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은 복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일천하고, '잘 살아보세!'라는 경제성장의 신화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을 때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의료보험을 도입했다. 1980년대 재계의 힘이 갈수록 커져가는 시점에 경제세력의 무한확장욕구를 억제할 경제민주화 조항을 헌법에 집어넣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경제정책전문가가 경제활동을 제한할 소지가 높은 조항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헌법"에 집어넣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는 자유주의자가 아닌 게 아닐까? 이쯤에서 단도직입적으로 그가 생각하는 자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배고픈 사람이 길을 가다, 빵을 보았을 때 빵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향상시켜주는 것이 경제정책을 하는 사람들의 최상의 목표다. 경제정책에서 물가안정이니 환율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목표의 하위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경제정책의 최대의 목표도 곧 자유이다."라는 답을 들려주었다. 여기서 이해가 되었다. 경제민주화 조항을 대한민국 헌법에 왜 굳이 집어넣었는지 말이다. 빵 하나를 훔친 이유로 평생을 죄인처럼 도망다녀야했던 장발장이 우리 사회에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쯤에서 그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오해를 받았을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은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을 해보았다. "그 헌법이 사회주의적인 헌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나를 사회주의자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런가? 독일이 social market economy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시장경제이지 socialistic market economy, 즉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아니다. 이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시장경제라는 것이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인데,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안 되는 일들도 많다. 이것을 해결해야하고 이것을 내버려둬서 비사회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시장경제 자체가 깨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작지만 경제세력과 이익집단 위에 있는 강력한 정부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질문을 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그는 사회적인 것과 사회주의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더불어 그는 정책가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의 실험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과 사회가 실험의 대상이기 때문에 굉장히 용의주도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정책 하나를 잘못해서 대한민국의 수천만 명이 고통을 받으면 그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사회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아가면서도 여러 정책들을 계속 밀어붙일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궁금했었는데, 그 정책들이 사람을 향해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책이 사람을 향해 있다.' 이 말을 몇 번이고 되새기면서 나도 모르게 '사람을 향한 정책을 만드는 이에게 내 마음도 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 대통령 될 사람이 진짜 좋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봉사를 해 줄 용의가 있다. 그동안 대통령 출마하고 싶은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내가 조언을 해주는 정도에 머물렀었는데, 이 사람이 되면 참 나라가 잘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면 적극적으로 자원봉사 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내 나름대로 구상한 것을 줄 것이다. 받아주고 안 받아주는 것은 당사자 마음인 것이고. 한국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서 한국형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통령은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최소한 다음 기회부터는 이런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런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대통령 후보를 찾고 있다."
놀라웠다. 이런 이야기까지 할 줄이야.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도 알고, 우리도 알고, 인터뷰를 읽는 독자들도 알 것이 뻔한 상황에서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연거푸 이야기를 했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정치에 눈을 뜨고, 우리나라 2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사를 지켜봐온 그가, 다음 대선에서 이제까지 구상해온 정책패키지들을 마음 놓고 맡길 선수를 찾고 있다고 한다.
거참. 그 선수가 누가 될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혹시 당신이라고 생각하는가? 어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럼 지금 당장 찾아가보시라. 다만 주의사항이 있다면, 그를 찾아가기 전 아래 인터뷰를 아주 꼼꼼히 읽어볼 것! 특히 그가 말한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 정책가의 자질에 대해서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어볼 것.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왜냐고? 그 역시 아래 인터뷰를 꼼꼼히 읽어볼 것. 힌트가 있다면 그는 자유인이라는 것! 그것도 인간과 사회를 아주 많이 사랑한!
[인터뷰 전문]
정치경영연구소: 헌법 제119조 2항, 소위 김종인 조항이라 불리는 경제민주화 조항을 빼놓을 수가 없다. 87년 개헌 당시 이 조항을 넣게 된 계기와 상황은 어떠하였나?
