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가도 안 보이고 깜깜한 도로에는 7, 8분 동안 지나다니는 다른 차가 하나도 없었다. 일행은 우리 두 동행인뿐이었는데, 아무 말도 안하고 약간 긴장해서 그곳을 지나쳤다. 자동차 불빛에 언뜻 보이는 고총들은 어둠 속에 비밀과 함께 감춰진 듯 보였다.
▲ 영천-경주간 4번 국도 양옆에 있는 금척리 고분군. 이중 어디 박혁거세 임금의 금척이 묻혀있을까? 2차선 도로에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날 뿐 한가한 이곳은 관광객에게 많이 알려진 장소가 아니다. 사진 이순희 |
그것은 야간 조명을 환히 밝혀 화려하게 보이는 경주 시내 대릉원의 무덤들과는 달랐다. 그후 금척리 고분군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됐을 때 밤에 지나던 앗찔한 기억은 추억이 되어 이곳에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단군고조선 부루단군 때도 있었고 박혁거세 임금이 지녔다던, 국가 통치권의 상징 금자(金尺)가 이곳 고분들 중 어느 하나에 묻혀있었다는 것이다. 금척과 옥적, 그리고 선덕여왕이 지녔던 화주(火珠; 태양으로부터 불씨를 얻는 수정 돋보기)를 두고 신라의 삼기(三奇) 또는 삼보라고 한다. 옥 허리띠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박혁거세의 금척이야기는 신라 눌지왕때 정치가 박제상이 지은 역사책 「징심록」에(주; 「징심록」 전체 원본은 소장자 박제상의 후손 집안이 6.25때 북에 두고 온 이후 전해지지 않음. 「징심록」을 구성하는 15지중의 제1지인「부도지」만 후손 박금씨가 복원해 1986년 김은수역으로 출판됐다) 처음 나온다. 박혁거세가 '금척과 옥적의 이치를 따라 다스렸다.'고 했는데, 박제상의 아들 박문량(백결선생으로 널리 알려진 거문고음악가)이 후일「금척지」란 글을 써「징심록」에 덧붙여 한 책처럼 언급된다. 「금척지」또한 전하지 않지만, 일차적으로 모두 도량형 기능을 하는 금척과 옥적이 뭔가 중요한 제왕적 일인가 보다 하는 인상을 준다. '금척으로 죽은 사람도 살리고...' 라는 표현은 의료에 관련된 도량이야기는 아니었을까.
금척에 관한 철학적이고 미묘한 수리(數理)는「징심록」과「금척지」를 읽은 조선초 지식인 김시습의「징심록 추기」에 있다. 경주의 다른 이름, 동경(東京)에 관한 조선중기의 인문지리서「동경잡기」에도 박혁거세의 금척이 어떻게 고분 속에 묻혔는지 그 전말이 나온다. 금척을 탐내는 중국에게 "땅이 크다고 교만한 외국에 국가의 보물을 내줄 수 없다." 하고 조정의 의견을 정해 안 뺏길 방책을 생각, 땅에 묻고 똑같은 무덤을 여러개 만들어 감춰버렸다. 후일 금척을 파내려는 소정방의 무력시위에도 "공사한 사람이 죽어 어느 무덤에 묻었는지 모른다. 못 주겠다." 고 버티는 모습이 그림같이 보인다. 중국을 제껴버린 외교였다.
▲ 금척리 고분군에는 봉분이 뚜렷한 무덤옆에 납작해진 무덤까지 30여 고분이 남아있다. 쓸쓸한 장소지만 드라머틱한 금척 이야기가 역사의 뒷면을 관통해 길게 이어진다. ⓒ이순희 |
신비로운 것은 금척의 존재에 대해 오직 박제상의 집안만이 알고 대를 이어가며「징심록」과「금척지」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삽량태수 박제상은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으며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내물왕 사후 실성왕이 어린 조카 눌지의 왕좌를 빼앗고 아우인 복호와 미사흔은 고구려와 왜국에 인질 보내 후환을 없이하고 왕위에 올랐다. 박제상 등이 나중에 실성왕을 내쫒는 반정에 성공, 눌지왕에게 왕위를 찾아주었다. 그는 눌지왕 즉위 후, 고구려에 가있던 왕의 동생 복호(혹은 복해)와 왜국에 가있던 미사흔(혹은 말사흔, 미해)을 구해 내는 임무를 맡아 해내고 자신은 왜왕의 신하되기를 거부하다 죽임 당했다.
