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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봄날, 신선과 노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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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의 봄날, 신선과 노닐다"

[알림]4월의 섬학교 <선유도> 참가 안내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의 제2강, 4월 답사는 <신선의 섬, 선유도(仙遊島)>입니다. 4월 7일(토)과 8일(일)의 1박2일로, 서해의 비경 선유도를 찾아갑니다.

지난 3월 개교한 <섬학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들을 걸으며 사유하고, 소통하며 배우는 학교입니다. 섬학교의 섬 여행은 다리나 제방 등으로 육지와 연결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 위에 있는 섬들만을 답사합니다. 크든 작든 섬에서의 이동 수단은 가급적 두 발에 의존합니다. 섬 여행은 가급적 월 1회 떠나며, 작은 섬은 걸어서 일주, 큰 섬의 경우 섬의 가장 걷기 좋은 길 걷기를 기본으로 합니다.

섬에 남아있는 문화유적, 유배지, 당산, 어부림, 마을 숲, 당집, 사찰, 설화의 무대 등도 답사합니다. 해상 경관이 좋은 섬은 어선을 이용해 해상 일주도 하며, 마을 안길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또 답사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섬과 소통합니다. 섬의 토속 음식 맛보기, 섬 노인들로부터 특산물 구매하기 등으로 섬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오도록 합니다.

▲ 섬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 사라져가는 신선의 섬으로 갈 시간입니다.ⓒ섬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선유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섬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지나간 100년 동안 군산 연안에서만 모두 12개의 섬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1880년대 71개였던 군산 연안의 섬이 현재는 59개에 불과합니다. 섬을 없애버린 것은 인간의 탐욕입니다. 1890년대 초반 선혜청 당상관 이완용에 의해 만경강 인근 바다에서 간척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군산 앞바다에서만 5차례의 대규모 간척이 있었습니다.

새만금 지역 간척의 시작이 외세를 등에 업은 매국노의 손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오식도, 내초도, 입이도, 무의인도, 가내도, 조도, 비응도, 장산도 등 앞선 네 번의 간척으로 사라진 섬들은 대부분 섬의 존재를 증거할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습니다. 새만금 간척은 4대강 사업과 함께 국토에 자행된 단군 이래 최대 재앙입니다. 새만금 간척으로 4만ha의 갯벌과 함께 아주 사라져버린 섬은 야미도와 신시도, 북가력도와 남가력도 등입니다.


심산유곡과 더불어 유토피아의 한 원천이었던 섬. 이제 더 이상 섬도 꿈꾸던 섬은 아닙니다. 개발의 탐욕으로 섬은 상처를 입고 섬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육지 사람들의 위락 시설로 바뀌어 갑니다. 섬을 잃는 것은 이상향을 잃는 일입니다.

새만금 갯벌이 죽은 뒤 고군산(古群山) 군도(群島)의 많은 섬들도 고난에 직면해 있습니다. 삶의 터전이던 바다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먹는 해산물들의 3분의 2 이상이 갯벌이나 염습지에서 생의 일부를 보냅니다. 갯벌이 사라졌으니 어장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농경지에 비해 100배 이상 생산성이 높은 갯벌을 없애고 간척을 한 어리석음의 결과입니다.

새만금 간척은 이제 이들 갯벌뿐만 아니라 더 많은 섬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신선이 노닐던 천혜의 비경 선유도(仙遊島)와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 등 고군산군도의 섬들도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이들 섬은 지금 새만금 방조제로 연결되어 육지가 된 신시도와 다리공사가 한창입니다. 육지와 연결되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육지의 일부일 뿐입니다.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 면적 2.13㎢의 크지 않은 섬 선유도는 오랜 세월 신선이 노닐다 갈 만큼 선경이었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지금은 그 경관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선유도는 여전히 서해의 보석입니다.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고군산군도의 중심 섬, 선유도는 선유도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군산 또한 군산이 아니었습니다.


선유도가 군산(群山)이었습니다. 선유도의 본 이름이 군산도였습니다. 군산이란 바다 한 가운데 산들이 무리지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조선 태조 때 군산도에 수군진이 설치됐는데 세종 때 지금의 군산 땅, 옥구군 북면 진포로 수군진을 옮기면서 진의 이름도 함께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진포는 군산포진이 되었고 이름을 빼앗긴 군산도는 고(故)군산도가 되었다가 마침내 선유도가 된 것입니다.