김종인: 우리나라는 1962년에서부터 6차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압축성장을 이루었다. 오늘날 선진국들이 100년 이상 걸려서 이룩한 산업화를 한국은 40~50년 만에 달성한 것이다. 한국은 원래 자원이 없는 나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제한된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빠른 성장을 하기 위해 5개년 계획을 마련, 자원을 배분한 것이다. 빠른 성장을 위해 자원을 배분하다보니 몇몇 기업에게만 자원배분의 혜택이 돌아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의 재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재벌의 탄생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경제가 발전하면 물질이 풍요로워지고 이는 곧 국민의 부의 증가와 생활수준의 향상, 그리고 국민의 행복의 증대로 생각하기 쉽다. 이 부분에서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경제의 부가 증가한다는 것은 부 자체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부를 바탕으로 그것을 소유한 자들의 정치사회적 힘도 같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재벌과 경제세력의 성장 과정을 보면, 60년대는 태동기, 70년대는 확장기, 80년대는 안정기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 70년대 중반부터 내가 생각했던 것이 6차 경제개발 5개년 개발 계획이 끝나는 90년대 초에 가면 정치세력과 경제세력의 관계가 역전을 하는 상황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정치세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정치세력이라는 것이 당면한 정치사회적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이해관계를 유지해 나갈 필요도 있고, 여러 가지 법적 조치도 필요하다면 해야 하는 것이 정치세력이다. 그런데 경제세력의 힘이 우위에 있다면 그에 반하는 정책이나 법적 조치는 경제세력의 반발로 인해 무산되거나 관철되지 못할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면, 1935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 사회보장법 바로 전에 뉴딜의 근간이라 불리는 농업조정법, 국가산업부흥법(NIRA)등 1차 뉴딜의 위기극복정책을 펼쳤으나 기존 기득권세력이 위헌소송을 제기해 보수적 판사들의 판결에 따라 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이 내려졌다. 이는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을 압도한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70년대 한국 재벌의 상황을 보면, 이후의 상황은 루즈벨트 당시 미국 기득권세력의 권한보다 막강하게 될 것이 훤히 보였다. 마침 헌법 개정을 하는 특위를 만들었는데, 그 특위에서 경제조항을 담당하는 위원장이 되었다. 한국 재벌의 힘이 증대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경험한 것이 이때인데, 내가 헌법개정위 경제분과위원장이 되니까 전경련에서 즉시 반응이 왔다. 당시 정주영씨가 전경련 회장이었는데, 신문에 전경련이 헌법개정과 관련해서 헌법개정을 위한 홍보대책위원회 조직을 하고 홍보대책위원장을 김우중 대우 회장이 맡고 예산을 20억이나 확보했다는 보도가 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주영 당시 전경련 회장이 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경련 세미나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래서 세미나에 가보았더니 언론계, 학계를 포함해서 약 30명 가량이 있었다. 대부분 전경련을 옹호하는 세력이었다. 세미나 개회사를 하시는 분이 당시 서울대 정병휴라는 노교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헌법에 기업과 관련된 내용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느냐라며 나를 겨냥해 빈정되는 듯한 말을 했다. 한 마디 할까 하였는데 당시 내 나이가 불과 40대 밖에 안 되었고 노인에게 불경하게 할 수 없어서 꾹 참았다.
세미나에서 자본주의 논쟁을 한참을 했는데, 내가 기업이 제멋대로 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니라고 설명해주었다. 스칸디나비아 식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있고, 영미식도 있고, 구라파대륙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있듯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다양하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성공한 자본주의와 실패한 자본주의의 예를 들었는데, 여기서 성공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발전 양상을 잘 분별해서 그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을 해결하여 조화를 이루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실패한 자본주의라고 설명했다.
세미나를 끝내고 점심을 먹는데 정주영씨가 나를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얘기했다. 왜 미안했는지는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짐작컨대 70년대 중반부터 내가 재벌문제에 대해 간혹 얘기를 했는데, 혹시라도 내가 헌법에 재벌들을 규제하는 내용을 넣을 것이라 생각해서 안 좋은 시선을 가졌던 모양이다.
정주영 회장과 당시 오고 간 이야기를 기억해보면, 내가 정주영 회장이 중공업으로 시작을 해서 오늘날 재벌그룹으로 성장을 하고, 전경련 회장까지 하는 것이 다른 재벌 그룹에 비해서 괜찮은 그룹이라 생각한다고 얘기를 했다. 한 가지 정주영 회장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철칙처럼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론 또 훼손시키는 일을 하는 측면도 있다고 얘기했다. 정주영 회장이 무엇이 그런가라고 되묻기에, 어떻게 중공업만 하시던 분이 갑자기 소매업을 하느냐라고 얘기했다. 소매업이라는 것이 소규모 자본을 가지고서 자기 생계를 영유하는 사람들이 많은 업종인데, 자본주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이런 소규모 자본을 가지고 생계를 영유하는 소매업자들이 많아야 안정적으로 유지되는데 정회장이 소매업까지 손을 대니 이런 소매업자들이 다 죽는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정주영 회장이 자기가 소매업을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라고 묻기에, 현대백화점이라는 것이 소매업이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의 입장에서 현대백화점을 팔아버리는 것이 어떠냐고 얘기해보았더니, 다른 재벌이 안하면 정회장 자신도 안하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사실 이는 그냥 계속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웃음).
