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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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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길

[김유경의 '문화산책']<5>

문무왕의 군사적 면모는 경주 사천왕사지와 무장사지, 그리고 경주박물관에서도 보였다. 사천왕사는 왕 생전인 675-679년, 애초부터 당나라와 신라 간의 전쟁을 담당하는 중요한 전초기지로 지어졌다. 이 땅에서 전쟁이 가장 많았던 7세기에 많은 절들이 전쟁의 역할 일부를 떠맡았고 실제 군사가 주둔했다. 사방을 향해 무력을 과시하는 천왕을 등장시킨 절이름은 전투적인 힘을 상징한다. 이곳은 탑에도 양지스님이 사천왕상을 조각한 전을 장식했다.

▲ 사천왕사 탑에 있었던 양지스님의 조각 사천왕상. 문무왕의 호국의지는 땅에서 사천왕사로 나타나고 바다에서는 용으로 현신했다. ⓒ문화재청
1300년이 지난 지금 찾아보는 신라사가 그토록 흥미로운 것은 고대 사회의 감수성이 곳곳에 넘쳐나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 신라에는 용이 넘쳐나고 거북이와 옥허리띠, 금자(金尺)가 곳곳에서 문화사에 참여한다. 우물은 바다밑 용왕과 통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고 천마며 황금 자동차옵션같은 비단벌레 날개의 말장식과 탄생을 상징하는 달걀이 무덤에서 출토돼 나온다. 문무왕과 동시대에 등장하는 명랑법사, 조각가 양지스님, 원효와 의상, 왕의 동생 김인문 등 여러 인물 또한 흥미진진하다. 여성은 특별히 떠오르지 않는다.

삼국이 통일된 뒤인 675년, 이번에는 당나라 50만 대군이 신라를 노리고 쳐들어 왔다. 왕이 그 대책을 명랑법사에게 물었다. 명랑은 우물 속으로 해서 용궁에 들어가 용왕에게서 배워온 비법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명랑의 비범한 행적은 그가 뛰어난 전략가이자 천문기상에 해박한 지식인이란 느낌을 준다.

명랑법사는 우선 경주 낭산 아래 절터를 잡고 12명의 스님들과 '문두루 비법'을 썼다. 풍랑이 일어 당나라군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신라는 안전해졌다. 679년 문무왕은 이곳에 사천왕사를 준공했다. 당나라 사신이 와서 사천왕사의 비밀을 캐가려고 애썼지만 신라는 사천왕사를 필사적으로 숨기고 그대신 근처의 망덕사를 보여줬다. 이곳은 지리적인 것부터 어떤 전술전략을 통째로 간직한 군사기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 사천왕사지. 경주시 배반동 낭산 아래 있다. 산 위에는 선덕여왕릉이 있다. ⓒ문화재청
여기에 문무왕비가 세워졌다. 56세로 사망한 왕을 바다 밑에 안장한 뒤 경주 땅에는 대당전쟁의 본거지였던 이곳을 택해 비를 세운 것이다. 발굴 중인 사천왕사지에는 문무왕비를 받치고 있던 돌거북이 있다. 경주에서 본 여러 개의 돌거북 비석받침 중에서도 이곳의 서쪽 돌거북이 특히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면서 화려했다. 뒷발은 앞으로 전진하는 기상을 나타내느라 한발가락이 땅속에 파묻혀 4개 발가락만 보인다. 거북등의 육각무늬와 척추뼈가 근육처럼 도드라지게 조각돼 있다. 비석을 받치는 네모 부분은 연꽃잎으로 화려하게 받치고 당초문양도 장식해 왕을 위한 정성을 다했다.

돌의 재질은 문무왕비와 같은 짙은 회색 화강암인듯 보였다. 끌의 쇳날이 튀어나갈만큼 단단한 돌이기에 천수백년 넘게 버텨온 것이다. 산업도로가 지나는 시끄러운 길 둔덕아래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서쪽 돌거북은 금방이라도 덤벼들듯 하는 무인의 기상이 있었다.

▲ 사천왕사의 서쪽 돌거북은 문무왕비를 천수백년동안 받쳐왔다. 대단한 기백을 지닌 거북은 살아있는 듯하며 조각이 화려하다. 근대들어 목이 잘려나간 자리가 참혹해 보인다. ⓒ이순희


▲ 한발가락을 땅에 묻고 힘들여 나아가는 특유의 거북생태를 표현한 사천왕사 문무왕비 돌거북 받침의 뒷발조각. 혼을 다한 예술가의 손길이 느껴진다.ⓒ이순희

그런데 동쪽에 놓인 거북과 함께 둘 다 머리가 참혹하게 잘려나갔다. 깨진 자리가 선명한 목에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일제때 일본인들이 두 거북 옆으로 길을 내면서 거북의 방향부터 돌려놓았다. "이때 목도 베어버렸다."고 발굴현장에서 오래 일해온 나이 많은 한 발굴원이 말했다. 학자 한사람도 "경주 절의 돌거북은 조선시대 유교의 불교폄훼와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 기독교의 무지한 신념으로 인해 거의 모두 목이 잘려나갔다. 사천왕사 돌거북은 일제 때 훼손된 것이 확실하다." 고 했다. 경주의 이순영씨는 1980년대 초등학생 학습지에 실린 사천왕사 돌거북 설명서에서 다음의 기록을 읽었다.

