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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 가득...백두대간은 옛 이야기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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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봄기운 가득...백두대간은 옛 이야기 들려줄까"

[알림]<백두대간12걸작선2> 3월 산행은 <고남산 구간>

백두대간학교(교장 최창남)의 <백두대간12걸작선2> 다섯 번째 산행(제17강)은 3월 24일(토), <고남산 구간>입니다. 주제는 <봄이 오는 백두대간과 마을>. 전북 남원시 여원재에서 산으로 들어선 후 장치를 지나 합민성을 둘러 본 후 고남산에 오르며 통안재와 매요마을을 지나 유치재에서 산행을 마칩니다.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 전문가이며 작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인문학적 산행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했습니다.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등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등 민중가요들을 작곡하였습니다.

[산행지 안내]

산에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늘 이야기도 있고, 사람 사는 이야기도 깃들어 있습니다. 산은 이 땅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사람의 뜻대로 함부로 할 수 없는 신성하고 거룩한 공간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이야기들이 생겨난 것이고,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들은 산으로부터 모든 것을 빌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야기도 깃들게 된 것입니다.

하늘 이야기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따로 따로 전승되어 제각기 다른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구분할 수 있다면 하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하늘의 뜻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을 뿐입니다. 하늘의 뜻에 맞게 살아온 아무개 이야기나 하늘의 뜻에 어긋난 어떤 삶의 원리나 마을이나 나라와 같은 집단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이야기가 하늘의 뜻에 기초한 하나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애초에 하늘과 사람의 이야기는 하나였습니다.

단군신화가 그 좋은 예입니다.
단군의 아버지는 환웅입니다. 환웅은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에서 태백산으로 내려옵니다. 강원도의 태백산은 아닙니다. 백두산이라는 말도 전해지고 묘향산이라는 말도 전해집니다. 어느 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태백산이 어느 산인지 아는 것도 의미있습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늘의 아들인 환웅과 땅(자연)의 딸인 웅녀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음으로써 사람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단군입니다. 하늘이 아버지이고 땅이 어머니라는 천부지모(天父地母) 사상은 우리 민족의 뿌리가 되는 가치관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생겨나고 이루어진 곳의 무대는 물론 산이었습니다. 그러니 산에 하늘의 이야기와 사람의 이야기가 깃들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는 백두대간은 그 높고 큰 산줄기로서 자연스럽게 마을과 마을, 나라와 나라를 나누는 지리적 경계가 되었기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많은 높은 봉우리와 크고 작은 고개들마다 사람들의 기쁘고 슬픈 사연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야기들 또한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잊거나 잃어버린 이야기들입니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놓인 사람들 이야기이고 역사 이야기입니다.

봄이 오는 3월, 전라북도 남원시 여원재에서 발걸음을 떼는 이번 백두대간 산행은 봄바람 사이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나누는 산행이 될 것입니다.

▲ 고남산은 지리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산이다. Ⓒ백두대간학교

남원시 운봉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인 여원재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성계가 황산에서 승승장구하던 왜장 아지발도를 대파할 때 승리의 전략을 알려주었다는 한 여인의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여원재에서 주막을 하고 살던 이 여인은 왜구의 침탈을 받았습니다. 왜구의 손길이 자신의 왼쪽 가슴에 닿자 그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이 여인의 원혼이 이성계에게 나타나 승리의 전략을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흥부 이야기도 이 고개에 깃들어 있습니다.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에 살고 있던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던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가 바로 이 고개입니다. 그런 이유로 여원재의 다른 이름은 연재입니다. 제비고개인 셈이지요.

또 다른 가슴 아픈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1894년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이야기입니다. 농민군의 옷이 모두 희고 무기는 죽창이어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고 했던 김개남이 이끌던 농민군들은 공주회전에 참여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으려고 하였지만 방아치와 관음치 전투에서 모두 패해 넘지 못한 한이 남아 있는 고개이기도 합니다. 이 고개를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농민군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까요? 김개남이 이끌던 농민군들이 고개를 넘었다면 상황이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 저려지는 고개입니다.

여원재는 길도 넓지 않은 작은 고개입니다. 어찌 보면 볼품없어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담았을 것 같지 않은 고개입니다.

