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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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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3> 간도와 한국사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1990년대부터 <한국생활사박물관>, <라이벌 세계사>, <지하철 史호선> 등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9월 3일은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일(1952년)이고, 9월 4일은 간도협약 체결일(1909년)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모두 중국에서 일어났지만 한국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연변(옌볜)을 포함하는 간도가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국 사이에 영유권 분쟁을 겪어 왔고, 지금도 그곳에 많은 한인(조선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간도를 포함한 만주 지역을 고구려와 발해가 통치한 적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던 지안시 등 압록강 북안의 서간도 지역과 두만강 북안의 북간도 지역에서는 한국인 방문객과 현지 중국인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흐르곤 한다.

이 지역을 둘러싼 한국과 중국 사이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2002년부터 5년간 진행된 중국의 동북공정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동북공정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으로 이루어진 동북 3성에서 펼쳐진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였다. 이전에는 고조선, 고구려를 한국사로 기정사실화하고 발해가 누구의 역사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면, 동북공정에서는 앞의 두 나라까지 고대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규정해 버렸다. 중국 당국은 곳곳의 역사 유적지와 박물관에서 현직 교수를 포함한 한국인의 촬영과 조사를 금지했다. 한국인이 고구려 벽화 조각을 몰래 빼돌렸다가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2009년에는 간도협약 100년째를 맞아 이 협약이 실효(失效)했으니 간도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바탕 일었다. 간도를 둘러싼 분쟁은 무려 300여 년 전인 1712년(숙종 38)까지 올라간다. 당시 간도는 청을 세운 만주족이 자신들의 발상지로 여겨 봉금 정책을 폈는데, 이곳에 조선 사람들이 건너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710년(숙종 36)에 조선인이 청국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청은 양국의 불분명한 땅을 조사하기 위해 오라(지금의 지린성 지역) 총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했다. 조선의 접반사 박권(朴權)은 목극등과 회담하고 백두산 산정 동남방 약 4㎞, 해발고도 2200m 지점에 정계비를 세우고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이 있으니, 그 분수령 위에 돌을 세우고 기록한다…"라는 비문을 새겼다.

문제는 '토문강'이 어디를 가리키는가였다. 조선은 그것을 두만강 북쪽에 있는 쑹화강의 지류로 해석해 간도를 영토처럼 관리했고, 청은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면서 간도를 자신의 영토로 간주했다. 이 논란이 20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제멋대로 간도를 청에게 넘겨준 것이 바로 간도협약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착상한 일부 한국인의 간도 영유권 주장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 중국 일각에서도 동북공정이 단순한 학술 연구 차원을 넘어서는 대응으로 제기되었다. 두 가지 쟁점이 모두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 2012년 9월 3일 연변자치주 창립 60돌을 맞아 연길(옌지)시 모아산 공원에서 자축 행사를 하고 있는 조선족 주민들. 한국인의 시선에서 볼 때 마오쩌둥 사진을 고이 들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강응천
ⓒ강응천

간도협약과 국공내전에 담긴 역사…간도를 알아야 한국사가 제대로 보인다

이 같은 '소유권' 논란과는 별도로 근현대사에서 간도가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책이 있다. 서울시립대 염인호 교수의 <또 하나의 한국전쟁>(역사비평사)이 그것이다. 연변 등지의 광범한 자료 조사를 거쳐 작성한 학술 논문을 모아놓은 책인데도 대하소설처럼 잘 읽혀서 신기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중국 동북 지역의 한인 사회를 집중 조명하면서, 그들의 역사가 결코 한국사와 분리되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들의 역사를 모르면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 반쪽에 머문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책에 따르면 중국의 한인 사회는 국공내전, 아니 전 세계적인 좌우 대립의 흐름을 고스란히 따라가며 역사의 급류에 몸을 맡겼다. 중국 동북항일연군에 속해 항일 투쟁을 하던 한인들은 해방 후 대부분 공산군의 편에서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두 갈래의 행동을 하는데, 하나는 연변을 북한에 귀속시키려는 운동이고 하나는 북한으로 돌아가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일종의 '채권자 의식' 속에 연변을 소련식 공화국으로 만든 뒤 점차 북한에 흡수시키자는 논의로 진전되었다. 후자는 항일 투쟁과 국공내전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6.25 당일 남진한 보병 21개 연대 가운데 10개 연대가 만주 조선인 부대였으며 이들의 전투력은 여타 인민군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합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집히면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도움을 받게 되자, 만주 조선인과 북한의 '채권자 의식'은 상쇄되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연변을 중국 영토로, 조선족을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확정하는 연변조선족자치구(1955년에 '자치주'로 변경)의 성립이었다.

간도의 한인 사회가 좌익 일색이었던 것은 아니다. 우익 계일인 한국독립당은 중국국민당의 공세가 치열한 시기에 만주로 진출한 뒤 만주와 남한이 북한을 협격해 통일을 이루는 전략을 추진했다. 그러나 국공내전의 판세가 공산군으로 기울면서 이들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고, 국민당 편에 서 있던 한국인은 생존을 걸고 남한으로 탈출해야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지위가 커지고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간도 일대를 무대로 탈북자 지원 활동, 북한 민주화 운동 등을 벌이는 한국인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해방 공간에서 실패했던 우익 계열의 북한 포위 전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간도 영유권 주장 전에 평화 통일부터 꿈꾸자

자,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꼬여 있는 간도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 싶다. 하나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질 무렵 중국에 드나들던 이른바 '북학파'의 역사관이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 기라성 같은 북학파 학자들은 청을 오랑캐로 업신여기며 북벌론을 고수하는 소중화론자들을 비판했다. 협애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청의 선진 제도와 문화를 배우자는 것이 그들의 핵심 주장이었다. 아직도 중국을 후진국으로 업신여기거나 혐오하는 상당수 한국인은 북학파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이처럼 청을 '존숭'하던 북학파가 청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만주 일대에 대해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한 것은 얼핏 모순되어 보이나 우리가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그들은 사대주의에 찌든 사대부들이 내던져 버렸던 발해를 우리 역사의 일부로 복권시키고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한국사를 복원했다. 오늘날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 중국 영토가 된 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비판하는 것과 그곳이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지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간도에 일제와 같은 악당이 다시 나타나서 한국인과 조선족을 탄압하고 역사 유적을 파괴한다면, 이를 응징할 우리의 권리가 어디서 나올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마지막 하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이다. 그들은 이 노래를 철원 노동당사 앞에서 불렀다. 만주를 지배하던 발해를 왜 노동당사 앞에서 꿈꾸었을까? 발해는 만주와 북한 지역에 걸쳐 있던 왕조이기 때문에 남북한이 별개의 나라라고 생각하면 대한민국과 발해는 아무 관련이 없다. 즉 발해는 남북통일을 전제할 때에만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역사다.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전에, 거창한 동아시아연합을 전망하기 전에 통일부터 꿈꾸라. 그것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처럼 평화적인 통일을 꿈꾸라. 간도를 무대로 펼쳐졌던 발해는 우리 민족이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삶을 공유했던 소중한 경험이다. 새롭게 다가올 그 경험의 기회를 협애한 휴전선 이남의 주민으로 맞아야겠는가, 당당한 통일 한국의 주민으로 맞아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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