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손학규의 가능성, 민주당 개혁에 달려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손학규의 가능성, 민주당 개혁에 달려있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3>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어떤 민주주의인가』,『민주주의의 민주화』등 그의 주요 저서들이 말해주듯이 평생을 한국적 현실에 적합한 민주주의 모델 연구에 바쳐온 학자를 만난다는 건 참 설레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3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지난 4월에 출간한『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최근 진행되고 있는 한국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그가 살아온 시간들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최장집은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출간한 이유에 대해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한 측면, 아래로부터 권력이 창출되는 것에만 집중해 왔다. 베버는 위로부터의 측면, 즉 권력을 가지고 이를 행사, 운용해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베버가 말하는 이런 면이 그 동안 자주 간과되었다고 느껴졌고, 하나의 전체 구조에서 정치를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현실 정치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좋든 싫든 민주당은 한국의 주요정당(major party)들 가운데 개혁적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정당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한편으로 지역주의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사회경제적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사회변화와 발전의 민주적 동력이 되기보다는 후진적, 퇴영적 면모를 거듭해왔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의회, 행정부 권력은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경제적 상층을 대변하는 한나라당의 수중에 있다. 민주당이 거듭나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회복해야 정권교체도 가능한 것이다. 민주당의 분발이 촉구되는 상황이고, 이점에서 민주당의 개혁은 필수적이다."라며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 민주당이 뼈를 깎는 개혁을 단행하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줄 것을 거듭 당부하였다.

▲ 최장집 교수
그 뿐 아니라 "선거연합이든 정당통합이든 최근 연합정치 논의는 "복지국가 만들기", "내가 꿈꾸는 나라"와 같은 슬로건에서 보여지듯이 도덕주의적 정치언어나 담론을 통한 담론정치의 형태로 진행된다는 특징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반(反)MB를 중심으로 한 민주대연합의 내용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연합'이라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대의를 갖지 못하고, '무엇에 반대한다'는 추상적이며 소극적 반대를 결집하는 것 이상의 내용을 갖기 어렵다. 이렇게 볼 때, 그것은 정권교체로 표현되는 권력획득에 대한 조급하고도 강렬한 열망 이상의 것을 의미하기 어렵다. 기왕에 선거연합, 정치연합이 강하게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고 필요하다고 한다면, 구체적인 내용을 갖는 연합, 그래서 한국의 정당체제의 변화와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연합정치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예컨대 여러 부분체제들 가운데서도 노동자들의 생산자 집단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때, 민주당과 부분체제로서의 조직노동이 선거연합, 정치연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며 현재 진보개혁진영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야권연대가 보수독점 하에 소외되어왔던 노동세력이 제 목소리를 찾는 데 기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내비쳤다. 한국 정당체제의 발전과 노동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이론적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그다운 주장이었다.

이쯤에서 그가 왜 손학규를 지지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동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이야기하고, 정당정치의 발전을 이야기해온 진보적 학자가 중도적 성향을 띠는 손학규 대표를 지지하는 것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많은 사람들 특히 진보파들 사이에서 그의 한나라당 전력과 중도온건 노선이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손학규가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다는 비판이다. 나는 여기에 대해 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오히려 그런 점들이 손학규 대표의 장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사적 연원으로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지 못하며, 노동 등 현대 사회의 중심적 계층적 이해마저 대표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정치가 서 있는 맥락이다. 따라서 중산층 이상의 불필요한 불안감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복지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의제로의 민주당의 정책적 이동과, 편중된 지역적 기반에 의존하며 퇴행해온 민주당의 조직적 면모를 일신시켜, 한국사회의 대안정당으로 민주당의 변화를 이끄는데 그의 중도적 온건개혁노선이 플러스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개인적 기대와 실제로 그가 현실 정치의 공간에서 얼마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인가는 아마도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무엇보다도 민주당을 개혁하는 데 있어서의 리더십에 달려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라는 답을 내놓았다. 손학규에 대한 지지가 단순히 손학규 개인의 역량에 국한된 지지가 아닌 한국의 민주주의 상황에 대한 그의 판단과 맥이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그가 바라보는 한국의 현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유추해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나는 젊은 세대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펼쳐지지 못하는 사회를 조장 또는 방치하고 있는 현상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실패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부정적 결과가 젊은 세대들에게 전가되는 것, 나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와 경쟁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로 이해한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는 젊은 세대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것, 나는 그것이 향후 정치의 핵심적 과제라 믿는다."라며 치열한 생존경쟁에 내몰려 꿈꾸는 것조차도 버거워하는 젊은 세대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현 정치권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비록 은퇴를 했지만 젊은 세대들이 지적 자극과 교양을 갖도록 격려하는데 나의 역할과 기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젊은 세대에 대한 따뜻한 격려 또한 아끼지 않았다. 한국 정치의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함에 있어서는 가감이 없었던 그였지만,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손녀와 손자들이 당하는 고통에 가슴아파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연구과 현실 참여는 어쩌면 젊은 세대들이 마음껏 꿈꾸고 뛰어놀 수 있는 사회가 속히 오길 바라는 그의 소망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여기저기서 만나게 되는 그의 지적인 문체에서 스며져 나오는 따뜻함에 나도 모르게 살짝 먹먹해져올 때가 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 책을 낸 계기와 시급하게 읽혔으면 하는 정치철학자로 막스 베버를 꼽으신 이유는?