그 여원재에서 봄기운 움트는 산길로 접어들면 옛날에는 노루골이라고 불렸던 장치(방아치)입니다. 김개남의 농민군이 패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장치를 지나면 바로 동학농민혁명 때 운봉 민보군의 거점이었던 합민성입니다. 쌀을 저장해 두었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지금은 무너져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성입니다. 농민군의 생명을 지키고 그들의 뜻을 상징하던 성을 쌓았던 돌들은 그 의미와 역사를 잃고 그저 돌계단으로 놓여 있을 뿐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합민성을 지나 고남산 가는 길에 예전에는 관음치라고 불리던 까막재가 있습니다. 역시 김개남이 이끌던 농민군이 관군에게 패했던 곳이지요. 발걸음 닿는 곳마다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이번 걸음으로 다 들을 수 있을까요?

관음치를 지나면 곧 고남산(846.4m)입니다. 고남산은 전체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산입니다. 반야봉과 만복대, 정령치, 고리봉 등이 다 보입니다. 고남산은 사방으로 조망이 좋은 산입니다. 시야에 가리는 것이 없습니다. 북동쪽을 살피면 봉화산, 백운산, 덕유산 자락이 펼쳐지고, 서편으로는 정읍 내장산과 광주의 무등산이 날씨 따라 드문드문합니다. 고남산은 전후좌우를 조망할 수 있는 홀로 우뚝 솟은 범상치 않은 산세를 지닌 산이었기 때문에 조선 개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남아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성계가 이 산에 제단을 쌓고 큰 제를 지낸 후 왕위에 등극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남산을 내려와 봄기운 넘실대는 통안재를 지나면 백두대간 지나는 몇 안 되는 마을인 매요마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고승 유정대사가 이 마을에 들렀다가 매화 가득한 것을 보고 "매화는 눈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피는 꽃이며 향기가 순결하니 이 마을 사람들은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니 매요리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이 마을은 매요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매요마을은 올망졸망하게 느껴지는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지나면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이지요. 매요마을을 지나면 버드나무 고개라고도 불리는 산행의 마지막 지점인 유치재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옵니다. 하늘과 땅, 대기와 지면의 온도가 같아지면서 언 땅이 녹고 물이 흐리기 시작합니다. 나무뿌리들은 지면으로부터 물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새싹이 움틉니다. 새 생명 움트는 봄이 오는 것입니다.

새 생명 움트듯이 봄 오는 산길에서 잊혔던 이야기들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그 이야기들 다시 봄과 함께 살아나 수런수런 옛 이야기들을 들려줄까요? 그 이야기들 들으러 그 산길 걸어보려 합니다.

▶구간소개

-산행코스 : 여원재-장치-합민성-고남산-통안재-573.2봉-매요마을-유치재
-산행거리 : 약 11km
-소요시간 : 약 7시간(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난 이 도 : 하(★)

▲ <고남산 구간> 산행도Ⓒ백두대간학교


[산행계획]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 두 분이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산악가이드 이철승 선생님은 백두대간 종주 등 산행경력 30년의 공인 등산안내인이고, 엄재용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3회 종주한 공인 등산안내인입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4152-1055입니다.

01: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01:30 사당역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1:40 양재역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2:00 경부고속도로(하행) 죽전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5:30 인월 지리산기사님식당(전북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 221-8/063-636-2329) 도착
아침식사 및 도시락 싸기, 아침 메뉴는 시원한 해장국
06:20 산행 안내 및 등반 교육
07:00 여원재에서 산행 시작, 소나무 숲으로
08:00 561.8봉
08:10 장치
08:30 합민성 - 대간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으나 합민성에 다녀온다.
10:20 고남산
10:40 통안재 - 고목나무 부근에서 점심식사
11:40 704봉
12:30 573.2봉
13:40 매요리 - 매요리휴게소에서 막걸리 한 잔
14:00 유치재 - 산행 마감 - 스트레칭
14:20 청솔회관(전북 남원시 인월면 상우리 386-2/063-636-2489) 도착
지리산 산채비빔밥, 직접 만든 손두부와 막걸리로 뒤풀이
16:00 서울로 출발
19:0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 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렌턴, 스패츠, 아이젠, 얼굴가리개, 그리고 반드시 빈 도시락과 수저를 가져오세요.