"천재지변이 많이 나는 일본에서 한국을 보니 왜구를 쳐부수려 작정한 문무왕비의 거북이 일본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에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일인들이 그 거북을 찾아 경주에 와서 머리를 잘라버렸다."

잘려나간 머리 하나는 경주박물관에 있는데 따로 떼 논 그 머리만 보기가 참혹했다. 거북이는 그의 모든 힘을 다해 비석을 보존했다. 문무왕은 사후 천수백년이 지나도록, 영원히 적들과 대적하는 운명인듯 하다.

▲ 사천왕사 문무왕비의 상단부와 하단부. 돌거북 등에 있다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순희

경주박물관에서 문무왕비를 보았다. 문무왕 사후, 682년에 건립된 비석은 1796년에 이미 부러진 조각으로 발견되었다. 그후 다시 잃어버렸다가 2009년 비석의 윗부분까지 우연찮게 되찾아 경주박물관에 들어왔다. 비문에는 김씨의 조상이 흉노로부터 온 핏줄이라고 천명했다. 흉노는 유목기마족으로 일찍이 중국 한나라를 맘껏 제압했고 유럽으로 진출 정벌했으며 이후 역사에서 사라진 종족이다. 부여와 흉노 두 부족의 핏줄이 우리에게 이어졌나 보다.

2010년 11월 현재 문무왕비 하단부는 미술관에 있고 상단부는 원효특별전에 나와 따로 전시중이어서 찾아 맞춰보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두 조각을 합쳐서 볼 수 있었으면 전체적인 인상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두어줄 간단한 설명으로는 문무왕대의 격랑이 그 자리에서 드러나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금이 가고 마모된 돌이 주는 느낌은 '우리가 참으로 오래된 역사를 실물로 지니고 산다.'는 것이었다.

어두운 회색의 단단한 돌에는 바둑판처럼 줄을 긋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치수는 아무데서도 자료를 찾지 못해 눈대중하니 비석 높이는 1m 이상, 가로 40cm, 폭30cm 쯤으로 보였다. 굉장히 묵직한 느낌을 주는 돌은 무게가 톤 단위일 것 같다. "경주에 올 때는 꼭 망원경과 줄자를 가지고 와야지." 결심을 또 했다.

▲ 무장사 가는 계곡의 바위ⓒ이순희

무장사의 한자표기는 䥐藏寺이다. 감포 가는 길에서 암곡이란 동네로 들어가 무장산 계곡 길을 따라 4km 걸어가니 산위에 무장사지 쌍거북 비석받침에 쌍룡을 새긴 비석 머리부분과 삼층석탑이 보였다. 삼국유사에 '무열왕이 이곳에다 무기와 투구를 갖다 두었다.' 했는데 학계에서는 문무왕 때 전란이 끝나도록 까지 이곳에다 무기를 감춰두었으리라 한다. 군대 갔다온 한 남성이 "현대의 군대에서도 무기고는 이런 데다 두어 감추고 유사시 꺼내 쓰기도 용이하게 한다." 고 한다.

▲ 무장사 가는 계곡의 바위ⓒ이순희

암곡(暗谷)이란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이름과 달리 경주외곽의 양명한 농촌동네여서 논밭이 넓어보이다가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계곡이 깊고 엄청난 바위와 돌더미가 펼쳐졌다. 무장사지까지 돌 징검다리를 10번 건널만큼 계곡은 굽이굽이 돌면서 거칠어지지만 물은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다. 넓게 다진 임도옆 활엽수 숲 또한 그리 오래돼지 않아 좀 싱거워 보였다.

가다가다 보이는 엄청난 돌에 뿌리박고 자라는 나무를 보면서 '고구려 주몽의 아들 유리가 저런 바위를 들추고 아버지가 남긴 증표인 칼을 찾아냄으로서 왕자임을 증명했던' 역사가 생각났다. 한국인에게 산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고래적부터 참으로 많은 역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고와 산불위험 등을 살피던 국립공원 지킴이 유수근씨는 "그 걸음으로 꼭대기까지 가겠느냐." 걱정하고 무장사지를 설명해주고 갔다. 이 산은 포항에 절반, 경주에 절반 속해 있다. 평일엔 7백명, 주말에는 4000~5000명의 인파가 무장봉 꼭대기 억새밭을 보고 간다고 했다.