지난 해 정치학에서 고전으로 읽히는 작품을 저술한 대표적인 정치철학자들을 선정해봤다. 그리고 이들과 그들의 주요 저작을 중심으로 몇 달에 걸쳐 강연을 진행했는데, 이번 책은 바로 그 강연의 첫 번째 산물이다. 처음에는 선정된 12명 모두를 묶어서 한권의 책으로 출간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 방대하고 어려운 작업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사회에 보다 먼저 읽혀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정치철학자를 선정해 한 권씩 출간하기로 하였다. 그 첫 결과물이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이다.

강연은 시간 순 즉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출발해 현대에 가까운 학자들로 넘어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때 가장 마지막으로 다룬 사람이 바로 막스 베버였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경험한 지도 벌써 사반세기의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풍부하지 못하며, 이해도 부족하다. 현실에서 대두되는 문제를 중심으로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대응하다보니, 정치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매우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긴 호흡을 가지고 성찰적으로 문제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이 이번 작업을 추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일 먼저 베버를 쓰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민주화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한국사회의 지식-엘리트들이 정치에 대해 갖는 태도와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된 문제의식에서다. 한국의 지식-엘리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상념에는 낭만주의적, 도덕주의적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다시 한국의 지식-엘리트들 사이에 깊이 자리한 반-정치주의적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와 정치가 한국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무언가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점들을 일깨워 준다는 점이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해, 한국정치의 전통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정치를 대하고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 현실주의적 접근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베버의 말을 빌리자면, '신념의 정치'는 정치적 가치나 이념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결합하면서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넘쳐흐르는데, '책임의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은 너무나 약하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윤리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을 중시하는 정치에 대한 현실주의적 접근 내지 태도에 기초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베버에게서 이러한 점들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문제와 관련해, 현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이를 통해 시민의 자유를 확대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성격과 작동방식을 잘 이해하는 것이 크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더불어 현대의 독점자본주의 사회의 특성과 구조를 잘 이해하고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 국가나 자본주의적 시장질서, 거대기업의 존재와 역할을 말하는 것은 정치가 무척 전문적이고 복잡한 기술합리적인 문제들을 다룰 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18세기나 19세기 전반의 초기 자본주의적 환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들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말하고, 민주정치를 실천할 때, 우리는 자주 이러한 관료기구나 거대자본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지나쳐버리곤 한다.

베버는 현대 민주주의가 어떻게 관료적이고 기술적인, 그리고 전문적인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가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국가라는 것이 굉장히 복합적이고 복잡한 내용을 갖는 기구이며, 국가의 역할,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과의 관계, 국가가 만들어내는 권력과 정책, 이 모든 것들이 정치의 맥락이고 바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가 정치를 이해할 때, 개별 정치인의 행위나 특정한 정책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 그럴 때 그것이 위치한 큰 흐름 내지 구조를 놓치게 된다. 즉 우리가 이러한 큰 흐름 속의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정치를 말하고 나아가 정치를 통해 무언가를 개선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정치가 한편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관료적 기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를 통하지 않고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할 수 없다는 국가에 내재된 일종의 딜레마를 다루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측면과 관련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선거, 정당, 민의를 대표하는 리더의 선출 및 정부형성 등을 민주주의와 관련지어 많이 이야기 하곤 한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서 국가라고 부르는 거대한 그리고 항구적으로 제도화된 관료조직이 시민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이러한 국가의 존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통해 운영되고 또 운영되지 않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현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이해할 때, 인민주권이나 참여를 통한 정부의 구성과 대표의 선출 정도로 여기곤 한다. 그러면서 인민의 의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란 생각을 만들어 낸다. 즉 다수의 결정을 통해서 국가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그럼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물론 규범적으로 또 원리에 있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모든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갖는 매우 복합적인 측면을 이해하는 데, 베버는 굉장히 중요하다.

또 다른 차원에서 베버의 논의를 얘기해보자. 정치를 두 방향 내지 두 측면으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한 방향은 인민주권의 실현, 참여에 있어 평등, 인민의사의 대표 등 권력이 만들어지는 측면이다. 다른 방향은 이렇게 선출된 지도자 또는 정부가 국가(정부)를 운영하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차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권력과 권위가 창출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렇게 창출된 권력을 수단으로, 지도자나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즉 리더십의 문제이다. 정치를 이렇게 두 방향으로 구성된다고 이해할 때, 베버는 특히 리더십의 문제, 즉 권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정치가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문제를 말하는 데 있어 그 누구보다 중요한 이론가이다.

