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프레시안>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자문위원회와 공동으로 경제 민주화의 오늘을 짚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기획 '경제 민주화 워치'를 진행합니다. '경제 민주화 워치' 칼럼은 매주 게재됩니다. <편집자>
한동안 뜨겁게 타올랐던 경제 민주화 열기가 최근 들어 확연하게 잦아드는 느낌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11년 10월 15일, "여의도를 점령하자"는 구호와 함께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던 경제 민주화의 열망은 작년 총선과 대선 기간 동안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특히 최근에는 남양유업 사태가 발생하면서 "갑"의 횡포로부터 "을"의 권익을 지키는 문제가 사회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 민주화 운동을 관통하는 구호도 "1% 대 99%"에서 출발하여 "재벌의 지배 구조 개혁"이라는 다소 현학적인 단계를 거쳐 최근에는 "을 지키기 운동"으로 변모해 왔다.
이제 지난 21개월을 돌아보면 경제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에 비해 중간 성적표는 크게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 물론 하도급법과 일감 몰아주기 등에서 진전된 내용을 담은 입법이 있었고, 금산분리 강화와 관련해서도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상의 소유 규제를 대체로 이명박 정부 이전으로 되돌리는 개정 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재벌의 지배 구조 개혁과 관련해서는 거의 진행된 것이 없다.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내용이나 재벌 계열 금융 기관의 비금융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제한 강화 등은 아직 논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거대 금융 기관을 보유하고 있는 재벌에 대한 중간 금융지주회사 의무화 문제도 잠깐 논의되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다.
결국 그동안의 성과를 요약하자면, 국민적 열망은 강했고 지난 대선 과정에서 논의도 무성했지만 실제 제도화된 성과는 매우 제한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무성한 논의, 미약한 성과…기로에 선 경제 민주화
그렇다면 남아 있는 경제 민주화 과제에 대한 제도화 작업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어려운 문제고 똑 떨어지는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경제 민주화 운동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느낀 고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경제 민주화의 필요성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를 정리하고 확산할 필요가 있다. 경제 민주화는 정치적 민주화와는 달리 그 개념이 쉽게 와 닿지 않고, 따라서 대중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물론 "1% 대 99%"나 "갑을 관계" 같은 문제는 비교적 우리에게 쉽게 이해되지만 "부당 내부 거래에 관한 규제를 공정거래법 제5장에서 제3장으로 이관해야 한다"는 주장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다. 대중이 비교적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하도급 문제나 일감 몰아주기 문제가 어느 정도 제도화의 길을 걸었던 반면, 현학적으로 들리는 재벌의 지배 구조 개혁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는 이유가 상당 부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재벌 개혁이 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조금 더 친절한 설명과 논리 개발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경제가 조금만 어려워지면 다시 "투자 위축"이라는 엄살과 "수틀리면 우리나라를 떠난다"는 엄포가 득세하게 될 것이다.
둘째, 문제의 속성에 부합하는 맞춤형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한 명의 슈퍼 갑과 여러 명의 소규모 을이 만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재벌계 기업의 골목 상권 침해, 프랜차이즈 본부와 가맹점, 원청 대기업과 하청 협력업체 등의 관계가 대체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형적인 문제는 슈퍼 갑인 대기업 혹은 가맹본부의 횡포가 을의 생존권을 부당하게 위협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해법은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슈퍼 갑의 팔을 묶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규모 을의 행동 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골목 상권에 대한 진입 규제는 전자의 해법이고,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이 협의회를 만들어 가맹점 본부와 단체 협상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후자의 해법이다.
그렇다면 둘 중 어떤 해결책이 더 나은 것일까. 그 해답은 어떤 해법이 슈퍼 갑의 전횡을 더 유효하게 통제할 수 있는지와 함께 궁극적으로 어떤 해법이 소비자의 후생을 극대화하는 데 더 유익할 것인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많은 경우 슈퍼 갑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규제하기보다는 소규모 을이 연합해서 슈퍼 갑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집단적 교섭권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할 때가 많다.
▲ 경제민주화국민운동본부, 전국'을'살리기비상대책위원회 회원들이 6월 24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청와대는 경제 민주화 입법 방해를 중단하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
지지부진한 재벌 지배 구조 개혁…지도자가 결단해야
셋째, 경제 민주화의 논의를 형평의 차원에서 성장의 차원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즉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비단 형평성의 차원에서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큰 파이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된다는 시각을 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 민주화가 "잘난 기업 때리기"가 아니라 "싹수 있는 기업 살리기"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업 생태계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어렵고, 한 번 대기업이 되면 상당히 오랫동안 대기업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음수림(陰樹林)에 해당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싹수 있는 기업이라도 대기업이 뒤덮고 있는 그늘을 뚫고 햇빛을 받아 성장하기 쉽지 않다. 그 결과 산업의 활력이 떨어지고 노령화 사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술 혁신이 충분한 규모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비록 직관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때 음수림을 구성하는 거목 중 썩은 나뭇가지를 조금 베어내어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숨통을 틔우면 가능성 있는 묘목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물론 지금 이 논의는 더 세련된 이론적 분석을 통해 그 타당성을 엄밀하게 검증받아야 한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형태로든 경제 민주화 논의가 성장과 접목될 수 있을 때, 제도화가 더 손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강조하듯 자명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목도하기는 쉽지 않은 측면이 "지도자의 추진력"이다. 경제 민주화는 기득권을 재배분하는 과정이고 특히 강자로부터 약자로 기득권을 재배분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수많은 을들의 성원도 있지만, 슈퍼 갑들의 반발도 거셀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센 슈퍼 갑인 재벌의 지배 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는 지도자의 결단력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현재 다양한 경제 민주화 과제 중 가장 지지부진한 부분이 재벌의 지배 구조 개혁이라는 점은 그래서 지도자에게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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