▲ 무장사지의 쌍거북 돌비석받침. 목이 없어진채 등위에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받쳐든 조각의 비석머리만 남았다. 원성왕 아버지가 세운 절 무장사에 후일 손자며느리 소성왕비가 조성한 아미타불은 왕좌주변에서 왕과 왕비였던 가족 모두를 잃은 왕비의 회한을 말해준다. ⓒ이순희

▲ 무장사지 삼층석탑, 전방이 탁 트여 먼데까지 다 눈에 들어온다ⓒ이순희

산꼭대기에 가기 전 오른쪽 언덕위에 무장사지가 있었다. 내정된 왕권계승자를 따돌리고 왕이 된 38대 원성왕의 아버지가 그의 숙부를 위해 절을 지었다. 신라 큰 가문의 위세가 짐작된다. 쌍거북 돌비석받침이 있고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받드는 비석머리부분 돌이 남아있었다. 거북의 머리는 모두 잘려나가 몸통만 남고 용조각은 많이 마모되어 희미해 보였다.

서기 800년에 죽은 39대 소성왕을 위해 계화왕비가 이곳 무장사에 아미타불을 조성했다. 소성왕은 원성왕의 손자로 1년반 정도 왕위에 있다가 죽고 13살에 왕위에 오른 그의 큰아들 애장왕과 작은 아들은 신라말기의 왕권싸움때 삼촌 헌덕왕 칼에 죽었다. 딸은 흥덕왕비가 됐다가 2개월 만에 죽었다. 정권의 소용돌이에서 권력 그 자체였던 가족 모두를 잃은 계화왕비가 어떤 심정으로 아미타불을 찾았을지, 그녀가 왜 이 골짜기 무장사를 택해 불상을 모셨는지 궁금해진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이 되어 시집이 지은 가문의 원찰에 의탁하려 한것일까. 비석 바로 앞 전방이 환히 트여 먼데 길까지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는 삼층 석탑이 있다.

문무왕은 동해를 감시하는 감포 언덕에 감은사도 지었다. 이곳에서는 동해의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의 호국의지가 구조적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좀 떨어져 있는 기림사 산속은 바깥에선 잘 보이지 않으나 안에서는 바깥이 훤히 보이는 터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경주의 군사체계라고 한다. 정찰이 맨 앞이고 군대는 그처럼 뒤에서 움직였다.

감은사는 아들 신문왕대에 완성됐다. 여기서 부터는 삼국통일 이후 전후세대의 심미안과 그 후의 신라역사가 투영된 장소가 되었다. 감은사지의 금당 바닥구조는 마루처럼 깔린 초석과 기단돌 아래로 바다 쪽을 향해 구멍이 나있다. 문화재 해설사의 설명없이는 언덕 풀섶에 조금 뚫려있는 이 자리를 알아보기 불가능하다. 동해바다와 연결된다는 것은 용이 된 문무왕의 혼백과 통한다는 것. 절이 바다를 향해 나있는 것 자체가 그런 상징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바닷물이 흘러들어왔다기 보다 그 구멍은 건축적으로 건물 기단아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환기구 구실을 했다는 설명이었다. 금당의 이런 구조가 역시 연못터를 메워 세워진 백제 미륵사 기단 구조와 동일한 수법임으로 미루어 백제 건축기술의 도입을 알 수 있다.

더 확실하게는 고구려 백제 건축에 사용된 돌못의 존재가 비로소 통일신라 건축인 감은사에서도 보인다는 것이다. 돌못은 평면돌을 이어주는 쐐기구실을 해서 지탱하는 힘을 높여주는 구실을 한다. '돌못의 등장이후 신라건축은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다.'고 경주대 이건직 교수는 논문에 썼다.

두 개의 삼층탑은 거대하다. 통일이후 석가탑 다보탑까지 짓게 될 백제인의 미학이 여기도 적용됐으리라 짐작한다. 탑 속에 있던 황금사리함은 양지스님 스타일의 사천왕상이 조각된 아름다운 것이었다.

▲감은사지. 두 개의 거대한 탑사이로 금당터의 기단돌과 초석이 남았다. 백제 미륵사지의 건축기법과 동일한 수번으로 건축됐다. 동해의 움직임을 정찰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순희

문무왕이 죽자마자 신라에는 기다렸다는 듯 반란이 일어났다. 신문왕은 여러 세력들 틈에서 버텨나가야 했다. 어린 효소왕은 그들에게 당했으리라 한다. 이럴때 역사는 통일에 공이 많은 문무왕과 김유신이 죽어서까지 나라걱정이다가 세상을 평안케할 기구로 만파식적 피리를 신문왕에게 전했다고 했다.

