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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르 쓰고 <롤리타> 읽는 이란 여성들…그들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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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르 쓰고 <롤리타> 읽는 이란 여성들…그들은 왜?"

[철학자의 서재]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세계화'란 단어는 더 이상 우리에게 어색하거나 모호한 단어가 아니다. 통신과 교통 수단의 눈부신 발전은 시공간을 축소시켰다. 미국의 금융 시장 붕괴가 순식간에 전 세계 경제 시스템을 준 공황 상태로 몰아가기도 하고 천만리 떨어진 지역의 주요 사건이 시간차를 두지 않고 세계 각지로 전송되고 알려진다. 그런데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는 구호와 그에 관련된 우리의 다양한 경험은 일고의 가치 없이 참인가?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아자르 나피지 지음, 이소영·정정호 옮김, 한숲 펴냄)는 그것은 거짓이라는 낯선 진실을 전해준다. 이 책의 저자는 영국과 미국 등 소위 자유 국가에서 수학하고 영미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지식인 이란 여성이다. 이 책은 조국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그가 교수 생활을 하며 체험한 197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의 이란 혁명기, 즉 호메니이 옹 혁명기에 관한 기록과 문학(이야기)이란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는가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책은 우선 이슬람 문명권이 우리에게 사실은 얼마나 이질적이고 낯선 타자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내게,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에게 이란 혁명기는 소요로 혼란스러운 이란의 거리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흰 수염을 길게 기르고 높고 긴 터번을 쓴 호메니이 옹의 엄숙하고 단호한 표정의 사진들로 희미하게 기억되며, 검은 차도르를 뒤집어쓴 무슬림 여성들과 미국과 대적해 잔인하고 과격한 테러를 일삼는 테러리스트들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이란에도 고등 교육을 받은 다양한 종류의 지식인들이 있고 학생들이 있을 뿐더러 통상 무슬림의 이미지로는 설명 불가능한 개인들 각자의 다양한 색채의 삶과 고뇌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1979년 이란

1979년 이란의 민족주의자들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서구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팔라비 왕조를 축출했다. 호메니이 옹은 최고 정치 지도자로서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신정(神政)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삼고 이란을 통치하기 시작한다. 팔라비 왕조 시대가 받아들였던 서구의 가치들을 일소하였고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 그때그때의 명분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했던 정치적 반대파들은 잔혹하게 숙청하였다.

호메니이 옹의 정치 기조에 반대했던 많은 이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공개 처형되거나 암살되어 길거리에 버려졌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들은 금지된다. 서방의 노래나 영화를 듣거나 보아서도 안 되고 팔라비 왕조 시대에 비교적 큰 자유를 누렸던 여성들은 주어졌던 자유를 빼앗긴다. 팔라비 왕조에서 장관직을 맡았던 한 여성은 길거리에서 돌을 맞고 칼에 찔리고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온 몸을 가리는 검은 차도르와 마지막 한 올의 머리카락까지 모두 가리는 데 쓰이는 스카프가 신성한 신의 규율에 순종하는 올바르고 순결한 여성성의 상징으로 여성 모두에게 강제된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이러한 규칙들을 따르는지 어기는지를 감시하고 지도하며 사람들을 연행해서 신문할 권리를 가진 민병대원들이 조를 이루어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닌다.

대학에서의 상황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방의 방종한 문화를 전파한다고 여겨지는 책들은 금서 목록에 오르고 연구나 강의가 금지되거나 어려워진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 저자인 아자르 나피시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혁명 성공 두 해 전 즈음 테헤란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영문학과 교수들이 헤밍웨이 소설에서 '포도주'라는 단어를 삭제할 방법에 몰두하고 원리주의 학생회가 여타 학생들과 교수들을 감시 고발할 뿐더러 비윤리적이고 방종하고 신성 파괴적인 사상을 전파하는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브론테에 대한 강의를 폐지하는 상황들과 맞닥뜨린다.

그는 테헤란 대학에서 사임(당)하고 이후 우여곡절 끝에 알라메 타바타바이 대학에서 서방 세계의 방종하고 무도한 작품들을 강의하다 1995년 대학을 다시 떠난다. 그리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인연을 맺었던 7명의 여학생들과 자신의 집에서 비밀리에 서방에서조차 음란 소설의 혐의를 종종 받는 나보포크의 <롤리타> 등의 금지된 영문학 소설들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2년 동안 이끌어나간다.

이슬람 원리주의 정치의 메카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는다는 것
▲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아자르 나피지 지음, 이소영·정정호 옮김, 한숲 펴냄). ⓒ프레시안

경전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이해와 오랜 지역적 통습을 옳고 그름의 엄중한 잣대로 사용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호메니이 옹 철권 정치 아래에서의 이란의 모습은 일견 유사 파시즘이 횡횡하는 전제독재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세계가 금지한 서방의 책들을 사람들과 함께 읽고 토론한다.