[산행자료]

[여원재] 남원시 운봉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일명 연재라고도 한다. 고개 서편으로 평원을 이룬 구릉이 운봉면이다. 섬진강 상류가 되고 섬진지류는 남원 시가지를 거처 광양만으로 빠진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왜구의 손길이 거쳐 간 자신의 왼쪽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는 이 고갯마루 주막여인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자결한 이 여인의 원혼은,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가 운봉과 함양 등지에서 노략질 중이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운봉읍 한복판의 황산으로 진군할 때 백발의 노파로 나타나 승전의 전략을 일러주었다 한다. 왜장 아지발도를 무너뜨린 이성계가 돌아가는 길에 여원(女院)이란 사당을 지어놓아 이 고개 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는 것.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며 연재라고 부른다.
여원재 남원쪽 고갯마루의 암벽에는 왼쪽 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있다고 하는데, 전설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학과 남원>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1894년 농민들이 활화(活火)하였던 동학농민혁명의 한 축은 김개남이라는 농민군 지도자가 맡고 있었다. 김개남은 그해 6월 하순에 남원시내 서쪽의 교룡산성에 입성하여, 또 다른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군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9월 말 동학농민군 2차 거병 때 전봉준의 동시 출병요구를 거부하였다가, 10월 말에 이르러서야 공주회전(公州會戰)을 위해 남원을 떠났으니, 그 사이 약 4개월간 영남지역으로의 세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이 여원재를 넘지 못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농민군은 진주와 함양 등에서 원병을 받아 군세를 늘린 민보군(民保軍)과 이 여원재 인근 방아치와 관음치에서 두 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모두 지고 말았다. 일어서면 온통 농민군의 흰옷이어서 '서면 백산', 앉으면 농민군의 죽창만 보여 '앉으면 죽산'이라 했던, 1894 갑오년 3월 부안군 백산결집에서 보았던 그 농민군의 기세를 너무 과신했는지도 모른다. 김개남이 지휘하는 동민농학군 1만명이 외눈박이 박문달이 지휘하는 관군의 습격을 받아 농민군이 패퇴한 곳이기도 하다.

<남원의 환경와 역사>
전북 동남부에 위치,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할 뿐 아니라 수리시설이 잘 되어 농업이 발달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수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어 관광도시로 각광을 받는다. 지리산의 서북 관문인 남원은 예로부터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라 했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 중에 전라도 남원은 벼 한 말을 심으면 140말을 추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전라감사를 지낸 김달순은 '기상풍영(沂上諷詠) 융중산수(隆中山水)'라 하여 '남원의 산천경계는 중국의 기수(沂水)와 같이 아름답고 사람들은 제갈공명이 때를 기다린 곳과 같다'고 극찬하였다.
마한의 54국 중 고렵국과 불운국이 남원 땅을 발판으로 삼았다. 신라 때 소경을 설치하면서 남원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남원부, 조선시대에서는 남원도호부와 남원관찰부를 설치하였다. 1981년 시로 승격되었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유명한 광한루와 오작교, 실상사가 있다. 황산대첩비와 남원성터, 교룡산성, 용담석탑, 원천폭포 등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
부패한 관아에 항거한 춘향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춘향제를 매년 5월5일부터 열린다. 1931년 춘향사당을 건립하고 제사를 지낸 것이 춘향제의 시초였는데 전국 10대관광문화축제로 선정될 만큼 남원의 문화를 대표하는 향토축제로 자리잡았다.
또한 흥부제는 인월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가 흥부전의 발상지로 고증되면서 '착한 사람들의 큰 잔치'란 주제로 1992년 처음으로 열었다. 흥부의 착한 마음씨와 형제애를 널리 본받기 위해 매년 음력 9월 9일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는 날에 '남원시민의 날' 행사로 치러진다.
운봉지역은 판소리 '동편제'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 전에는 신라 때의 옥보고라는 사람이 바래봉 북쪽 옥계동계곡에서 제자들에게 거문고를 가르쳤다고 한다.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흥록은 운봉의 화수리에서 태어났다. 판소리를 본격적인 창으로 발전시킨 대가들은 모두 송흥록의 제자들이었다. 수제자인 김정근은 '중고제'를 만들고, 주상환과 박유전은 '서편제'를 창시했다. 송흥록의 자손이자 판소리의 대가였던 송광록과 송우룡, 송만갑 등도 화수리에서 태어나 음악의 경지를 개척했다. (신동길 지음 <뫼따라 하늘까지>에서)