682년 어느날 동해바다에서 감은사 앞으로 섬이 떠내려오면서 두 개로 갈라졌다 합했다 했다. 왕이 그 섬에 올라 용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용은 신문왕에게 흑옥대를 바치고 섬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국가의 안녕을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 왕이 그 말을 따라 만파식적 피리를 만들었다.

국어학자 고 서정범 교수가 감은사 앞바다 바위섬에 관한 글을 남겼다. '문무왕릉에서 동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소용돌이치는 소가 있고 여기 큰 바위섬이 있다가 지금은 가라앉았다고 한다. 물결이 여기와 부딪쳐 배를 삼켜버린다는데, 섬이 왔다갔다 했다는 기록은 당시 여기에 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지금은 섬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감포 앞바다에는 원래 섬이 12개 있었다.'

신문왕이 섬에 올라 용과 대면해 말을 나누는 장면을 어떻게 형상화 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더 흥미롭게 진행된다. 왕 일행은 기림사 뒤 함월산으로 해서 월성으로 돌아간다. 이때 왕의 수레는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갔다. 대궐에 있던 태자 이공(후일의 효소왕)이 옥대와 만파식적 보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신문왕을 맞으러 서라벌에서 말을 달려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용의 비늘로 된 옥대의 띠판을 하나 끌러 물에 담갔다. 그랬더니 띠판에 새겨진 용이 살아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늘로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아름답게 새기고 기림폭포아래 용연을 아낀다. 통일신라의 전후세대들은 전쟁을 예술의 경지로 변화시켜 칼 대신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만들어냈다. 역사적으로 보면 태자 이공이 등장하기 이른 때였다. 하지만 월성에서 태자같은 누군가 기쁘게 마중나왔을 것은 분명하다. 경주박물관에는 오래된 옥피리가 보존돼 있다. 정말 경주는 대단한 곳이다.

▲ 함월산 계곡의 폭포와 용연. 신문왕의 수레가 이곳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했다. ⓒ이순희

산악인인 부산일보 황계복씨의 안내로 함월산 용연을 찾았다. 추령을 사이에 두고 토함산과 연이어진 570미터 높이의 함월산을 관통하는 계곡이 매우 깊었다. 크고 작은 바윗돌이 많아지면서 바위벽이 문짝처럼 가려선 시냇가 안쪽에 문득 10m 높이의 폭포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물소리는 그 앞에서만 들렸다. 폭포가 떨어지는 자리의 용연은 아담한 연못같고 깊어보이지 않았지만 물은 정말 옥같아 보이고 더할수 없이 맑았다. 노란 햇살을 담뿍 받는 비밀의 방 같은데 파란 하늘, 물과 바위가 어우러져 고귀한 장소같고 왕의 수레가 쉬어갈만한 곳임을 알겠다. 여기는 경주시의 상수원지역이기도 하다.

감은사에서 이리로 들어온 왕은 산넘어 추령으로 해서 월성으로 돌아갔다. 681년 월성에서 나와 능지탑에서 화장하고 감포까지 문무왕을 장사지내러 간 길도 같은 길이었을 것이다. 문무왕은 신라왕실이 동해 자신의 능침까지 왕래할 때 이 길을 익혀두게 함으로서 왜적에 대비토록 했다고도 한다.

▲ 기림사 진남루. 선덕여왕때 창건된 건축으로 임진왜란과 일제때 승군과 의병들의 지휘본부로 쓰였다. ⓒ 이순희

▲ 기림사 소장 통일신라기 사리함 ⓒ이순희

▲ 매월당 김시습의 영당 ⓒ이순희

▲ 함월산에 일찍 해가 지고 깜깜해진 저녁 예불에 종치는 스님. ⓒ이순희

근처의 기림사는 남성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일제 때도 이곳엔 의병과 승군이 주둔하고 무술을 연마하는 절의 전통을 가졌다. 폭풍처럼 일생을 살다간 김시습의 행적을 기린 영당도 여기에 있다. 억센 절에 이렇게 섬세한 예술도 있구나 싶게 네 귀퉁이에 날아가는 꽃송이같은 금동장식이 달린, 천상의 물건같은 사리함도 구경했다. 스님이 종치는 예불이랑 보고나니 깜깜해진 절 마당엔 차가운 밤바람이 스산하고 사람그림자 하나 안보였다. 그런데도 절 밖으로 서둘러 나오기까지 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예리한 눈으로 외부인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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