▲ 선유도에서 가장 먼저 다가서는 것은 망주봉입니다. ⓒ섬학교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에서 군산도가 옛적부터 산들이 많고 부유한 섬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군산도는 전라도 만경바다 복판에 있으며 역시 첨사가 통할하는 진영이 설치되어 있다. 온통 돌산이고 뭇 봉우리가 뒤를 막았으며 좌우를 빙 둘러 앉았다. 그 복판은 두 갈래진 항구로 되어 있어 배를 감출만 하고 앞은 어장이어서 매년 봄여름에 고기잡이철이 되면 각 고을 장삿배가 구름처럼 안개처럼 몰려들어 바다 위에서 사고판다. 주민은 이것으로 부유하게 되어 집과 의식을 다투어 꾸미는데 그 사치한 것이 육지 백성보다 심하다."

<택리지>에서 첨사가 통할하는 진영이 설치됐다고 한 것은 군산진이 옮겨간 뒤 고군산도(선유도)에 다시 수군진영이 설치됐기 때문입니다. 선유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와 송나라 간 무역로의 중간 기항지였으며 최무선 장군이 왜구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진포해전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명량해전을 치른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전열을 가다듬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찾아들었던 곳입니다.

선유도는 본래 3개의 다른 섬이었으나 중앙에 긴 모래톱이 쌓이면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습니다. 선유도에는 여러 산이 있지만 다들 200m가 못되는 낮은 산들입니다. 선유도의 주산 망주봉(152m)에는 선유도의 신전인 오룡묘가 있어 신성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방파제 공사로 많은 모래가 유실되었으나 선유팔경의 하나인 명사십리 해변에서 보는 일몰도 여전히 장관입니다. 선유 2구와 3구 사이, 기러기가 내려앉은 모양의 모래톱 평사낙안(平沙落雁)의 풍경 또한 비경입니다.

선유도는 바로 곁의 섬, 장자도, 무녀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장자도는 또 대장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4개의 섬은 이미 하나의 생활권, 하나의 섬입니다. 선유도에 가면 4개의 섬 모두를 걸어볼 수 있습니다. 섬들이 작으니 하루면 4개의 섬 모두를 걷기에 충분합니다. 길이 평탄하여 자전거를 타기도 좋습니다. 자전거로 섬들을 돌면 몇 시간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 선유도 사람들은 어업보다 관광업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횟집과 민박, 낚시배 운영이 주된 수입원입니다. 제주 마라도처럼 선유도 선착장에는 임대용 골프카트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모두 불법이지만 단속의 근거가 없다고 군산시에서도 손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고즈넉한 섬의 평화를 깨며 달리는 골프카트가 볼썽사납지만 주민들의 생계수단이기도 하니 무작정 비난할 수만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장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무엇이 선유도의 장래를 위해 좋은 길인지 주민들이 깊이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구릉이 많지 않은 선유도는 섬 전체가 그 자체로 걷기 좋은 길입니다. 어느 길에서나 바다 풍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탈 것을 물리치고 두발만으로 섬을 향유할 수 있게 한다면 선유도는 분명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섬이 되고 더 많은 여행객이 찾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그네는 곧 육지와 연결될 선유도의 앞날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때는 걷기는 물론 카트마저도 다니기 쉽지 않을 테지요. 육지에서 몰려와 쌩쌩 내달리는 자동차들로 도로는 가득차고 관광객들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쓰레기만 남긴 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말 것입니다. 다리가 놓여지더라도 외부의 차량 진입을 금지하고 선유도의 정체성이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선유도가 육지로 편입될 날이 가까워옵니다. 머지않아 육지로 이어지는 다리가 완공되면 선유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결코 선유도라는 '섬'에 다시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선유도라는 '섬'에 갈 수 있는 마지막 시간들입니다.
▲ 선유도 걷기 코스 ⓒ섬학교