이 점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한 측면, 아래로부터 권력이 창출되는 것에만 집중해 왔다. 베버는 위로부터의 측면, 즉 권력을 가지고 이를 행사, 운용해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내가 베버를 말 하는 것은 이런 측면이 그 동안 자주 간과되었다고 느껴졌고, 하나의 전체 구조에서 정치를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강연할 당시 독일은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패전으로 제국은 붕괴되고, 내부적으로 혁명의 기운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결정해야 할 중요한 정치적 이슈들은 차고 넘치는데, 그것을 감당할 만한 정치적 역량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때였다. 위기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산업발전, 그것이 가져온 폭발적인 사회적 위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로부터 연유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정치에 대한 베버의 통찰력은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고 다루는 데 긴요한 커다란 지적 자원이 아닐 수 없다. '소명으로서의 정치'에 나타는 베버의 정치에 대한 비전은 굉장히 암울하다. 그는 당시 정치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암울하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정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며, 롤러코스터를 타듯 기복이 심한 한국 정치현실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베버의 냉엄한 시각은 주목할 만하다.

4.27 재보선 이후 한국 정치의 방향과 한국 정당 정치의 문제 및 발전방향에 대해서 말씀해주신다면?

지난 4월 재보선은 야당들, 특히 제1야당 민주당의 분명한 승리로 보인다. 결과만을 두고 볼 때, 분당과 강원에서의 야당의 승리는 극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은 현 정부와 집권여당을 견제하고 심판하기 위한 것이었지, 적극적인 대안으로서 야당들에 대한 선택의 결과는 아니었다고 본다. 집권여당에 대한 불만과 실정 견제라는 소극적 선택으로서의 야당 지지는 사실 권위주의 시기로부터 변하지 않은 한국 선거의 특징과도 같은 것이다. 민주당은 여전히 시민적 열정과 요구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성장지상주의가 몰고 온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간명히 말하자면 권위주의 시기로부터 연원된 현재의 한국의 정당체제 즉 정당 간 경쟁의 양상은 협소한 이념적 스펙트럼에 갇혀 과거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당은 사회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선출직 공직자나 그 희망자로 구성된 정치엘리트들의 집합을 넘어 민주당의 유권자 속의 하부기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점에서 완벽하게 실패하고 있는 정당이다. 이 측면에 한정해 말하자면 한나라당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베버의 논의를 불러오면, 그는 암울한 독일 정치에 대해 "귀족은 더 이상 국가를 통치할 능력이 없고, 부르주아지는 귀족의 방해로 통치능력을 갖추지 못하며, 농민과 도시프롤레타리아 따라서 전체 국민은 이런 정치구조의 결함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서술했다. 한국의 정당정치를 보면 베버의 이런 묘사가 자꾸만 떠오른다.

한국정치의 발전방향 역시 이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국 정당과 정당체제가 민주화 되고 현대적 면모로 변화하는 것이다. 정당체제가 민주적으로 전환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일반 대중들의 정치참여는 확대돼야 하고,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이익이나 요구들은 정당들에 의해 넓게 대표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참여와 대표의 확대를 기반으로 정당들은 그들 자신의 비전과 구체적인 정책 프로그램, 그리고 이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을 충원하고 길러내, 국민들의 삶에 중요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실제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책임정치는 대표가 제대로 될 때 가능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정당에 의해 대표될 수 있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투표장으로 이끌어 내는 정당체제의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정치발전의 핵심요소라 생각한다.

현재 민주당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말씀해주신다면?

좋든 싫든 민주당은 한국의 주요정당(major party)들 가운데 개혁적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정당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한편으로 지역주의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사회경제적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사회변화와 발전의 민주적 동력이 되기보다는 후진적, 퇴영적 면모를 거듭해왔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의회, 행정부 권력은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경제적 상층을 대변하는 한나라당의 수중에 있다. 민주당이 거듭나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회복해야 정권교체도 가능한 것이다. 민주당의 분발이 촉구되는 상황이고, 이점에서 민주당의 개혁은 필수적이다.

민주당이 나가야할 바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방향을 제시한다면?