이후에 전경련 헌법 개정에 대한 홍보대책위원장인 대우 김우중 회장을 만나서, 도대체 전경련이 왜 이렇게 헌법 개정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느냐라고 물었더니, 내가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와서 혹시라도 독일의 상황과 같이 근로자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의사공동결정권 같은 것을 헌법에 입안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 때문에 그런다는 것이다. 사실 의사공동결정권 같은 것은 당시 생각하지도 않았고, 헌법조문이 될 수도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은 헌법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할 테니, 쓸데없이 홍보대책위원회 같은 것 만들어서 소란만 일으키지 말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난 후 전경련이 잠잠해졌다.
이후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꼭 넣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은, 향후 재벌이 법률과 언론을 장악한 상황 속에서 보수적 판사들이 판결을 내린다면 정부가 국가 운영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제대로 취할 수 없게 된다. 혹 취한다 해도 이것이 재벌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헌법재판소에 제소하고, 또 이것이 위헌이 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조항을 넣은 것이다.
사실 경제민주화 조항이 경제인들이 실제로 경영하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그런데 아직도 전경련은 틈만 나면 이 조항을 없애고 싶어한다. 이는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이 있으면, 그것이 공공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라고 해도 언제든 헌법재판소로 달려가겠다는 의사를 반영한 것 아닌가. 앞서 이야기했던 루즈벨트 대통령 때 경제세력들이 위헌 소송을 통해 농업조정법, 국가산업부흥법(NIRA)등을 못하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지난 2008년 세계금융위기 발생 이후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정부가 일정한 규제를 가하지 않으면 시장경제 자체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경제민주화 조항을 삭제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불순한 동기가 아니고서는 달리 생각해 볼 수 없다.
정치경영연구소: 한국사회의 20~30년을 내다본 것 아닌가?
김종인: 자본주의 발달사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더군다나 미국이라는 큰 예가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면 미국이 남북전쟁이 끝난 후 링컨 대통령이 앞으로 미국의 큰 위험은 무절제하게 자라나는 경제세력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역사적으로도 19세기 이후에 계속해서 경제세력이 문제가 되었는데 20세기 초까지 제대로 된 조치 없이 흘러가게 된다. 20세기 초에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고 진보적인 정책이 시작된다. 대표적으로 1890년에 시장의 효율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독점규제법인 셔만 반독점법(존 셔만)이 제정되었다. 셔만법 제정 당시에는 법 자체로 큰 이슈가 되지 못했지만,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임기 당시 트러스트 형태로 들어오는 대기업들을 셔만법으로 견제하면서 큰 이슈가 되었다. 나아가 독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스탠다드 오일의 독점을 해체했다. 그때부터 미국의 경제구조에 변화가 시작되는데, 윌슨 대통령 때 더 강화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때는 보다 더 강화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시기는 뉴딜을 통해 오늘날 미국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다른 국가의 역사와 흥망성쇠를 많이 공부해야 한다.
재벌들의 위치가 사회경제적으로 막강해지는 상황에서 이것을 보지 못하는 경제학자들은 사회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경제학자는 의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의사는 환자의 병력을 조사하고 진단해서 정확한 처방을 내려야 한다. 또 앞으로의 건강에 대해서도 예측하고 예방하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다. 경제학자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을 하는 사람이 현상만을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제상황에 따라 나라가 어떻게 가야할 것인지 생각을 하고 대비를 시켜야 한다. 지금껏 한국경제에 대해서 내가 얘기한 것대로 안되어야 하는데 자꾸 그렇게 되어버려서 이제는 얘기를 그만해야겠다라고 생각도 한다.(웃음)
IMF 외환위기l 같은 경우도 그냥 온 것이 아니다. 90년대 초부터 재벌들에게 무한한 투자여력을 보장해주고, 모든 규정을 재벌들 편의대로 하다 보니, 과잉투자, 과잉부채가 드러나고 이러다보니 IMF로 가는 첩경이 된 것이다. 경제정책이라는 것이 환율이나 이자가지고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사회적이라는 말과 사회주의적이라는 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김종인: 내가 독일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나를 사회주의자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런가? 독일이 social market economy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시장경제이지 socialistic market economy, 즉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아니다. 이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신자유주의를 잘 모르는데, 신자유주의의 본산은 1947년 밀튼 프리드먼과 폰 하이에크가 제네바 호수 근처 파크호텔에서 몽페레린 소사이어티를 창설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모임의 참석 멤버가 200명 가량 되었는데, 이 200명 중에 1948년 이후에 독일의 경제질서를 만든 사람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2차 대전 후, 시장경제를 가장 충실히 실현해 나간 국가가 독일이다. 독일이 시장경제를 실현해 나가면서 social(사회적)이라는 말을 넣은 이유를 보면, 시장경제를 확고히 운영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가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인지하고 그것을 정부가 해결해야한다는 취지로 볼 수 있다. 이런 부분을 정부가 해결하지 않으면 시장경제 자체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무정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라는 것이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인데,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안 되는 일들도 많다. 이것을 해결해야하고 이것을 내버려둬서 비사회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시장경제 자체가 깨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작지만 경제세력과 이익집단 위에 있는 강력한 정부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몽페레린 소사이어티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독일이 2차 대전 후에 사회주의 경제를 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독일의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은 인풋-아웃풋(input-output) 모형도 거부한 사람인데, 그 이유가 다 계획경제적 요소가 있다고 해서 거부한 것이다. 독일이 2차 대전 후에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폈다고 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 다시 말해 독일은 사회주의 경제를 한 것이 아닌, 사회적 시장경제를 한 것이다.