섬학교 제2강 선유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4월 7일(토)>

07:00 서울 출발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0:00 군산 도착, '군산의 전망대' 월명공원 산책
11:00-12:00 점심식사
(군산 <금강식당>에서 꽃게 간장게장백반)
12:00-12:30 새만금 방조제를 따라 신시도항으로 이동
12:00 신시도항 출항
12:20 무녀도 1구(선유대교 아래) 도착
12:30 첫째날 섬 걷기
(12km)
무녀도 선유대교 아래 → 무녀도 모감주나무 군락지 → 무녀2구 → 무녀염전 길 → 무녀1구 → 선유대교 → 선유1구 → 옥돌해수욕장 → 선유2구 → 초분공원 → 장자대교 → 낙조대 → 장자도 포구 → 대장교 → 장자할매바위 → 대장도 숙소
16:00 숙소 도착 및 자유시간(바위섬펜션 : 방안에서 바다의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
18:00 저녁식사 겸 뒤풀이(<바위섬펜션> 식당에서 자연산 생선회와 매운탕을 곁들인 저녁식사)
19:30 취침

<4월 8일(일)>

06:00 기상, 아침산책
07:00 아침식사
(<바위섬펜션> 식당에서 해장국백반)
08:00 둘째날 섬 걷기(7km)
대장도 숙소 출발 → 대장교 → 장자대교 → 명사십리 → 전월리 → 몽돌해수욕장 → 남악산(155m) → 선유3구 → 신기리 → 망주봉 오룡묘 → 선유2구 → 선착장
11:30 선유도 출발
13:00 군산 도착
13:00-14:00 점심식사
(군산 <신풍옥>에서 한정식)
14:00 서울 향발

<학습자료>

[선유도(仙遊島)란 지명의 유래] 선유도 안내책자들은 섬의 북단 선유봉(111m) 정상의 형태가 마치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선유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유래는 그다지 근거 있어 보이지 않는다. 대개의 섬 이름들이 그렇듯이 선유도가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선유도란 이름을 얻게 됐는지는 불분명하다. 필자가 추론하기에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조선시대 말까지도 선유도란 이름을 쓰지 않았던 듯하다. 군산포진이 지금의 군산으로 옮겨간 뒤에도 선유도는 오랫동안 군산도나 고군산도로 불리었다. 조선 중후기 실학자 이중환 (1690년-1752)의 <택리지>에도 선유도는 군산도란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선유도란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군산도와 고군산도란 이름으로만 10여 차례 등장한다. 이중 태종, 세종, 성종, 명종, 광해군, 인조 실록에는 모두 군산도로 등장하고 고종 때만 딱 한번 고군산도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선유도란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고종 이후가 될 것이다. 물론 민간에서는 선유도란 이름이 그 전부터 쓰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필자는 아직 그것을 확인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선유팔경(仙遊八景)] 옛날부터 각 지방의 빼어난 경관들은 무슨무슨 팔경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즈음은 부쩍 그 숫자가 더 늘었다. 어느 지역엘 가나 팔경이 있다. 더러 십경이나 십이경도 있지만 대다수는 팔경이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방책일 것이다. 선유도에도 팔경이 있다. 물론 선유팔경의 역사는 생각 없이 급조된 팔경들보다 역사가 깊다. 그런데 어째서 팔경일까. 한번쯤 궁금증을 가져 보았을 것이다. 선유팔경이나 대한팔경, 관동팔경, 단양팔경 같은 팔경의 원조는 중국의 샤오상팔경(瀟湘八景)이다. 하필 팔경인 것은 주역의 8괘와 연관이 있다. 춘하추동 4계절에 명승지를 음양으로 두 개씩 배정해서 팔경으로 정한 것이다. 샤오상(소상, 瀟湘)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 양자강의 두 물줄기,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를 말한다. 소상의 아름다운 풍경은 당나라 때 시인 두보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노래해 왔다. 소상팔경의 전통이 하나의 미학으로 확립된 것은 북송 때 화가들이 소상팔경도를 그리면서부터라고 한다. 이후 동북아에서 소상팔경은 관념산수시대 최고의 미학이 됐다. 선유팔경의 평사낙안은 소상팔경에도 포함된 풍경이고 삼도귀범은 소상팔경의 원포귀범을 모방한 것으로 보여진다. 선유팔경은 망주폭포(望主瀑布), 명사십리(明沙十里), 평사낙안(平沙落雁), 삼도귀범(三島歸帆), 장자어화(壯子漁火),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 월영단풍(月影丹楓), 선유낙조(仙遊落照)이다. 장자도 앞바다에서 불야성을 이루던 어선들이 사라졌으니 장자어화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풍경이다.
▲ 구릉이 많지 않은 선유도는 섬 전체가 걷기 좋은 길입니다.ⓒ섬학교