두 가지 문제가 중요하다고 본다. 먼저 참여의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대함으로써 당의 동력을 활성화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대중의 열정과 에너지를 기본 동력으로 하는 체제 아닌가? 민주당은 중산층과 더불어, 그동안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 광범위한 서민과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대표하고, 동시에 젊은 세대들의 의사와 비전을 조직하고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민주당은 사회와 가까워져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인적자원을 키워내 통치의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민주당의 정책적 비전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병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개혁적인 정당의 정책적 비전은 대안적 성장정책 즉 성장과 복지를 결합함으로써 그간의 성장지상주의적 경제운영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심이 될 것이다. 여기서 성장과 복지가 결합한다는 것은 곧 국가-재벌대기업 중심의 성장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간 소홀히 다뤄지거나 외면되었던 복지와 분배 그리고 노동의 가치가 정치 의제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변화의 시작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야권연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선거연합', '정당연합', '정당통합' 등 다양한 말로 표현되는 현재의 야권연대는 한국정치의 현실을 반영한 특징적 현상으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의 정당체제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양당제적 경향과 다당제적 경향을 오가며 제도화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제도권 내 야권으로 분류되는 정치적 힘들은 분산돼있다. 거기에 시민사회 진영을 필두로 한 제도권 밖의 힘들이 다양한 운동의 형태로 정치적 요구를 불러 모으고 있다. 민주화이후 형식적으로 정당의 정치적 역할은 크게 증대되었지만, 내용적으로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해들을 대표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정당은 사회적으로 제도화 되지 못했고, 그런 만큼 운동의 전통과 힘은 여전히 상당한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단순다수제를 중심으로 하는 선거제도의 효과가 존재한다. 단순다수제는 체제 내의 정치적 경쟁과 대립을 두 진영 간의 대결로 만드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야권연대에 대한 관심과 요구는 그래서 시민들의 참여와 변화에 대한 필요와 열망은 강렬하지만, 정당들이 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이를 제도내로 수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의 한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연합정치에 대한 요구는 일정하게 정당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연합이든 정당통합이든 최근 연합정치 논의는 "복지국가 만들기", "내가 꿈꾸는 나라"와 같은 슬로건에서 보여지듯이 도덕주의적 정치언어나 담론을 통한 담론정치의 형태로 진행된다는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거연합의 실제는 결국 민주당과 다른 야당 그리고 여러 외부 정치세력들이 특정한 선거구에서의 후보자 조정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권력을 나누는 것에 관한, 즉 권력을 둘러싼 경쟁과 투쟁의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권력을 향한 이해와 열망이 도덕주의적 담론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선거연합의 한 특징인 이 같은 담론정치는 먼저 현실정치의 실제를 가리며, 또 정당정치의 제도화와 사회세력들의 정치적 대표라는 연합정치의 본질적 측면을 회피하거나 간과하는 부정적 효과를 갖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반MB를 중심으로 한 민주대연합의 내용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연합'이라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대의를 갖지 못하고, '무엇에 반대한다'는 추상적이며 소극적 반대를 결집하는 것 이상의 내용을 갖기 어렵다. 이렇게 볼 때, 그것은 정권교체로 표현되는 권력획득에 대한 조급하고도 강렬한 열망 이상의 것을 의미하기 어렵다. 그렇다 할 때, 연합을 말하는 야권은 한나라당이라는 다른 세력과의 경쟁에 앞서, 스스로 무엇에 관한 세력인지를 둘러싸고 분투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결국 어떻게 하든지 다수를 만들어 권력을 잡겠다는 것 이상의 내용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강연과 토론회를 통해 정치학자 필립 슈미터의 "부분체제"(partial regime)라는 개념을 빌어 선거연합의 내용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전체 정치체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 체제는 어떠한 동질적이고 통일적인 하나의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 운영되거나 작동하는 것이기보다는, 각기 다른 독자적인 운영과 작동의 원리를 갖는 전체 체제내의 여러 다양한 부분체제들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과 같은 생산자집단들이나 소상공인, 자영업자, 교사 등의 기능이익들이 각각의 부분체제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전체 체제 수준에서 한국사회는 민주화 되었지만, 이들 생산자집단이나 기능이익들의 부분체제 수준에서 민주화의 진척은 더디다. 전체체제와 부분체제는 민주화의 수준과 정도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익의 결사로서도, 정당을 통해 정치적으로 제대로 대표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위한 정당이 있다 하더라도 군소정당일 뿐이어서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로 역할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각기 경제적, 사회적 역할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독자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기왕에 선거연합, 정치연합이 강하게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고 필요하다고 한다면, 구체적인 내용을 갖는 연합, 그래서 한국의 정당체제의 변화와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연합정치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예컨대 여러 부분체제들 가운데서도 노동자들의 생산자 집단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때, 민주당과 부분체제로서의 조직노동이 선거연합, 정치연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에 앞서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민주당은 크게 다르지 않는 소규모 정당이나 유사한 성격의 정치운동 단위들과 통합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실질적인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에 참여하는 정치적 단위들이 어느 정도 단순화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협상이 내용을 갖기 위해서는 협상에 들어오는 행위자들이 각각의 구체적인 정책 비전과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부분체제의 이론을 사용해 연합을 추진할 때 장점은 무엇보다 연합으로 들어오는 정당 및 정치단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연대의 틀 안에서 공존을 가능케 한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민주당이라는 큰 정당으로 흡수통합 됨으로써 자기정체성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이를 지키고자 연합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당이 이러한 연합을 주도함으로서 사회경제적 요구를 광범하게 대표하는 포괄정당의 내용을 갖추는 계기가 되는 장점도 있다고 하겠다.