「징심록」을 남긴 박제상에겐 금척의 존재나 고대사의 내력같은 특별한 국가적 정보를 보존할 지킴이의 중책이 주어졌던 것 같다. 이를 엄중하게 지키는 일이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집안 대대의 운명이 되었지만 이때가 되면서는 이미 금척의 법에 대한 해득이 불가능해진 때였다. 세조때 험악한 폭력 정세가 되자 후손은「징심록」과「금척지」두 책을 가지고 강원도 김화로, 더 나중에는 함경도 문천으로 숨어들어가 살고 그후 6.25로 종손조차 찾아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북한 영해 박씨 집안에 혹시라도 그 유물이 온전히 전할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시습은 박제상이 구해온 왕자 복호가 그의 선조인데다 어려서 이웃 살던 박제상 종가 인물을 스승삼아 수업받아 이들과 인연이 깊었다. 그는 1455년 단종 폐위를 겪고는 세종이래 주어진 벼슬을 버리고 김화로 들어가는 박효손을 따라가「징심록」과「금척지」를 읽고「징심록 추기」라는 글로 금척에 관한 유래와 형상, 논평 등을 기록했다. 다음은 그 책에서 인용한 금척관련 글의 일부이다. 김시습의 글을 굳이 인용하는 것은 최고의 지식인인 그의 기록이 대중적인 설을 넘어 신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이다.
"사록에 의하면 혁거세왕이 미천할 때에 신인이 금척을 주었다고도 하고, 금척과 옥적이 칠보산에서 나와 혁거세왕에게 전해졌다고도 한다. 칠보산이 만일 백두산 아래 명천부에 있는 것이라면 이는 반드시 옛날의 일이리라. 금척의 법이 또한 단군의 세상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혁거세왕이 13세의 어린나이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것은 그 혈통의 계열이 반드시 유서가 있었기 때문이며 금척이 오래된 전래물 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 박혁거세가 처음 등장한 나정의 발굴현장. 조선 순조때 세운 유허비와 석재들이 한군데 쌓여있다. 김시습은 혁거세가 금척을 지닌, 단군으로부터 유래된 혈통이기에 어린 나이에 왕으로 추대됐으리라고 한다.ⓒ이순희 |
금척의 법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오직 박제상의 집에만 전해졌는데 이는 반드시 파사왕(5대 신라임금. 박씨)이 전했기 때문으로, 이 집안에 내려오는 금척 전설이 많아도 후손들은 엄중하게 비밀에 부쳐「징심록」을 세상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금척의 소재는 박문량의「금척지」에도 밝히지 않았다. 사록에 의하면 이미 박혁거세 때에 금척을 땅에 묻고 38개의 언덕같은 무덤을 같은 장소에 만들어 감추어 버렸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후 당나라가 계속 신라마저 침범하려고 출병했으나 신라국경의 바다에 닿을 때마다 일기가 괴상하여 군사들이 병들고 군세가 약해져 매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니 당나라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사신이 와서 신라에 무슨 신기한 물건이 있어 그런 것인가 살피고 갔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금척리 일대를 파내므로 어떤 사람이 이를 감춰가지고 후일 금강산으로 들어가 깊이 감춰버렸다고도 하니 이 또한 기설인 것이다.
기타 신라 때의 허다한 금척관련 기설이 뒤섞여 그 진위를 가려낼 여유가 없음이 애석할 따름이다. 옥적은 이미 땅속에서 나왔으니 금척도 다시 나타날 때가 있는 것인가."
▲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 기타 왕들 셋이 묻혀있는 경주시내의 오릉. 넓은 구역안에 능다섯기가 한자리에 모두 모여있어 곡선의 흐름이 한눈에 보인다ⓒ이순희 |
김시습은 "지금 박제상의 종가 일을 보는 후손도 사라지고 여러 집이 흩어지니 ... 금척의 수리(數理)를 풀어볼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었다. 내가 일찌기 「금척지」를 읽었으나 그 수사가 매우 어려워서 알 수가 없었다.