[망주봉(望主峰] 152m. 선유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이 망주봉이다. 단단한 바위산의 에너지가 강렬하게 전달된다. 주인을 기다리는 봉우리, 선유도의 주산 망주봉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버전의 전설이 내려온다. 하나는 충신 버전이다. 선유도에 유배된 관리가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북쪽의 한양에 있는 왕을 사모하였다 해서 망주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 하나는 번외 버전이다. 이 버전은 <정감록>에 젖줄을 대고 있다. <정감록>은 조선이 멸망한 뒤 정도령이 계룡산에 도읍하여 몇 백 년을 다스리고 그 후 조씨의 가야산 도읍 몇 백 년이 계속된 뒤 범씨의 완산 도읍이 시작된다고 예언한다. 선유도 망주봉은 범씨 완산 도읍 천년왕국의 섬나라 버전이다. 그 천년왕국의 주인 범씨 왕을 기다리는 산이 망주봉이다. 필자는 두 번째 버전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믿는다. 과거에 섬은 자주 착취와 수탈이 없는 이상향으로 꿈꾸어지곤 했다. 진정한 백성의 나라를 기다리는 민중들의 열망이 망주봉의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을까.

[평사낙안(平沙落雁)] 망주봉 아래 바다에 형성된 모래톱이 망주봉에서 바라보면 모래사장으로 날아드는 한 마리 기러기 형상 같다 해서 평사낙안이라 했다. 선유도나 중국의 샤오상 강뿐만 아니라 충북 진천군 평산리에도 평사낙안이 있고 하동군 평사리는 지형이 샤오상 팔경의 평사낙안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명사십리(明沙十里)] 전국에 명사십리란 이름의 해변은 의외로 많다. 선유 2구와 선유 3구를 이어주는 모래해변도 사람들은 명사십리라 부른다. 백사장 길이는 5리도 못돼는 1.5km에 불과하니 지명은 비유적이다. 옛날에는 선유 2구와 3구가 서로 다른 섬이었다. 오랜 세월 모래가 쌓여 두 섬은 하나로 이어졌다. 전에는 이 모래 톱 위에 도로가 없었다. 모래톱에 해안도로가 생긴 뒤 그 길로 자동차와 사발이와 오토바이와 전동카트가 쌩쌩 달린다. 하지만 찻길의 편리함을 얻은 대신 명사십리 해변은 '명사'를 잃어가고 있다. 모래사장은 바닥을 드러내 군데군데 자갈밭이다. 해안 도로를 내면서 만든 시멘트 옹벽 탓에 더 이상 모래가 쌓이지 않고 유출되는 까닭이다. 사람 사는 곳에 도로를 만드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관광수입으로 먹고 사는 해수욕장에 도로를 낸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여름 피서철에는 인천 등지에서 모래를 사다가 뿌리는 일이 해마다 반복된다고 한다. 그래야 해수욕장이 유지된다. 그나마 남아 있는 모래밭도 갯벌화가 진행 중이니 지속적으로 모래를 보충하지 않으면 명사십리 해변은 머잖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 모른다.

[망주폭포(望主瀑布)] 여름 우기에만 생기는 폭포. 여름철 큰비가 내리면 망주봉에서 7∼8개의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폭포를 이룬다.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 선유도 안내 팜플렛은 무산십이봉(舞山十二峰)을 방축도, 명도, 말도 등 고군산 섬들의 산봉우리 12개가 마치 투구를 쓴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병사 혹은 무사 모양 같아서 무산이라고 했다면서 무(武)가 아니라 춤출 무(舞)를 쓰는 것은 모순이다. 설명은 견강부회 같다. 실상 무산십이봉은 신선 사상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동양에서 신선정원(神仙庭園)을 만들 때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은 그 골격이 되는 산이다. 본래 무산(巫山)은 중국 쓰촨성(四川省) 우산현(巫山縣)의 남동쪽 바산산맥(巴山山脈) 속의 아름다운 봉우리 이름이다. 그런데 그 형세(形勢)가 무자(巫字)와 같다 해서 무산이라 일컫는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첩첩으로 하늘을 가리고 큰 강이 그 사이를 흘러 무협(巫峽)을 이루며, 12개의 봉우리 밑에 신녀묘(神女廟)가 있다고 믿어진다. 동양의 정원에서 산이나 연못의 섬 등으로 사용하는 석가산(石假山)은 이 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선유도의 이름이 그렇듯이 무산십이봉 또한 신선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삼도귀범(三島歸帆)] 무녀도에 속한 세 무인도가 선유도 앞마을을 돌아서는 어귀에 서있다. 이 섬들의 모습이 마치 돛단배 3척이 만선이 되어 깃발을 휘날리며 돌아오는 것 같다 해서 삼도귀범이라 이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또한 샤오상팔경 중 원포귀범의 모방으로 보여진다.
▲ 섬을 잃는 것은 이상향을 잃는 일입니다.ⓒ섬학교