정치경영연구소: 1990년 5.8조치를 통해 90년대 유례없는 부동산 시장 안정을 가져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경제정책을 펴는데 그 과정은 어떠했는가?
김종인: 88올림픽 이후 1989년부터 부동산이 꿈틀대면서 1년 내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증권 시장도 폭등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이 90년대 들어와서 더 심해지니까 부동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불이 난 거다. 그렇게 한국의 부동산에 불이 붙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을 하시는 분들이 불 끌 생각은 하지 않고 불을 끄는 방법론을 굉장히 오랫동안 이야기하더라. 그러면 다 타버리는 수밖엔 없지 않느냐. 그런데 왜 그렇게 불 끄는 방법론을 오랫동안 이야기하게 되냐면 이 부동산 가격이라는 것이 대기업의 부동산 투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규모 큰 부동산을 사는 사람이 없어야 부동산 가격이 안정이 되는데, 대기업들이 땅을 몇 십만평, 몇 백만평씩 사들이는거다.
한국이 1986년서부터 1989년까지 국제수지 흑자가 330억불 정도가 되었다. 그 중에서 130억불 이상이 부동산 투기로 들어갔는데, 이 정도 규모는 일반 개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한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기업들의 투기로 오르니 소위 말하는 개미들도 따라서 부동산 투기를 하게 된다. 이것이 사회문제화가 되어 부동산 문제가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니까 경제관료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였는데, 문제는 불끄는 방법론을 이야기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는 거다. 첫째로는 어떻게 문제를 풀지 방법을 모르는데다가, 부동산 대책을 하는 나라는 한국 밖엔 없다. 기본적으로 부동산은 금리가 싸고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면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것으로 선진국 경제에서는 정평이 나있다. 선진국에서는 금리로 부동산을 조절하려했는데 금리만으로 조절이 안 되니까 결국 부동산 시장 안정에 실패하게 된다. 한 예가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맞은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아일랜드 같은 국가들 경우다. 이 국가들은 다 부동산 투기에 열중하다가 최근 재정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부동산 투기억제를 위해서 스스로 만든 개념이 하나 있는데, 토지공개념이 그것이다. 그런데 토지공개념이라는 말을 만든다고 부동산 가격이 잡히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토지공개념이 무엇을 뜻하냐고 당시 해당부처 장관에게 물어봤더니, 토지공개념이라는 것이 세금으로 부동산을 잡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재화의 종류에는 사유재와 공공재가 있고, 그리고 공개념적인 재화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토지는 그 공개념적인 재화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인데, 공개념적인 재화라는 것은 사실 경제학 용어에 없다. 그런데 토지공개념이란 것을 만들어놓고서, 뭐가 토지공개념이냐고 물어보니까, 세금으로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세금으로 잡을 것인지 물었더니, 당시 종합토지세, 택지상한지세, 택지초과이윤세 이 세 종류의 세금을 만들어서 부동산 값을 잡겠다고 했다. 나는 당시에 세금으로는 부동산 가격을 절대 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부동산을 아무리 많이 사도 문제가 안 되는 것이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고 또 세금을 부과할 시기에는 약간의 충격이 있을 수 있지만 세금을 전가시켜 버리면 사실상 정책적으로 아무런 효과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를 샀는데 아파트에 세금을 많이 부과하면, 그만큼 값을 더 받으면 된다. 원래 세금이라는 논리가 그렇다. 세금으로 부동산을 잡겠다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당시 상황에서도 기업이 부동산에 대한 수요를 일으키니까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는 것인데, 기업이 소유한 부동산에 세금을 부과한다고 해서 기업주가 세금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세금은 기업이 부담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주는 세금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역사적 사례가 있는데, 1920년대 영국의 부동산 가격이 올라 당시 영국 정부가 세금으로 부동산 가격을 조절하려 했다. 지주들의 부담이 커지니 지주들은 망하게 되고, 금융 산업 자본이 결국 부동산을 다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영국은 부동산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결국 재벌들이 구입한 부동산에 세금을 부과해 부동산 가격을 조절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조절될 수가 없다. 