한국을 이끌어갈 정치지도자로 어떠한 리더상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제일 중요한 것은 민주적 가치를 신봉하고, 그 가치를 실천할 의지와 결의를 가진 사람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민주적'이란 말은 이해관계, 이념, 가치를 달리하는 사회의 광범한 개인이나 집단을 정치과정에 참여토록 하고, 갈등과 비판, 이견과 차이를 폭넓게 용인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갈등과 이견을 인정하는 것, 그 전제에서 그들 간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와 공적이성의 공간을 확대하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럼으로 결과적으로 자신의 신념 전체를 구현하기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부분적으로 그러나 가급적이면 많이 구현할 수 있는 정치인이 민주적인 지도자가 아닐까 한다. 그동안 한국에서 많은 정치 지도자, 특히 거의 모든 대통령들에서 정치를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의 공간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그 속에서 정치는 기술관료적 행정의 문제로 치환되곤 했다. 민주주의는 정치를 통하지 않고는 작동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를 부정하는 것은 내용적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치를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정치인, 그가 곧 민주적인 리더십의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좋은 정치인이라면 보통 사람, 서민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는 사람이어야 한다. 베버 역시 좋은 정치인의 자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내면적 신념, 휴머니티의 증진과 고양에 책임의식을 갖는 사람, 그러한 의식을 소명으로 가지며 권력에 대한 허영심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 이러한 권력을 통해 공공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했다. 내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지도자의 자질이 있다면, 좋은 인재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과감하게 역할과 능력을 발휘할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대부분의 통치자는 자신과의 친소관계의 크기에 따라 공직을 배분해 왔다. 즉 보통말로 자신에 '줄 서는 사람'에게 공직이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지도자는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서 중용하는 능력을 갖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최장집 교수

손학규 대표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현재 나는 국회의원 손학규의 후원회장이기에 나의 평가가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손학규 대표는 남들이 갖지 못한 많은 장점을 가진 인물이다. 아울러 결함과 약점도 있을 것이다. 오랜 인간관계를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손학규 대표는 한국적 정치풍토에서 가장 덜 정치적인 정치인, 베버식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본질적 측면이기도 하며 그리고 정치인들의 일반적 특성이라 할 데마고그적 정향이 그 누구보다도 적은 정치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격적인 지적훈련을 받은 교수 출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합리적이고 균형적인 판단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인간미와 대중적 친화력을 겸비한 흔치 않은 지식인 정치인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진보파들 사이에서 그의 한나라당 전력과 중도온건 노선이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손학규가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다는 비판이다. 나는 여기에 대해 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오히려 그런 점들이 손학규 대표의 장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사적 연원으로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지 못하며, 노동 등 현대 사회의 중심적 계층적 이해마저 대표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정치가 서 있는 맥락이다. 따라서 중산층 이상의 불필요한 불안감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복지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의제로의 민주당의 정책적 이동과, 편중된 지역적 기반에 의존하며 퇴행해온 민주당의 조직적 면모를 일신시켜, 한국사회의 대안정당으로 민주당의 변화를 이끄는 데 그의 중도적 온건개혁노선이 플러스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의 한국의 정치현실은 어떤 유형의 정치인을 요청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때가 많다. 이 질문은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우리는 오늘 정치를 통해 한국사회를 어느 정도로 변화시킬 수 있나? 큰 변화는 과연 가능한가? 등등의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본다. 불행하게도 이런 질문에 대한 나 자신의 대답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큰 변화의 가능성은 민주화 직후에 상당히 높았다고 본다. 국가건설 이후 민주화 이전까지 한국사회를 만들어 놓은 것은 보수세력이었다. 그리고 그 구조 위에서 민주화는 진행되었다. 기득권세력들과 변화를 요구했던 민주화 세력사이의 충돌은 한국사회를 뒤흔들며 민주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사회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가장 강했던 시점은 민주화를 기점으로 해서 여기에 가까웠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한국의 정당정치가 제도화되고 공고화되었다면, 또 좋은 리더들의 등장과 경쟁으로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가 선순환의 발전을 이끌었다면, 지금의 한국의 정치현실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화의 초기 국면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세력의 집권도 있었고, 이 시기동안 변화의 공간은 일정하게 열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 가능의 공간은 점점 더 닫혀가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힘들의 상호작용이 지난 대선에서 보수정당의 집권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민주화 혁명의 대상이 되었던 정치세력들이 민주적 경쟁의 룰을 통해 다시 집권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한국에서 큰 변화의 가능성 내지 변화의 범위라는 것은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민주적 경쟁의 룰을 통해 보수든 진보든 집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민주화이후 민주주의가 기존 질서를 중심으로 상당한 틀을 잡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한국의 정치현실은 대표적으로 정당체제의 불안정, 정당의 낮은 수준의 제도화로 요약되곤 하는데, 이는 애초에 민주화를 희망했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기대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건과 상황에서, 큰 기대를 걸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방법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는다면, 그렇게 큰 가능성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정치는 이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중산층과 서민이라고 하는 계층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방향이되, 보다 현실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나름의 기준과 판단에서 볼 때, 정치적 경험을 가진 지식인이자, 부패하지도 편향되지도 않으며, 한국사회에서 요청되고 가능한 현실적 변화를 이끄는데 있어, 손학규 대표는 좋은 자질과 덕성을 갖춘 리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개인적 기대와 실제로 그가 현실 정치의 공간에서 얼마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인가는 아마도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무엇보다도 민주당을 개혁하는데 있어서의 리더십에 달려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시민적 열정과 요구를 대표하지 못하고, 여전히 후진적, 퇴영적 모습에서 답보하고 있는 민주당에 대중적 에너지를 불러들임으로써 변화의 활력을 만드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기득이익에 안주하고 있는 민주당의 중심에 다른 사회적 힘들이 불러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변덕스러운 여론의 추이에 즉자적이며,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으로 집권의 기회를 엿보는 식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실제로 개선하는데 민주당이 능력을 갖추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민주당이 하나의 포괄정당으로서 확대되고 재편성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베버가 당시 독일에 대해 지적한 비판이 한국사회에도 유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지나치게 낡은 이념에 사로잡혀 급격히 통치능력을 상실하고 있지만, 중산층은 작은 기득이익에 사로잡혀 사회변화에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대응하면서 통치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또 노동자와 사회저변을 대변하는 진보세력은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손학규 리더십 하의 민주당이 해야 할 과제는 스스로의 통치능력을 키워나가는 한편, 여전히 정치적으로 허약하고 미숙한 진보세력이 성숙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연합정치 논의에서 '부분체제'라는 익숙하지 않는 말을 사용했지만, 그것은 민주당이 진보세력 특히 조직노동과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이론적 기초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자유주의는 무엇인지, 이와 관련하여서 한국의 자유주의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냉전과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희생양이다. 자유주의라는 것이 시민들이 그 내용을 따지고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대한민국 헌법에 그 중심 내용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의 주요 내용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이념으로도 흡수되었다. 자유(민주)주의가 냉전의 산물로서 한국사회에 들어오다 보니 좌우 양측으로부터 협공의 대상이 되었다. 보수는 보수대로 자유주의를 실천하기 보다는 냉전반공주의를 더 우선시했다. 냉전반공주의는 자유주의를 가져오기 위한 하나의 수단적인 과정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 자체는 자유주의가 전혀 아니다. 좌파는 좌파대로 자유주의를 냉전반공주의, 권위주의를 정당화 하는 장치로 이해하면서 이를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는 철학적인 요소나 사회적 윤리로 한국사회에 실제로 수용되기보다, 지향해야 할 정치적 규범으로 설정되면서 이념화되었다. 그러다보니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자유주의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 자유주의를 대하는 한국적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접두사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라는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가 너무나 광범하고 애매모호해서 접두사가 붙어야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그 모습이 나타난다. 자유주의에 접두사를 붙여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접두사를 빼고 자유주의를 한국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된 다음에, 진보적 자유주의든 공동체 자유주의든 이야기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생각한다.