호메니이 정권 아래의 테헤란에서 금서를 읽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책을 쓰는 것은 사실 특정 작가가 아니라 그가 속한 시대의 통칭 구조라는 한 현대 철학자의 주장을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일단 모든 책이란 저자가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세상에 발표하는 순간 또 다른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읽혀지는 한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며 끊임없는 재탄생을 거듭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폭압적 세계에서 <롤리타>, <위대한 개츠비>, <데이지 밀러>, <오만과 편견> 등을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가해지는 일반적 정치적 억압과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억압을 모두 동시에 견뎌내야 하는 이란 여성들과 다시 읽는다. 그리고 그 독해 모임을 통해 그 책들은 새롭게 이해되고 태어난다.

이들에게<롤리타>는 더 이상 속칭 롤리타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중년 남성의 소녀성애의 변태적 애정 행각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시선과 잣대로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달리 적용하여 말하면 전제독재주의적 시선)의 폭력성이 그 폭력의 희생자인 개인(들)을 어떤 방식으로 파괴하고 그들이 누려야 할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가치를 박탈하는가를 폭로하는 이야기로 다시 해석한다.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미국의 천박한 가치를 전파한다고 혐오해 마지않는 <위대한 개츠비>는 수단(개츠비의 부에 대한 집착/각종 정치적 행위)이 원래 목적(순수한 꿈과 이상의 실현/이슬람 국가의 민족적 이상의 실현)을 압도하며 벌어지는 비극으로 이해된다. 이들의 비밀스런 독해 모임은 이처럼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자 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란 사회에 대한 해석과 비판의 과정이 된다.

이 독해 모임은 참여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게끔 이끈다. 동시에 비단 그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동반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렇게 그들은 비밀 독해 모임과 함께 성장하며 이야기를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으로 발전해 나간다.

이야기, 읽기와 쓰기의 정치 사회적 의미

문학 즉 서사, 단순하게 '이야기'는 대단한 이론의 정립과 선전이 아니며 또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 숨겨진 틈새를 통해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이야기의 중요성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것을 읽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것을 읽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보통 명사 '인간', '여성', '기독교도', '무슬림' 등의 눈과 입술이 지워진 회색 가면을 비로소 벗어던지고 누구의 얼굴과도 호환될 수 없는 자신만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게 되며 고유한 자신의 이름과 눈, 목소리를 얻게 된다.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이고 비정치적인 일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오히려 매우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 그런 때에 그것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에 대해 저항하고 항거하며 반대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타인들에게 들려주며 불의에 도전하는 전복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아자르 나시피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들을 읽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서방 특히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서 살고 있는 내게도 마침내 그 이야기가 도착했다. 그것을 읽었을 때 이란 여성인 그들은 낯설고 위협적인 이방인, 알 수 없는 타자의 얼굴로가 아니라 나, 우리와 같이 울고 웃는 감정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고뇌하고 불의에 저항하며 항거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하고, 기록해야 하며, 계속해서 읽히고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타자, 그 낯선 이름을 넘어

세계화, 지구촌이란 말이 그럴듯해질수록 서로 처음 접하게 되는 이질적인 문화와 지역적 이해 관계들은 이전보다 더 자주 충돌하고 갈등한다. 낯설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단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곧 불의나 비이성적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가 좁아질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전보다 더 높은 감수성과 관용의 정신이다. 우리의 시선과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우스워 보이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애초에는 나름의 문화적 지역적 특색을 반영한 근거와 필요성, 정당성을 가지고 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슬람 문명권에서 여성들이 차도르를 쓰는 것이 그러하고 일부다처제의 문화 또한 그러하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슬람 국가들이 반미를 외치며 잔인해 보이는 테러를 저지르는 것 역시 단순하게 선악 판단을 하며 단죄할 일이 아님은 지당하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호메이니 옹의 이란 혁명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역사적 사건임은 물론이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는 친미 성향의 지식인에 의해 쓰여 졌다. 이 책에 이런 성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감안해 읽어볼 일이다.

그리고 그가 뛰어난 영문학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은 이미 위에 언급한 것들과 저자의 탁월하고 독창적인 문학서 해석을 읽는 즐거움 외에도 많은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한다. 당시 이란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이중 억압에 시달리는 소수자의 문제 같은 것들이 그 예일 것이다.

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2009년 여름 이란의 정치 상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부정 선거와 그에 대한 시민들의 거리 항의, 정부의 발포가 전세계로 즉각 타전되고 알려졌다. 잘 알지 못하는 타국의 정치적 상황과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식견은 없지만 이미 경험한 광범위한 자유와 그에 대한 요구를, 또 물질문명의 여러 가지 즐거움을 총과 칼로 금지하고 억압하는 것은 댐의 구멍을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강물을 손바닥으로 막아내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 책에는 이런 문제에 대한 저자의 생생한 체험도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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