여기에는 한국 경제관료들의 문제 또한 투영되는데, 그들의 문제는 재벌들에게 불이익이 가는 조치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 관료들이 공직을 그만두게 되면, 이후에 신세지고 사는 것이 재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1990년 3월 19일에 경제수석에 임명되었는데, 해야 할 정책들을 사전에 준비해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대통령에게 건의를 해서,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의 5대 재벌 총수를 불러 저녁을 함께하시라고 건의드렸다. 그 때 5대 재벌 총수에게 전달할 내용을 대통령께 드렸는데, 핵심 요지는 한국에서 재벌들이 많이 성장했으니 한국 사회의 안정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으며, 재벌들로 인해서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는 일은 앞으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즉, 앞으로 부동산을 사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얘기를 했는데, 총수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또 다시 상기를 시켜줬으면 좋겠다싶어 총리에게 재벌들을 한 번 만나주시라 다시 부탁을 했다. 이후에 총리에게 전화가 왔는데 자기는 힘이 없는 것 같더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총리가 부르니 재벌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안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세력이 벌써 정치세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때가 노태우 정권 3년차였다.
그래서 10대 그룹 기조실장들을 내가 직접 불러 대통령이 당신네 총수들을 불러 얘기한 내용 전달받았냐고 물었더니 기조실장들이 총수한테 들은 바가 없다고 얘기했다. 대통령이 얘기한 것들이 싹 무시된 것인데, 그래서 기조실장들에게 피차 나중에 얼굴을 붉히지 않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각자 돌아가 총수들에게 물어봤을 것이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 같으니 총수들도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협의를 요청해왔다. 그래서 나를 보좌하던 경제수석실의 비서관이 10대 재벌 기조실장들과 모여서 재벌 부동산 자진매각을 추진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10대 재벌 부동산 1800만평 자진 매각이었다. 그러니까 투기dm 원천을 봉쇄해야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그 원천이 재벌의 부동산 과다 보유였다.
10대 그룹이 솔선하여 보유 부동산을 자진 매각한다고 하니까 30대 재벌들도 동참하겠다고 해서 자진 매각규모가 크게 된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팔려고 해도 사는 사람이 없으면 못하는 거지 이런 식의 배짱으로 재벌들이 자진 매각을 하겠다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국가가 그 동안 토지를 너무 많이 팔았으니 국가가 사들이겠다고 해서, 현금으로는 줄 수 없고, 5년짜리 채권으로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토지 일부는 국가가 사들이고, 일부는 재벌들이 기분이 나빴는지 대학들에 기증도 했다. 그렇게 기업들의 토지 수요는 없고 공급이 늘어나니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 당시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정책이라는 것은 간접적 방법으로 해서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직접적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경제정책의 하나 수단이다. 나에게 초법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진해서 했는데 무엇이 초법적인가.(웃음)
정치경영연구소: 정치인, 정책가에 대해서
김종인: 무슨 자리든 간에 자리를 욕심만 낼 것이 아니라 철저히 준비를 해야 된다. 공직을 하는 사람들이 내가 저 자리에 들어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철저히 준비하지 않고 공직을 수행 한다는 것은 국민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정책을 하려면 사전에 심사숙고해서, 여러 가지 사례를 검토해야하고, 정책에 대해서 자기 확신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자기 확신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면 겁날 것이 없다.
그리고 내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의 실험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과 사회가 실험의 대상이기 때문에 굉장히 용의주도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정책 하나를 잘못해서 대한민국의 수천만명이 고통을 받으면 그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의식이 없다. 그 예로 정책실패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형벌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은 무능은 형벌로 다스릴 수 없다는 말과 똑같은데, 그럼 그 사람들이 무능한 것을 시인하느냐, 그것을 시인도 안한다. 자기가 잘했다고 오히려 주장하고 있다. IMF사태 이후가 그런 것 아니냐. IMF 이후 법원이 정책은 형사로 다스릴 수 없다라고 해서 무죄를 선고하였는데, 그래도 그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책임은 느껴야 할 것 아닌가. IMF 사태 이후로 수많은 국민이 고통을 받았는데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정치를 해서도 안 되고, 최종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해서도 안 된다.