금척의 근원이 매우 멀고 그 이치가 매우 깊숙하다. 형상은 삼태성이 늘어선 것 같으니, 머리에는 불구슬(火珠)을 물고 네 마디로 된 다섯치 길이다. 그 허실의 수가 9가 되어 10을 이루니 이는 천부(天符)의 수이다. 대저 그 근본은 곧 천부의 법이다. 그것을 금을 가지고 만든 것은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요, 자로서 제작한 것은, 다 같이 오류가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략)
금척의 소재와 척도의 측법을 비록 지금 알 수 없으나, 「금척지」만이라도 남아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만일 후인이 연구하여 아는 자가 있게 된다면 어찌 금척을 복제할 길이 없을 것인가. 만약 복제하지 못하더라도 그 법리를 알면 족할 것이다." 라고도 썼다(박금, 김은수 지음 「부도지」에서 인용).
흥미로운 것은 고려때 현종도 이 금척을 두고 강감찬으로 하여금 박제상 후손을 찾아보도록 했고 이성계의 조선건국과 세종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태조가 꿈에 금척을 보고 난 뒤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심했다는 언급이 '용비어천가'에도 있다고. 세종대왕은 박제상의 집안을 두루 구제해 성균관 옆에서 살게 하고 병조판서 벼슬을 주었지만 이들은 얼마 안 가 서울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김시습은 "이 법이 역대 우리나라에 공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태조가 꿈에 금척을 얻은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세종대왕이 박제상의 후손들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인 것은 당연한 바가 있으니, 하물며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징심록」에서 취했음에랴."고 했다. 고대 한글의 원형이라는 가림토 이야기가 여기서도 나오는 것이다.
평범한 생각으로는 '자 같은 도량형은 일찍이 제왕의 도구이기도 했겠다.'는 발상밖에 더 나오질 않는다. 옥적도 기장 쌀알을 갖고 계산하는 도량형의 구실을 했다고 들었다. 도량형에 대해선 현대에도 국제표준 운운 하는 기구도 있을만큼 중히 다뤄진다. 도량형은 경제내지 국가의 부에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경상북도 상주에는 은척리 라는 곳이 있다. 어떤 사람 말로는 지방호족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은 은척이고 중앙 임금의 권력을 말하는 것은 금척이어서 금척은 경주에 있고 은척은 상주에 묻혀 지명이 남았다는 것이다
▲경주 기림사에 있는 김시습 초상. 박제상의 후손과 깊은 친분을 맺었던 그는 징심록과 금척지를 읽고 금척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순희 |
그런데 지난 11월 경복궁 고궁박물관에서 '베트남 마지막 황실의 보물' 전시회가 있어 가봤었다. 놀랍게 거기에도 왕의 도량형으로으로 자가 하나 나와 있었다. 1미터 길이의, 검은 옻칠을 한 나무 재질의 화사한 자개 무늬를 박은 고상한 자였는데 평면적이지는 않고 도톰한 각목처럼 두께가 있는 것이었다. 여기엔 주척(周尺) 등 3가지 척이 새겨져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쓰던 자는 그럼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도 덩달아 생겨났다. 일반의 반짓고리에 담겼던 화각자, 자개자, 금은 상감을 한 자 그런 것과 비슷할까? 아니면 어떤 형식을 엄격히 따른 것일까? 화주 장식이 붙어 있을까?
12월 중순 금척리에 다시 갔다. 이번엔 낮에 가까이 가서보는 길이었다. 주변 지명부터가 여간 예스럽지 않다. 건천 가까이 '알마을'이 있었다. 박혁거세의 알인가? 아무도 왜 거기가 알마을인지 모른다고 했다. 거기서 얼마 안 떨어져 모량이란 옛 신라 지명이 간판에 띄엄띄엄 나왔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김대성이 여기 출신이고 몇 명이나 되는 왕비가 나온 번화한 곳이었다가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고 피폐되었다.
근대 들어 모량마을에서 자란 시인 박목월의 글은 당시의 산천을 그대로 대하는 것처럼 아련하다. 지금은 넓은 길이 신경주역에서부터 이어진다. 후백제 군사가 들어왔던 이 길로 지금은 서울도 두시간이면 오간다. 길가엔 모량초등학교, 모량 돼지갈비집도 보인다. 금척리에 가까워지는 이런 이름들이 정다웠다.