[운봉읍 비전마을]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해 세운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이 인월과 이웃한 운봉읍 비전마을이다. 지명만 놓고 보면 언뜻 외래어처럼 들리지만 '비(碑)가 전해져 내려온 마을' 혹은 '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해서 그러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지척에 1,000m 이상의 지리산 고봉들을 두고 있는 터라 황산(697m)은 그야말로 동네 뒷산 격이지만, 고려 우왕 6년(1380년) 이성계와 휘하 장수들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친 역사적인 곳이자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마을이기도 하다.
당시 왜장은 아지발도였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어 섣불리 죽일 수 없었다고 한다.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렸지만 키가 7척에 힘이 장사라 온몸을 무거운 무쇠갑옷으로 두른 탓에 불사신과 같았다. 그를 죽이려면 화살을 이용해 얼굴의 급소를 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름도 그의 본 이름이 아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소문에 소문을 더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아리'는 어린 아이를 이르는 말이고, '발도'는 용맹하다는 뜻을 지닌 몽고말이라고 한다.
날이 저물고 그믐밤인데다 피아의 분별이 어려워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이었다.
당연히 아지발도도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이성계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지라 하늘을 향하여 "천지신명이시어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해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 같은 밤하늘에 어디서 솟았는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대낮같이 비추어 주었다. 깜작 놀라는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이 달빛에 훤히 빛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원수 통두란으로 하여금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게 했다. 그 화살이 어김없이 투구를 날리자 아지발도는 벗겨지는 투구의 끈을 입으로 잡으려고 얼른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이성계의 화살이 이번에 아지발도의 입속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관통한다. 결국 아군보다 왜구의 수가 10배가 많았지만 모두 섬멸되었고 아지발도가 흘린 핏자국이 지금도 황산 광천에 있는 피바위에 남아 있으며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인 것이다. 지금도 운봉 토박이의 열 가운데 아홉은 읍장 이름은 몰라도 아지발도는 다 안다고 한다. 거의 '아스팔또'에 가까운 발음으로 기억하는 그 어린 왜장 이름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 아예 귀에 박힌 탓이다. 이때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하여 인월(引月)이라고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장치(장동마을)] 남원시에서 출발, 24번 국도를 타고 운봉 여원재를 올라서면 좌측으로 첫번째 바라보이는 곳이 연재마을이며 그 마을 안쪽으로 장치부락(장동)이 있다. 예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불렀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해서 노루장(獐)의 장동(獐洞)이 되었다. 이 마을의 이름을 딴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고개이다.

[합민성] 641m. 합민성(장교산성, 할미성, 합미성, 방학산성)은 남원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성으로, 기록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 때 운봉 민보군의 거점이었다고 한다. 조선 말 일목장군 박봉양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운봉. 농민군이 패전하였다는 방아치와 관음치의 위치 또한 이곳 장치(방아치)와 합민성의 서북쪽 까막재(관음치)로 추정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때 쌀을 저장해 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린다.
또한 남원시 이백면 주민들은 방학산성이라 부른다. <남원지>에 "재장교리 후 나제시고루(在長矯里 後 羅濟時古壘)"라 하였고 "합민성은 석축으로 주위 약 200간(약 300미터)이며 산정에 있다"고 하였다. 성내 최고봉은 645m다. 성곽은 능선을 따라 서남 방향으로 누에고치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주위는 319.6m다. 성곽의 서남각(西南角)에 우루(隅樓)를 세워 폭 6m, 길이 8m의 돌출된 적대가 있고 그 동편에 남문, 북편 우루대 서북각에 서문 등 세 군데의 성문 유지가 있고 서북편 중앙에 샘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다수의 기와조각, 토기조각 등 삼국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까막재(관음치)] 간엄치, 혹은 간암재라고도 하며 덤몰(가동)에서 산동면 대기리로 가는 고개이다. 고종 31년(1894) 11월 김개남 남원 접주가 이는 동학군이 운봉 관군에게 패퇴한 곳이다.

[고남산] 846.4m. 정상의 조망은 매우 훌륭하여 서부지리, 덕두산-바래봉-팔랑치-부운치-고리봉의 기맥과 반야봉 아래의 크고 작은 무수한 봉우리와 도도히 뻗치는 대간의 능선이 대장관이다. 북동으로 보면 봉화산 백운산 덕유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편으로 정읍 내장산과 광주의 무등산이 날씨 따라 오락가락 한다. 지형을 살펴보면 이곳 고남산이 남원 함양 일대의 중추적인 방위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고남산 정상 부근과 함양읍 성터 부근의 지금도 남아있는 옛 성터 자리들과 작은 고을 너른 들판에 우뚝 솟은 범상치 않는 산세의 기운이 봉화대의 상징이었지 않나 짐작된다. 고남산 산불순찰 촌노(村老)의 귀뜸이 이성계 장군이 고남산에 제단을 쌓고 큰 제를 지낸 후 왕위에 등극했다 한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1백여 평의 헬기장과 통신시설물이 자리하고 있음도 이 일대 시원하게 열려있는 고남산의 조망 덕이 아닐까 한다.
이성계가 황산벌 대첩을 하기 전,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출발할 때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크게 노하여 불길하다 하여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죄값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한 뒤, 이 산의 이름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불렀다. 고남산 아래에 주둔할 때 군사와 말들의 식수로 썼던 샘터 주변에 터를 잡은 권씨 마을은 권세가 하늘에 닿도록 끊임이 없다 하여 권포리(權布里)라 하였다.