정치경영연구소: 정책을 펴는데 있어서 정책가라 함은 어떠한 자질이 요구되나?
김종인: 그 분야에 전문지식, 예컨대 정책가가 경제학 지식을 가진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경제정책이라는 것은 경제이론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정책가는 가치판단을 잘 할 수 있어야하고 또 집행능력을 가져야 한다. 단순히 경제지식이나 행정능력만을 가지고서는 경제정책가가 될 수 없다. 한국의 경우 행정능력만을 가지고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것이 통례인데, 상황이 변함에도 불구하고 변화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정치경영연구소: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바라는 후보상과 그 후보가 어떠한 정책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김종인: 경제 자체는 이제는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싫던 좋던 간에 그 동안에 많이 성장했다. 경제구조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졌기 때문에 정부가 일일이 관여할 때는 지났다. 정부는 이제 시장경제에서 파생되는 결과를 어떻게 조화를 시키느냐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70~80년대 경제정책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시장경제가 파생시킨 문제, 양극화와 같은 문제를 해소시켜야 하며, 양극화를 해소하지 못하면 결국 사회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불안한 사회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경제정책은 시장으로부터 파생된 문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해결해서 한국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느냐에 맞추어져야 한다. 대표적으로 저출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음 대통령에게 바라는 바는,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 사이에 역동적 균형을 맞춰나가는, 이런 부분에 지식도 가지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경제가 변하면 사회 자체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사회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일본의 경우 80년대만 하더라도 세계를 지배할만한 경제력이 있다고 하였는데, 90년대 이후 그 한계가 드러났다. 국민은 훌륭한데 정치는 무기력한 상황이 근래 일본의 상황이라 하는데 그 이유가 정치가 재계의 편의대로 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부 자체의 기능을 충실히 실행할 수 있는 강한 입장을 지속적으로 견지할 수 있어야 하므로 경제세력과 각종 이익집단 위에 보다 상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정직한 사람, 사전에 한국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을 하고, 이 인식을 바탕으로 준비를 철저히 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 5년 임기가 짧지가 않다. 대통령 되고나서 그때부터 공부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통령은 대통령 되기 전 지식이 전부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더 이상 배울 수도 없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런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대통령이 되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정치경영연구소: 자유주의에 대한 생각과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김종인: 자유주의 논쟁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한다. 자유라는 것을 흔히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해 볼 때, 경제정책 최고의 목표는 가급적 물질적 자유를 극대화시켜주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이 길을 가다, 빵을 보았을 때 빵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향상시켜주는 것이 경제정책을 하는 사람들의 최상의 목표다. 경제정책에서 물가안정이니 환율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목표의 하위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경제정책의 최대의 목표도 곧 자유이다. 즉 물질적 자유의 극대화라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는 이렇게 볼 수 있는데, 모든 사람에게 제약이 없는 자유를 준다는 것인데, 이는 자유 자체에 침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법을 지켜야한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사회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끄는 나라들을 보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자유를 어느 정도 속박을 한다. 자기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기업에게 지나치게 사회적 책임을 지라는 것도 제대로 된 요구는 아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만을 지게 되면 이윤의 개념이 없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다. 기업의 입장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법과 그 사회의 관행을 지키면서 이윤을 최대로 많이 내는 것이며, 그러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야 세금도 많이 낼 것 아닌가. 법은 모든 기업이 기본적으로 잘 지켜야 한다. 그러면 이윤공유제 같은 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법을 지키지 않고 결과만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공정거래법도 철저히 지키고, 하도급법도 철저히 지키면 중소기업, 대기업 동반성장이라는 말도 필요가 없다. 법을 잘 지켜나간다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하지 자유라는 말만 쓰게 되면 애매모호하다. 그러면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이 자유인가? 자유라는 것은 현실적 감각으로 인식해야하는 것이다.
정치경영연구소: 최근에 관심을 갖게 된 주제나 이슈는?
김종인: 요즘 관심이 가는 분야로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며, 양극화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해 고민 중이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갈 것인지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 사회라는 것이 그대로 두면 조화가 안 된다. 그래서 조화된 사회라는 말을 쓴다. 흔히 조화로운 사회라는 말을 쓰는데, 사회는 스스로 조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조화된 사회를 이루려면 한국 사회 현재의 여건을 잘 알아야 한다. 각종 이익집단이 생기고, 이들을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이 집단들이 어떻게 잘 공통분모를 이루느냐 하는 문제에서부터 정부가 고민을 해야 한다. 정당도 같은 맥락에서 노력해야 한다.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이 역동적 균형을 이루려면 결국 사회 안정의 조건과 경제발전의 조건부터 성립되어야 가능하다. 사회 안정이라는 것이 경제발전을 통해서 이루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복지라는 것은 사회 안정을 위한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하다. 정부가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이런 균형을 잡기 위해 잘 활용하고 방안을 도출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대선후보들이 이런 것을 얼마만큼 공약으로 약속을 하는지 유심히 보고 있다.
