머니는 팔십은 족히 넘어 보입니다.


"할머니, 굴 깨러 가세요?"
"그래요."
"많이 힘드시죠?."
"힘들지, 힘들어요."
"그럼 좀, 쉬지 않으시구요."
"쉴 수가 있나. 굴이라도 안 깨면 십 원 한 장 안 나오는데. 그걸로 쌀도 사고 그래야 먹고 살지."
"그래 지난 겨울에는 굴 깨서 돈 좀 모으셨어요."
"네 사리나 했어도 100만원도 못 했수."

한 달에 두 사리가 있으니 네 사리면 두 달입니다. 물의 들고 남에 따라 굴을 깨는 시간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합니다. 한 달 내내 굴을 깨도 50만원 수입이 안 되는 것이지요. 노인들은 한철 굴을 깨서 번 수입으로 일 년을 삽니다. 자식들은 다들 뭍으로 나가 다시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제 가족 부양 하느라 노부모 건사할 여력이 없습니다. 이작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섬이 그렇습니다.


6월의 이작도 가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6월의 섬학교 이작도 답사 코스 Ⓒ섬학교

<6월 2일(토) : 이작도 걷기>

07:10 서울 출발(7시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 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09:30 대부도 방아머리 선착장 승선
11:00 대이작도 도착
11:10 제1일 오전 걷기(4.5km)
대이작도선착장→큰마을→회춘골→부아산정상→구름다리→전망대→


장골아래해변→장골
12:30-13:30 점심식사(<풀등팬션>식당에서 한식)
13:30-14:00 숙소 배정(<풀등팬션>)
14:00 제1일 오후 걷기(4km)
장골→장승공원→장골아래해변→송이산정상→목장불해수욕장→덕진말→

돌섬머리→ 큰풀안해수욕장→장대적곶→작은풀안산책로→작은풀안해수욕장
→숙소
16:30 자유시간
18:00 저녁식사 겸 뒤풀이(<작은풀안해변식당>에서 생선회와 매운탕 등)
20:00 휴식 및 취침


<6월3일(일) : '바다의 사막' 풀등 걷기>

06:00 기상, 아침 산책
07:00 아침식사(<풀등팬션>식당에서 한식)
08:00-08:10 풀등으로 이동(배편)
08:10-09:40 풀등 걷기
10:00-11:30 제2일 걷기(2km)
숙소→장골마을→삼신할매약수→큰마을→선착장→식당(<이작횟집>)
11:40 점심식사(<이작횟집>에서 꽃게탕, 회덥밥)
13:00 선착장, 인천행 여객선 승선
14:20 인천연안부두 도착
14:20-15:20 인천종합어시장 탐방
15:30 서울 향발


[학습자료]

[대이작도]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 대이작도. 면적 2.571㎢, 해안선 길이 11.8㎞. 2012년 현재 140세대 283명 인구가 산다. 경기만 다도해 섬 중 하나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45km 지점에 위치한다. 대이작도 서쪽으로 0.2㎞ 거리에 소이작도가 있고, 동북쪽으로는 1㎞ 거리에 승봉도가 있다.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최고봉은 188m의 송이산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으나 고구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에 따라 소속이 바뀌곤 했다. 고려 현종 9년(1018) 수원에 소속됐다가 뒤에 인천에 속하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부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 부천군 영흥면에서 1983년 경기도 옹진군 자월면에 속했고 현재는 인천시 소속이다.

<세종실록> 18년에 이작도가 목장이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1530(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즉도(伊則島)는 독갑도 동쪽에 있으며 주위가 35리이고 목장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양읍지(南陽邑誌)>에는 이작(伊作)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사> '변광수전(邊光秀傳)'에는 고려 말기에 왜구들이 이 섬을 점거하고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약탈하던 근거지라 하여 이적(夷賊) 또는 이적(二賊)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이작도] 면적 1.36㎢, 해안선길이 10km. 2012년 현재 59세대 101명 거주. 인근에 대이작도(大伊作島)·자월도(紫月島)·문갑도(文甲島)·승봉도(昇鳳島) 등이 있다. 섬은 동서로 길고, 네 모서리에 작은 반도가 있다. 섬의 산은 대부분 소나무가 군락지다.

독깨진 곶: 항아리를 싣고 가던 배가 침몰했던 바다 부근 지명. 이작도는 무역선이나 세곡선 등이 지나다니던 해상 교통의 주요항로였다.

물골: 물이 항상 흐르는 골짜기라 붙여진 지명.

대한민국최고령암석: 작은풀안 해변에 있는 암석. 형성된 지 25억년 이상 된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 땅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에 의해 녹을 때 만들어진 혼성암. 한반도 지각 진화사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암석이다.

둘얼래: 물고기가 너무 많아 돌을 던져 잡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

작은풀안, 큰풀안해수욕장: 썰물이면 드러나고 들물 때면 물에 잠기는 이작도 앞바다의 모래 평원인 풀등 안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

장대적곶: 적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방어할 수 있었던 옛 군사기지.

띄넘어 해수욕장: 띠풀이 많이 자라는 언덕 너머에 있어서 생긴 이름. 계남마을에 있다.

계남분교: 가수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선생님을 영화로 만든 영화 '섬마을 선생님'의 촬영지였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다.

마당여: 계남마을 앞바다에 있는 마당처럼 평평한 암초.

송곳뿌리(스황끝뿌리): 승봉도 방향의 이작도 끝부분. 승봉도의 옛 이름이 승황도였던 데서 유래.

목장불해수욕장: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송이산 아래 해수욕장.

송이산: 대이작도의 최고봉(188m). 소사나무 군락지.

장승공원: 장골마을에 주민들이 직접 만든 장승들이 세워진 공원.

삼신할미약수터: 물맛이 뛰어나고 수량도 풍부한 장골마을 약수터. 예부터 정한수로 사용하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마시면 삼신할머니가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전설이 서린 약수다.
부아산: 옛날 이곳이 왕도 터였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

옥중골: 높은 기암괴석으로 둘러 쌓인 골짜기가 마치 감옥을 연상시킨다 해서 붙여진 이름.

회춘골: 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깨끗한 곳. 이곳에 있으면 회춘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 온다.

이별 모퉁이: 이 모퉁이를 돌면 큰 마을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초상을 치를 때면 상여를 세우고 망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댓골부리: 옛날 장가를 든 이작도 신랑은 신부를 데려올 때면 항상 댓골부리로 들어오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돌성머리: 옛날 김검두라는 사람이 계남리 주민에게 밥을 달라했다가 거절당하자 홧김에 계남리로 통하는 길목에 돌성을 쌓아 막아버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무모한 짓을 하면 김검두 돌성 쌓듯 한다는 말이 생겼다.

마성(말목장터): 옛날 국영목장 터. 성 건너 성안으로 불렸으며 1m 높이의 돌담으로 울타리를 쌓았었다 한다.

교장 | 강제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일부 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스틱, 물통, 윈드자켓, 우비(+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학교 제4강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강의비,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21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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