[오룡묘(五龍墓)] 선유 3구 밭 너머 마을에서 망주봉을 돌아가면 새터마을이다. 새터마을에서 올라가는 망주봉 길 중턱에 오룡묘가 있다. 오룡묘는 오랜 세월 선유도 주민들의 신전이었다. 예전에는 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숲이 울창해져 길마저 사라지고 없다. 바위에 매달린 밧줄을 잡고 암벽등반을 한 뒤에야 간신히 오룡묘에 이를 수 있다. 오룡묘는 1990년, 마지막 무당이 죽은 뒤부터 오랫동안 돌보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오룡묘 당집을 비롯한 선유도의 전통 신앙은 이 섬에 유입된 기독교의 탄압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오룡묘에는 아직도 두 개의 당집 건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아랫당에 봉안되었던 오구유왕, 명두 아가씨, 최씨 부인, 수문장, 성주 등 다섯 토착신의 화상은 도난당하고 없다. 당에는 근자에도 공을 드리고 간 흔적이 남아 있다. 규모가 작은 윗당은 임씨 할머니 당이다. 윗당에 모시던 산신과, 칠성님, 임씨 할머니 세분의 화상도 도난 당한지 오래다. 윗당은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마루는 뜯겨져 아주 폐허가 되고 말았다. 허물어져 가는 당집은 노거수 그늘에 파묻혀 소멸의 시간을 기다린다. 가여운 신들. 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섬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살아온 토착 신들. 당집은 오랜 세월 섬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풍어를 이루도록 도와준 신들을 모시던 신전이다. 지금 당집에 살던 신들은 외래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쫓겨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신들이야말로 섬사람들의 현세 삶에 이로움을 주던 신들이 아닌가. 이미 간곳 모를 신들을 다시 모셔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그러나 신들이 살던 집을 신들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만드는 일이야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섬사람들은 더 이상 조상의 신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장자도(壯子島)] 선유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면적 0.13㎢, 해안선 1.9km. 힘이 센 장사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어 장자섬이라 했다 한다. 어선들이 조업 중 폭풍을 만났을 때 피신하는 대피항으로 유명하다.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섬이었다고 한다. 장자도 주변 해역은 이웃의 위도 해역과 같은 조기어장으로 조기잡이 철이면 불야성을 이루었고 거기서 선유팔경 중 하나였던 장자어화(壯子漁花)의 풍경도 유래됐다.

[대장도(大長島)] 장자도와 다리로 연결되어있으니 선유도와도 하나의 섬이다. 면적 0.337㎢, 해안선 2.7km. 섬의 주산 대장봉(142m)이 곧 섬이다. 평지는 극히 적다. 대장봉 아래 8m 높이의 장자할매바위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그 옛날 아내는 과거 보러간 서방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과거에는 합격도 못한 서방이 첩을 데리고 오는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 그대로 굳어져 바위가 됐다는 전설이다. 그 시절 흔했을 법한 이야기다. 그 후 바위가 된 아내는 섬의 수호신이 됐다. 고군산열도 주민들은 장자할머니에게 만선의 꿈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다. 지금도 바위에는 금줄이 둘러져 있다.