정치경영연구소: 어린 시절과 청년기, 성장과정은 어떠하였나?
김종인: 어린 시절은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 아주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여러 가지 향유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세 끼 밥 먹고, 학교 다니면 그것도 다행으로 생각되던 시기였다. 여느 사람처럼 나는 고생을 많이 하고 산 사람은 아니다. 집안 환경이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어린 시절에 영향을 많이 미칠 수밖에 없는데, 할아버지께서 좀 유별나신 분이기 때문에, 나라와 정치에 관련해서 어려서부터 많이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선거에 관심이 많았다.(웃음). 우리나라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국회의원 유세장을 빠지지 않고 다녔다. 유세장을 다니면서 될 사람, 안될 사람 식별을 하고 다녔다.(웃음) 한국의 근대사를 잘 알게 된 계기가 이런 경험에 바탕한다.
기억에 남는 것으로, 56년 이승만, 신익희 대통령 선거에 처음으로 경제구호가 나오게 된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것이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 이후 군에 갔는데, 4.19가 터졌다. 요즘 공직자 병역문제로도 시끄러운데, 병역이라는 문제는 자기 자신과 집안에 분위기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아버지가 4살 때 돌아가셨는데, qnqn선망독자였고 법적으로 군대 안 가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 할아버지의 교육이 남자로 태어나서 국방의 의무를 안 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신체검사도 안 받고 자원해서 군대를 갔다. 생각해보니 세상이라는 것이 요령껏 사는 사람이 많으면 나라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요령껏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실체가 드러나게 돼있다. 61년 5 · 16이 일어나고 군사통치가 진행되다가 63년에 처음으로 민간인 정치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때 할아버지께서 박정희 대통령의 공화당에 대항하는 야당을 우리집에서 만드셨는데, 62년 12월 그 무렵부터 정치 심부름을 다녔다. 정치를 하려고해서 했던 것이 아니고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1년 동안 정당의 생리를 그때 많이 배우고, 정치인의 행태, 권력자와 야권의 관계도 경험을 하게 되었다. 책과 돈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을 그 때 많이 배웠다. 할아버지께서 63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64년 초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자마자 독일로 유학을 갔다.
학부 때부터 독일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한 가지 편한 것이 한국에 경제학 선배나 스승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은 선배나 스승의 얘기가 틀려도 선배이고 스승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박하기가 힘들다. 이런 것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어서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는 무엇을 해야 한국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공부를 했다. 유학생활에 힘든 점은 특별히 없었고, 내 성격 상 지도교수들과 많이 다퉜다(웃음). 졸업 무렵 한국에 유신이 시작되었는데 지도교수가 권위주의 체제에서 살기 어려울 텐데 독일에 더 있다가 한국이 변화하면 가라고 했다. 그 때 편히 살려 독일에 온 거 아니다라고 말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나오기 전에 우연찮은 계기로 서강대 재정학 교수 자리가 있다고 해서, 마침 내 전공이 재정학이라 73년에 서강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한국이 60년대 말까지 2차 경제개발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나가고 3차로 넘어가는 단계에 돌아왔는데, 이때에는 한국에 적용될 정책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래서 비교적 일찍부터 정부정책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76년 중산층을 위한 재산형성저축제도와 77년 도입된 근로자 사회의료보험 도입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 후 이런 저런 계기가 되어서 80년에 정치에 뛰어들게 되었다.
다음 대통령 될 사람이 진짜 좋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봉사를 해 줄 용의가 있다. 그동안 대통령 출마하고 싶은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내가 조언을 해주는 정도에 머물렀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딱 마음에 들고, 이 사람이 되면 참 나라가 잘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면 적극적으로 자원봉사 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내 나름대로 구상한 것을 줄 것이다. 받아주고 안 받아주는 것은 당사자 마음인 것이고(웃음).
대한민국 국민들이 굉장히 깨어있어서 흔히들 좌파, 우파, 보수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서를 제대로 판단을 못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된 것이 한국에 좌파가 많아서 된 것이 아니고 이명박 대통령이 된 것도 우파가 많아서 된 것이 아니다. 다음 대통령 나올 사람도 이런 것을 착각하면 안 될 것이다.