선생님에게 자유란?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도덕적 자율성이 그로부터 나오는 인간존재의 가장 본질적이고 귀중한 요소가 자유이다. 그러나 규범으로서나 가치로서나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이를 실제로 향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사회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자유는 자기완결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에 흥미를 가지고 계신 것이 있으신지?

이번에 출간한 막스 베버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마키아벨리에 지적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정치철학에 덧붙여, 현실적이며 동시에 학문적인 세 가지 정치학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먼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 둘째는 사회계층 구성의 변화와 이동에 관한 문제이며, 마지막으로 정규직/비정규직 문제이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해 말한다면, 국가와 사회 사이에 위치하며, 양자를 매개하는 중간층위인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의 역할과 변화에 큰 관심을 갖는다. 이는 베버, 몽테스키외, 토크빌의 중심적 문제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과도하게 성장하고 비대해진 강력한 국가가 사회에 존재하는 기존의 자율적 중간집단을 흡수 또는 포섭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 소상인 등 이들의 자율적 결사체의 성장을 막는 방식으로 국가가 시민사회의 성장을 억제 또는 억압하는 현상에 관한 문제이다. 이처럼 시민사회의 성장이 지체되는 동안에, 시장영역에서 재벌대기업을 주축으로 한 거대 사익집단들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비대해졌다. 이런 구조가 한국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는 중요한 문제라 생각되어 연구했으면 한다.

두 번째는 사회의 계층구성과 이동에 관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계층구조, 특히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산업화와 민주화, 또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성장으로 어떻게 변화해왔나 하는 문제이다. 민주화는 사회계층의 상향이동을 포함한 계층이동의 가능성을 증진시키는데 어떤 효과를 가져왔나? 최근 한국의 계층이동의 구체적 메커니즘과 실태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인상적으로 현재 사회적 상향 이동의 가능성은 크게 낮아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말하자면 계급, 계층적으로 단절, 구조화된 사회라는 느낌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건과 실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정치적 대표의 수준과 변화에 대해 연구하기를 희망한다.

