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은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에게도 새로운 시대가 열린 날이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세계가 세계대전이라는 대살육극으로부터 벗어난 바로 그날, 한국도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8월 15일은 3년 뒤 또 한 번 한국인의 기념일이 되었다. 한국인의 독립 국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8.15는 모든 한국인에게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이날 건국된 대한민국은 첫 번째 8.15 때만 해도 아무도 예상치 않았던 반쪽 국가였다. 그해 9월 9일 북쪽에서 또 다른 반쪽 국가가 생겨나면서 세계인과 공유한 8.15의 의미는 퇴색해 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인과 공유하는 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그날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을 선언할 수도 있고 아예 통일 정부의 수립을 공포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라도 이날은 민족 전체와 세계인의 축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인과 세계인은 이 같은 세 번째 8.15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한국인이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계인도 그래야 한다니, 뜬금없는 물귀신 작전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8.15가 두 번째 8.15로 이어지는 과정은 한국인만의 책임 아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단으로 귀결되는 한국인의 내적 균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외부의 작용이 압도적이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생긴 일이니까 남 탓하지 말고 우리가 힘을 키워 분단을 극복하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비극에 남의 탓이 컸다면 그런 남에게 책임을 묻고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을 키우는 길이다.
1945년 9월 9일, 같은 날 다른 풍경…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중국 지린성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의 성도(省都)인 창춘에 갔다가 위만황궁이란 곳을 찾았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뒤 만주까지 집어삼키고 그곳에 자신들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중국인이 이를 '가짜 만주국'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이름이 '위만(僞滿)'이고, '마지막 황제' 푸이를 데려다 그 괴뢰국의 황제로 앉힌 곳이 바로 위만황궁이다. 중국인은 자기네 역사의 치부인 이곳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도리어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중국인의 각성을 다지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통째로 없애 버려 치욕의 역사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 버린 김영삼 정권과 대비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위만황궁 옆에는 동북항일전시관이라는 꽤 볼만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을 상징하는 장소 바로 옆에 그 침략에 저항한 해방 투쟁의 기록물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 투쟁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기록들을 돌아보다가 한 장의 사진과 마주친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동북 광복(东北光复)'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거대한 사진은 1945년 9월 9일 난징[南京]에서 열린 일본군 항복 조인식을 담고 있었다.
▲ 1945년 9월 9일, 난징에서 열린 일본군 항복 조인식. ⓒ강응천 |
사진 오른쪽에 초라하게 선 일본군 수뇌부가 반대편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중국군 수뇌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연합국들의 국기 아래에서 각국 참관인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가 서명한 항복 문서를 총참모장 고바야시 센사부로[小林淺三郞]가 허잉친[何应钦] 중국 육군 총사령관에게 바치며 고개를 숙인다. 통쾌하기 짝이 없어야 할 이 장면이 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까닭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같은 날 서울에서 열린 또 다른 항복 조인식과 이 장면을 비교해 보시라. 한국인을 괴롭혀 온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였던가?
당연한 역사적 귀결로 편안하게 다가와야 할 한 장의 사진이 내게 던진 충격은 그대로 지난 68년간 한반도를 덮친 충격이었다. 한국인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던 35년을 끝냈어야 할 8.15가 그런 상태의 연장으로 이어진 사정을 이 사진은 웅변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라야 한다. 민족도,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35년의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자기 운명의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세 번째 8.15를 앞당겨야 할 이유에 대해 이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상념 말고 무슨 구구한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 1945년 9월 9일,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미군 대표 앞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있다(중앙청 회의실). ⓒ연합뉴스 |
분단에 책임 있는 세력과 국가의 사과를 받아야
자, 그렇다면 다가오는 세 번째 8.15에 우리는 어떤 사진을 가져야 할까? 저 사진처럼 세계만방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손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는 장면을 담은 사진일까? 안타깝지만 이미 그런 사진이 필요한 시대는 지났다. 남들은 다 받은 초등학교 졸업장을 못 받았다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이제 와 졸업장을 받아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제는 졸업장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내 생각과 달리 멋대로 졸업을 유보시키고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든 외부 인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꼬아 놓은 내 인생 행로를 바로잡지 않으면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
문제의 외부 인사는 일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만'이 아니다. 미국도 있고 소련도 있다. 8.15를 전후한 한국 현대사가 워낙 베일에 가려 있지만, 특히 용감하게 식민 지배와 맞서 싸우며 독립의 자격을 만방에 과시한 한국이 분단된 채 해방을 맞이하는 과정은 미스터리투성이다. 소련의 남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는 미국 정부의 긴급회의에 앞서 두 장교가 지도를 보고 38선을 그었는데, 이를 미국 정부가 채택하고 소련도 동의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분단의 결정 과정이다. 이 38선은 처음에는 미국과 소련이 각각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한 편의적 분계선에 불과했는데, 점차 두 나라의 이해관계와 한국인 내부의 갈등이 맞물려 정치적 분단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이 같은 대사건이 철저한 '우연'의 산물로 치부될 뿐 책임을 인정하는 개인도, 국가도 없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누구인가? 누가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능력을 간과했는가? 누가 한국을 '우연히' 분단될 수도 있고 '우연히'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우연한' 곳으로 치부했는가? 어떤 이는 한국과 독일의 분단을 냉전의 산물로 보면서, 독일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했는데 우리는 아직 못해서 부끄럽다고 한다. 과연 한국과 독일의 분단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 독일의 통일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괜찮은 걸까? 독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범죄 국가다. 이런 나라는 다시는 도발할 수 없도록 100년은 분단시켜 놓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아시아에서 독일처럼 분단되어야 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이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전범인 일본이 아니라 피해자였던 한국을 분단시켰다. 이것은 명백한 범죄다. 그리고 50년도 안 되어 독일은 통일되고 한국은 여전히 분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고도 현대 세계에 정의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이 정치적 자기 결정권이 있는 나라라면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을 국제 사회에 요구해야 한다. 한국의 분단을 우연의 산물로 치부하지 말고 철저히 책임의 소재를 가리고 책임 있는 세력과 국가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 분단이 한민족에게 끼친 피해를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배상을 받아서 이를 통일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도 고려할 일이다. 그래야만 8.15가 정말로 한국인에게 의미했어야 하는 바가 이루어지고 꼬여 버린 한국 현대사의 실타래가 풀릴 것이다. 그것은 8.15가 정말로 세계인에게 의미했어야 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제3의 8.15에 내가 보고 싶은 사진은 이와 같은 것이다. 전 세계가 8.15의 산물인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 모여 분단에 책임 있는 당사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통일 한국으로부터 평화의 물결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를 기원하는 장면! 그 장면과 함께 현대 한국인의 진정한 원단(元旦)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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