금척리 고분군은 단석산줄기와 서형산, 구미산이 낮게 드리운 사이로 30여 고분이 2만평쯤 되보이는 벌판 평지에 흩어져 있다. 같은 평지에 쌓아올린 대릉원 고분들 보다 크기가 훨씬 작다. 그렇지만 여기 고분이 1천 5백년 이상 손보지 않은 것이라면 원래는 이보다 더 굉장했으려니 싶다. 워낙은 52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 가운데로 국도가 뚫리면서 길 양옆 동서로 분리되었다.
1952년 전란 중 대구-경주간 도로확장으로 파손된 무덤 두 기가 발굴되어 금제 귀걸이, 은제 허리띠, 곡옥 등의 유물이 나왔다. 적어도 여기 고분이 아무것도 없는 언덕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봉분이 다 깎여나가 납작해진 것도 있고 어떤 곳은 모서리 한부분만 남기도 했다. 뚜렷하게 모양새가 갖춰진 큰 무덤은 20여개 정도였고 동쪽에 몰려있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여기다 무덤을 새로 만들어 붙여놓은게 여기 저기 혹처럼 보였다. 경주 유적지를 보는 동안 이런 무덤들이 많았다.
이곳도 봄여름이면 들꽃들이 가득 피어나지만 겨울에 보니 시든 풀들은 거무죽죽하게 변해 무덤을 뒤덮고 있어 떼를 입혀 노랗게 빛나는 무덤과는 달리 어두워 보였다. 풀이 크게 자라 뱀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안에 있던 인가들은 모두 정리된 듯 무덤들만이 고요히 솟아올라 있었다.
낮인데도 길은 한가하고 벌판은 텅 비어있었다. 꾸밈없고 쓸쓸한 분위기가 좋기도 했다. 하지만 금척의 굉장한 이야기가 간직된 곳이라는 점이 이곳을 드라마틱하게 보이게 한다. 무슨 근사한 영화로 꾸며질 것 같은 상상도 된다. 그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제발 어거지같은 치정이나 중국무협영화의 아류같은 액션과 옷차림, 그런 것으로 몰아가지 말고 진지하게 한국인 고대의 정서를 다뤄줄 감독이 있다면..... 이 또한 한국의 매혹적인 인문자산이다.
낮에는 산책하기 좋고, 밤에는 주변의 도로들과 이어져 무섭게 적막한 길이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장소이다. 조명이나 현대건축 같은 문명이 덜 가해져있어 경주의 원초적인 모습이 가장 리얼하게 남아있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 알영우물이 있는 비각 쪽으로 난 오릉숲속의 길ⓒ이순희 |
경주에는 박혁거세의 유적으로 나정과 오릉이 있다. 오릉에는 그의 왕비 알영의 능과 우물도 있다. 나정은 왜소해진 반면 경주시내의 오릉은 그 넓이가 반월성 전체만 한데, 금척에 관련된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알영의 우물은 지상부분의 우물벽은 일찌감치 없어지고 땅속의 물만 남았다. 뚜껑을 덮어논 장대석 돌틈으로 물이 조금 보였다.
영해 박씨네 홈페이지에는 대마도로 제례 올리러 가는 일정이 있었다. 아마도 박제상의 제례려니 싶다. 경주와 울산 경계 치술령에는 박제상의 처가 동해 바다를 내다보며 돌아오길 기다리던 장소가 있고, 경주 남천 벌지지라는 곳은 집에도 안들리고 떠나간 무정한 사람 박제상을 그려 주저앉아 울던 장소라 한다.
▲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의 우물이 비각 뒤에 있다. 지상의 우물벽은 없고 뚜껑삼아 덮어논 장대석 틈으로 땅속의 우물물이 조금 보인다. 비각 안에는 후대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알영정이란 돌 표지석이 옆건물 연못 옆에 있어 혼란스럽다ⓒ이순희 |
금척의 전통은 이제 사라졌다고 봐야 할까? 금척이야기가 생소한 이들은 '금척이라니 금빛 플라스틱 자 같은거냐.'고 웃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단군 이래 금척이 있어, 금척을 묻은 고분이 있고 박제상같은 지킴이와 후손이 있고 김시습같은 지식인의 책도 있고 금척의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어 즐겁다. 역사가 오랜 나라라는 게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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