어린 시절, 청소년기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밀양이지만, 본가가 위치한 강원도 강릉에서 주로 성장했다. 중학교까지 강릉에서 보냈고, 고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왔다. 유년 시절을 보냈던 강릉의 자연환경이 풍부한 감성과 정서적 자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런 점에서 나는 행운아라 생각한다. 그래서 목가적이고 사색적이었던 것 같다.

오늘의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도 이점에서다. 그들은 대도시의 삭막한 콘크리트 속에서 자연과 격리되어 자라기에, 감성이나 정서를 함양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또 전자기술 문명의 발전으로 스스로 사고하고 사색할 여유도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지적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있었던 4.19는 나에게 있어 굉장히 큰 충격을 준 큰 변화였다. 무엇보다 이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의 나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운동권에 가까웠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점에서 4.19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젊은이들을 정치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건이었다.

유학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나 힘들었던 일이 있으시다면?

나는 기회가 닿아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유학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대학자들의 엄청난 지식의 폭과 깊이를 직접 알고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혁명에 가까운 변화였고, 내게 엄청난 지적 자극을 주었다. 힘들었던 점은 학부시절 미국보다는 독일이나, 프랑스에 관심이 많아서 영어를 늦게 배웠는데, 미국 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유학을 간 시점이 상대적으로 늦었기 때문에, 마흔이 되어서야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가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의 시기였고, 그래서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 역시 한국에 돌아와 한국화 되는데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 지금 두 딸은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 이는 어쩌면 내 늦은 유학생활에 결과인 셈이다. 내가 유학했던 당시 대부분의 보통 학생들이 그랬겠지만, 아내가 아르바이트 하는 등 참 많은 고생을 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다가온다.

학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 있으신지?

존경하는 분으로 김우창 교수를 얘기할 수 있다. 정치적 관점은 나와 다르지만 김우창 교수의 철학적 사고는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한국 사회문제를 보는 데 있어서 섬세한 철학적, 인문학적 통찰과 여기에서 나온 문제를 보는 혜안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선생은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세계적 수준에서 최고 수준의 철학자들의 반열에 있는 한국사회에서 보기 드문 분이라고 생각한다. 생활태도와 학문적 연마에 있어서도 선생은 한국사회에서는 희귀하다고까지 할 정도의 현자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스승이란 측면에서 나는 미국에 가서야 비로소 대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분야는 제쳐두고, 정치학 분야에서 필립 슈미터, 아담 쉐보르스키, 브라이언 배리, 욘 엘스터 등은 모두 세계 정치학계를 대표하는 대가들이다. 이런 분들에게 강의와 지도를 통해 직접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자유롭게 사고하고 어디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말하고 쓰는 것이 내가 해왔던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이나 돈이 나의 학문적 사고나 행위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한국사회 미래상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내가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동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 사람의 가치를 너무 낮게 보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에서 노동은 여전히 지적으로, 이념적으로 굉장히 부정적인 편견을 야기하는 언어로 인식되고 있다. 내가 강조하곤 하는 정치적으로 노동이 중요한 행위자가 되지 못하는 데에는 노동의 책임도 있지만 이러한 사회적 편견, 이를 교정하지 못하는 교육과 문화의 문제도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이는 냉전반공주의의 유산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내적검열이라고 할까 이런 것이 자유로운 사고를 제한하고 전체적인 교육과 문화의 수준을 편향적으로 만들고, 저하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그래서 노동의 가치와 역할이 경시되고 홀대되는 현재 상황이 개선되는 것이 미래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으시다면?

아무래도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기억을 중심으로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교수가 되었을 때가 민주화 운동이 막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군부권위주의 말기라 할 수 있는데, 당시는 교수들도 여러 차례 시위에 참여하곤 했다. 그래서 고대 교수 시절 함께 시위했던 사람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내가 젊은 교수일 때 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당시 담임제라는 것이 있어 학생이 투옥되면 면회, 석방운동, 변호사 섭외 등이 담임교수의 역할이었다. 나는 고대 정치외교학과 81학번의 담임교수였다. 내 기억에 해당 학번에서만 감옥에 간 학생들이 20명 가까이 되었고 경찰서를 참 많이도 드나들었다. 현실화 되진 않았지만 그 와중에 학생들을 인터뷰해 책을 쓸까 하는 생각도 할 정도였다. 지금 민주당 최고위원인 이인영 전 의원도 당시 학생회장으로 교수들 시위에 따라와 응원을 보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미국에서 처음 돌아왔을 때,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기 전의 김근태 씨를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만났다. 지금은 어느덧 원로 정치인이 됐지만, 젊고 예지에 찬 운동권 지도자로서의 김근태의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여전히 생생한 기억의 한 장면이 되었다. 충남지사가 된 안희정 역시 기억에 남는 학생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젊은 정치인이라 생각한다.