[무녀도(巫女島)] 선유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새만금으로 육지가 된 신시도와 다리공사가 한창이다. 면적은 선유도보다 약간 작은 1.75㎢. 고려 말경 이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장구 모양의 섬과 그 옆에 술잔처럼 생긴 섬 하나가 붙어 있어 무당이 상을 차려놓고 춤을 추는 모양이라고 하여 무녀도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또한 억지춘양 격 해석이지 싶다. 그토록 복잡한 상상력으로 지어진 지명은 거의 없다. 게다가 기생이면 모를까 무녀가 장구를 칠 까닭도 없다. 선유도와 무산십이봉이란 이름에서 보듯 무녀도란 이름 또한 신선사상과 관련이 있지 싶다. 서남쪽에 무녀봉(131m)이 솟아 있을 뿐 대부분이 평지다. 무녀도에도 오래된 간척지가 있다. 간척 된 땅은 논이나 밭으로 경작되지 않고 온통 갈대밭이다. 일부는 염전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염전도 문을 닫았다.

[초분(草墳)] 고군산군도의 섬들은 근래까지도 초분의 풍습이 남아 있었다. 초분은 풍장(風葬), 바람이 지내는 장례다. 풍장은 땅위에 초가집처럼 생긴 묘를 만들어 시신을 안치했다가 살이 풍화되고 나면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2중 장례 풍습이다. 뭍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특수성 때문이다. 섬들에서 초분을 쓰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대부분 금기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물론 소나 개의 산달에 초상집을 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필자의 고향 섬 보길도에서는 집안의 큰 행사가 있는 해에 초상이 나면 초분을 썼다. 자녀의 결혼식 날짜를 받아놨는데 초상이 나는 경우가 그런 때다. 자식이 군대에 가 있을 때 초상이 나도 초분을 썼다. 청산도의 경우에는 주로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지금도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하는 것이다. 정식 장례는 매장 때 다시 치른다. 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을 기다린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초분의 주인은 십 몇 년씩이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필자는 몇 해 전 무녀도에 마지막 남았다는 초분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고군산군도의 초분이 다 사라진 뒤에도 마지막까지 초분이 한기가 남았던 것은 그 집안의 끊이지 않는 우환 때문이었다고 했다. 40여 년 전에 매장을 했으나 연달아 일어나는 집안의 우환이 매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 다시 시신을 수습해 초분을 쓴 것이라 했다. 하지만 필자는 끝내 그 마지막 초분을 만나지 못했다. 산을 내려가 근처 가게 주인에게 물으니 그해 봄, 초분 있던 자리에 매장을 하고 묘를 썼다 했다. 그 집안에 일어나던 액운은 모두 물러간 것이었을까 아직도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다.

[김 양식] 김 하면 완도 등지의 남해안만을 떠올리지만 서해 바다에도 김양식장이 많다. 김 또한 고군산군도의 특산물 중 하나다. 선유도 등 고군산군도 섬들은 김 양식으로 호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김 양식 기술을 퍼뜨린 것은 완도 지방에서 이주해온 어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 같지 않다. 새만금 방조제를 막고 난 뒤에는 김 양식에도 피해가 크다. 김은 차가운 물에서 잘 자라는 한대성 해초다. 수온이 지나치게 높으면 아주 녹아 없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새만금 방조제가 생기면서 조수의 흐름이 멈추자 수온이 높아져 김의 수확이 대폭 줄었다. 그래도 김 양식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고기마저 잡히지 않는 바다에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사먹는 김 한 장에도 어민들의 수많은 땀방울이 스며있다. 김 양식은 참으로 고된 노동이다. 손이 많이 간다. 먼저 조개나 굴 껍질 등에 김 포자 액을 뿌린 뒤 김 양식장의 그물에 매달아 놓는다. 보름 정도 지나면 거기서 나온 김 싹이 그물에 붙는다. 다시 열흘이 흐르면 그물 전체로 김들이 퍼져 나간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란 어린 김을 떼어내서 밧줄에 하나 씩 옮겨 붙인 뒤 바닷물 속에서 키운다. 벼를 파종하여 모내기 하는 것과 같다. 모내기 뒤 보름에서 이십일이 지나면 첫 수확이 가능하다. 첫 번째 수확된 김은 너무 물러서 질이 떨어진다. 서너 번째 수확한 김의 품질이 그중 좋다. 겨울에 평균 여섯 번 정도 수확한다.

교장 | 강제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일부 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스틱, 물통, 윈드자켓, 우비(+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지참하세요.

<사라져가는 신선의 섬, 선유도>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강의비,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23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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