[통안재] 작은 독골재. 670m. 권포에서 산동 월석리 독골로 넘어가는 고개. 독골재에 비하여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란 의미. 동리 안 고개.

[매요마을] 이 마을은 원래 풍수설에 의하면 옛부터 말의 허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말마(馬)자와 허리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고승 유정대사(사명당)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여 매화는 눈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피는 꽃이며 향기가 순결하여 이 마을에서 낳은 사람들은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니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지형과 인심에 합당하다고 한 후에 마을 이름을 지금의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

[유치재] 매요리와 가산리의 중간, 사치마을과 연결되는 삼거리다. 인근의 마을은 모두 남원이지만 유치재 자체는 장수군 지역이다.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간다. 유치재를 매요마을 서쪽의 언덕으로 표시한 지도는 착오다. '흐름고개', 즉 경사가 거의 없는 고개라는 의미다. '버드나무고개'로도 부른다.

<백두대간12걸작선(傑作選)2>⑤ <고남산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3회 식사와 뒤풀이, 입장료,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백두대간학교 홈피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 (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선생님에게 해주세요. 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에도 많이 놀러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12걸작선2>를 시작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으로 산행을 시작한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가슴 저리도록 아름다웠던 눈 덮인 지리산, 모진 눈보라에 몸 떨며 황홀했던 소백산, 장엄한 산줄기에 절로 마음 내려놓았던 덕유산, 깊은 산에 자리한 거대한 풍력 발전기 곁을 지나던 선자령, 제비꽃 무성하던 봄의 대덕산, 철쭉 붉게 타오르던 봉화산, 빗줄기와 운무 따라 오르던 함백산, 구름 위로 걸었던 오대산, 무릉도원 풀어냈던 청옥·두타산,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함께 바람과 구름까지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 황홀지경을 보여주었던 조령산, 고요히 산길 걸으며 자신을 만날 수 있었던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에 이르기까지 12번 산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백두대간은 더욱 살가워졌습니다. 몸은 대간 길에 머물기 원하고 마음은 대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듣기 원하게 되었습니다. 친밀함은 더욱 가까워지고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런 마음의 길을 이어 나가기 위해 <백두대간12걸작선2>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2>를 시작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왜 백두대간인가?'
'왜 우리는 백두대간을 걷는가?'


백두대간은 이 땅의 시작입니다. 백두대간이 열리며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이어 일어나고 열 개의 큰 강을 비롯한 수많은 물줄기가 흘렀습니다. 생명의 터전입니다. 삶의 출발이고 정신의 뿌리입니다. 또한 백두대간은 하늘의 뜻이 발현된 하늘의 땅입니다. 하늘의 지혜가 머무는 신성한 땅, 거룩한 공간입니다.

백두대간은 '지혜의 머리가 된 산'인 백두산(白頭山)의 '하늘의 연못' 천지(天池)에서부터 '머물면 사람 사는 세상과는 다른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인 지리산(智異山)의 '하늘의 봉우리' 천왕봉(天王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입니다. 하나의 산줄기요 굽이굽이 흐르고 있는 하나의 산입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오고가는 생명의 통로일 뿐 아니라 기후와 언어, 삶과 문화를 구분 짓는 큰 산줄기입니다.

따라서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이 땅의 처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잃어버렸던 첫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지혜를 얻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의 바람에 기대어 그 산길을 다시 엽니다.


새로운 산행 코스를 선정하는데 몇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 구간별로 이야기가 있는 산행을 만들어갑니다.
둘째, 근교 산행을 즐기는 분들이면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산행 코스를 잡았습니다.
셋째, 숲의 소리를 듣고 나무와 꽃을 느끼며 천천히 산행을 합니다.
넷째, 계절별로 아름다운 구간을 선정하였습니다.
다섯째, 산행 구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구간별 난이도 표시하였습니다.
여섯째, 종주 산행을 하기 원하는 분들을 위해 지리산과 설악산 종주를 넣었습니다(1박2일로 진행되는 산행으로 난이도 '중상(中上)'의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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