정치경영연구소: 한국에 바람직한 경제 롤 모델이 있다면?
김종인: 한국도 나름의 정치경제모델을 정해야하는데 아직 못 정해서 문제다. 예를 들어 영미식이냐 스칸디나비아식이냐, 독일식이냐, 일본식이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하고 실정이 맞지 않고, 여건이 다 다르다. 사회구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서 한국형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통령은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최소한 다음 기회부터는 이런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런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대통령 후보를 찾고 있다. 다음번 대통령이 이 모델을 제대로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 사람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에 박정희 대통령 이후에 성공한 대통령이 없는데 그 이유가 있다. 간단한 이유인데, 권력과 물질에 탐욕, 그리고 주변의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이다. 또 이익집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인데, 특히 경제세력이나 이익집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다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 가지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람을 다음 대통령으로 찾아야 한다.
처칠이 얘기한대로 한 나라의 지도자는 세계사, 각 나라의 흥망성쇠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변하는 상황에 어떻게 제대로 된 정책을 조합해서 문제를 풀 것인지가 필요하다. 일단 한국은 대통령만 잘 뽑으면 된다.(웃음)
정치경영연구소: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
김종인: 할아버지(가인 김병로)다. 내 할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이 양반의 삶의 과정을 놓고 보았을 때 세상에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인데 이렇게 살고 간 분이 계시다는 것이 기억에 남고 존경한다.
가인 김병로,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호는 가인(街人). 우리나라의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한 후 191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916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조교수, 1917년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거친 다음, 1919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이 기간중 조선변호사협회 회장과 조선인변호사회장을 역임하면서 왕성한 법정투쟁을 하였다. 3·1운동 사건을 비롯하여 단천사건, 간도사건, 정의부사건, 광복단사건, 105인사건, 흥사단사건, 안창호사건 등 매년 100여 건에 달하는 변론으로 독립투사 구출에 진력하였다. 또한 민족정기 앙양과 인권옹호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북풍회(北風會)의 창설을 비롯하여 이상재·안재홍 등과 함께 신간회에 관여하여 직접적인 민족해방운동에 나섰다. 1945년 한국민주당의 대표총무위원을 지냈고, 이듬해 남조선 과도정부의 사법부장, 정부수립 이후에는 초대 대법원장 겸 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 법질서 확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55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62년에는 문화훈장 대한민국장과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국민당을 창당하는 등 재야 정당통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항상 후배 법관들에게 청렴과 강직을 강조한 그는 소신있는 법관, 강직한 공인으로서의 자세를 철저히 지켰으며, 해박한 법률지식의 소유자였다. <출처-브리태니커> |
김종인: 독일에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이란 사람이 있다. 에르하르트의 확신과 소신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독일경제는 없었을 것이다. 패전 후 독일 경제를 맡았던 영국, 미국 사람들이 독일로 하여금 자유시장경제를 못하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확신에 의해 담판을 져가면서 관철시켜 나갔다. 그래서 오늘날 독일 경제 질서를 확립시켰다.
정치경영연구소: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
김종인: 젊은 사람들이 너무 일시적인 쾌락에 도취되지 말고, 정치를 백안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정치를 굉장히 백안시하는 경향이 큰데, 결국 좋든 나쁘던 간에 정치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여의도를 무시해도 결국 여의도 국회라는 곳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곳이다.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은 소시적부터 다른 유혹에 좌우되지 말고 그 방향으로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해야 나라가 잘되는 것이지, 젊은 세대가 그것을 포기하면 나라 장래가 암담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쓸데없는 것이다는 생각을 제발 안했으면 좋겠다. 사회에 대한 좋은 생각들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
영국의 대처 같은 사람도 옥스퍼드에서 화학공부를 하고 식품회사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이것이 도저히 적성에 안 맞아 다시 옥스퍼드 대학으로 돌아가 법률 공부를 했다. 여성운동의 뜻을 가지고 50년대 말(당시 34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하이에크의 '노예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안고 다니며 열심히 경제공부를 했다. 처음부터 수상이 되려고 정치를 한 것이 아니지만 결국 수상까지 하게 됐다.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를 실시한 대처리즘이 비판을 받지만, 영국병에 시달리고 있는 자국에 과감한 시장주의 경제를 도입하여 이를 개혁해 나가고자 한 것은 높이 평가를 받는다. 요지는 젊은 시절에서부터 국가, 사회에 문제의식을 갖고 정치에 입문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정치를 포기해선 안 된다.
인터뷰 및 정리: 김남수, 김경미, 양태성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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