지금 선생님의 꿈이 있다면?

학교를 떠났지만 늘 교육, 문화 문제에 관심이 많다. 한국의 교육, 문화 그리고 전반적 지적 수준이 지나치게 향리적이고 폐쇄적이라는 것, 그러는 가운데 외국의 문물이 너무 무매개적으로 유입되는 데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내 나라인 한국에 대해 내가 갖는 이미지는 벼락부자의 모습이다. 굉장히 짧은 시간에 경제발전을 이뤘기에 돈은 남부럽지 않게 많은 부자가 되었지만, 지적·문화적 성장이 이에 상응하지 못하기에, 양자 간의 격차가 너무 큰 그런 사회로 인식된다. 이런 격차를 줄이는데, 이를테면 책을 쓰고 강의를 통해, 기성세대는 어쩔 수 없더라도 젊은 세대에게 지적 자극과 교양을 갖도록 격려하는 데 나의 역할과 기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치철학 강좌도 그런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고, 힘들지만 계속 책을 써내는 것 역시 그런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하시고픈 말씀이 있으시다면?

현재의 젊은 세대들을 떠올릴 때 두 개의 상충된 이미지를 갖는다. 하나는 세계화 시대란 말이 암시하듯이 모든 것이 가능하고 열려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관심과 노력에 따라 모든 것이 가능하며, 또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그들의 재기발랄함은 큰 기대를 갖게 만든다. 우리 세대 때만 해도 한국은 말 그대로 후진국이었고,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획일적 냉전반공주의만 전일적으로 교육되는 폐쇄적 사회였다. 우리 세대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는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이 매우 불행한 세대가 아닐까 생각하며 이는 매우 안타까운 점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은 열린 환경에서 커다란 가능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힘든 세대다. '취업이다', '경쟁이다' 하면서 우리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압력 하에서 고통 받고 있다. 학교를 마쳐도 직장에 취업하기도 어렵거니와, 겨우 취업에 성공한다하더라도 개인의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면을 허용하지 않는 기업의 위계적인 권위구조, 베버의 말을 빌자면 '합리화'의 압력 하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에 몰입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세대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펼쳐지지 못하는 사회를 조장 또는 방치하고 있는 현상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실패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부정적 결과가 젊은 세대들에게 전가되는 것, 나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와 경쟁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로 이해한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는 젊은 세대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 나는 그것이 향후 정치의 핵심적 과제라 믿는다.

젊은 세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세계로 눈을 돌리고, 세계적인 안목과 수준에서 생각하고 배우고, 가능한 많은 인간적, 지적 경험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현실에서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세계적 안목을 지녔으면 한다. 또 고전을 착실히 읽고 외국어 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젠 우리사회의 중견세대가 되어버린, 이른바 386세대를 보면 상당히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들은 젊은 시절 내내 민주화 투쟁의 전위적 역할이 맡겨졌고, 그들의 가능성과 에너지는 운동에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학업과 사회경험 등 개인적 발전과 계발의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잃어버린 세대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제 그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한국사회의 중심적인 세대로 성장했다. 한 세대로서 이들이 잘 되는 것이 한국사회 전체가 잘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들 세대가 지적으로 성장할 수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점은 그래서 한국사회의 불행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에서 앞으로 한국사회를 이끌 좋은 지도자가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에필로그

긴 인터뷰를 끝내고 선생님께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사주시겠다고 하셔서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식사를 기다리며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생님, 여가는 어떻게 보내세요?"라는 질문을 드렸다. 그러자 "평소 고전음악을 참 좋아해. 그래서 말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 쇼팽의 피아노곡들, 오페라 등을 즐겨듣는 편이야."라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역시 지적이고 목가적이며 사색적인 선생님다운 여가활동이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예기치 않던 반전이 있었다. "아! 그리고 은퇴 후 예전에 보지 못했던 드라마를 즐겨 보는데, 참 재미있어. 좋은 작품들이 꽤 많이 있더라고." 선생님께서도 드라마를 보신다니. 그래서 바로 어떤 드라마를 좋아하세요라고 여쭈어봤더니 "역전의 여왕을 너무 재미있게 봤어. 김남주와 박시후가 참 연기를 잘하더라고. 그래서 역전의 여왕 보고 김남주, 박시후 팬이 됐잖아. 아! 검사 프린세스도 참 재미있게 봤어. 김소연, 박시후가 연기를 참 잘하더라고!"


이쯤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혹시 시크릿가든도 보셨어요?" "아! 봤어! 현빈! 연기를 참 잘하던데. 남자가 참 멋있어! 그리고 여자 주인공 이름이 뭐였더라." "하지원이예요!" "맞아, 맞아! 하지원! 둘이 참 잘 어울려!" 그 날 우리의 밥상은 참으로 풍성하고 즐거웠다.

(인터뷰 및 정리: 김경미, 양태성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