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과 대통령 탄핵도 가능한 엄격한 의결 정족수 요건(국회 재적의원의 3분의2 이상)까지 넘으며 의기투합해 통과시킨 요구안이, 여야의 '동상이몽' 속에서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가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 요건을 넘어선 것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한 의결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공교롭게도 9년4개월의 시차를 두고 이뤄진 두 번의 국회 표결이 모두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내용이다.
당장 가장 큰 문제는 대화록 공개에 대한 '위법' 논란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상 정상회담 대화록은 예외적으로 국회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표결이 있을 경우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자료 제출 및 열람을 허용하고 있지만, '비밀 누설 금지' 조항에 따라 대화록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야는 "열람만 하고 공개를 못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국회 운영위원회를 통해 공개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정치권이 각자의 정치적 이해에 의해 외교 안보와 관련한 국가 기밀을 활용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낳은 최악의 선례라는 지적도 나온다.
▲ 국가기록원에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일체의 열람·공개를 요구하는 자료제출요구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지난 2일 통과됐다. ⓒ연합뉴스 |
여야, 입 모아 "논란 끝내자"…속사정은 '따로 따로'
비판의 목소리는 민주당 내부에서 많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3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그야말로 기밀 문서로 보관돼 있다"며 "신뢰가 있어야 남북대화, 통일의 길이 열리는데 자꾸 정쟁 대상으로 삼으면 어떻게 남북관계가 나아갈 수 있겠느냐"며 여야의 표결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앞서 여야가 재석 276인 중 찬성 257인이라는 압도적인 찬성표로 의결시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제출 요구서'엔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 등 진보정당 소속 의원, 박지원·추미애·박주선 의원 등 DJ(김대중)계, 무소속 안철수 의원 등이 같은 논리로 반대표를 던졌다.
양당의 당리당략에 의해 입법 기관인 국회가 오히려 위법에 앞장선다는 비판도 나온다. 여야는 "서해북방한계선(NLL)과 관련한 논쟁과 국론 분열을 이제 끝나자"고 이구동성으로 외쳤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새누리당 입장에선 이미 국가정보원과 합작해 대화록 사본을 유출한 전례가 있는 만큼 법적 절차를 밟은 대화록 제출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 여기에 권영세 전 주중대사·김무성 의원 등 새누리당 인사들이 대선 전 대화록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여론의 관심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으로 쏠리게 하는 국면 전환 역시 절실한 상황이다.
국정원 공개 때는 '쿠데타'라더니…명분 걷어찬 민주당
지난달 24일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 당시만 해도 "국가정보기관이 국가 기밀을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악용한 쿠데타적 항명"이라며 격렬히 반발했던 민주당 역시 이번 대화록 공개로 '역공'을 노리고 있다. 새누리당이 불리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NLL 논란을 이 참에 끝내고, 동시에 대화록 원본 공개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에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이런 결정이 오히려 '국정원 대선 개입 사태'를 희석시키고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에 대한 비판의 명분을 상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리적으로도 패착이란 평이 나온다. 이미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관련 발언이 'NLL 포기가 아니다'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에서, 굳이 절차적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원본을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다.
새누리, '책임 회피'-'국정원 파일도 까자' 양동 작전…민주당 출구는?
비판이 민주당에 쏠린 사이 새누리당의 '책임 회피' 조짐도 보인다. 새누리당 김기현 정책위의장은 이날 한 라디오에 출연해 "새누리당이 앞장서서 제출 요구를 한 것이 아니다"라며 "새누리당이 공개를 안하자고 하면 뭔가 숨기는 것처럼 보이니 안할 수 없어서 수동적이나마 민주당을 따라간 것"이라고 밝혔다. 향후 벌어질 위법 논란을 민주당 쪽으로 돌려 정치권의 책임 공방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김 정책위의장은 "어제 민주당이 의원총회에서 최종적으로 정상회담 관련 자료들을 열람, 공개키로 하는 당론을 정했다"며 "민주당이 그렇게 했으니 우리도 의총을 통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 전날 새누리당은 민주당이 대화록 공개를 당론으로 결정하기 전까지 분위기를 살피며 당론 결정을 미뤘다. 내부의 반발에도 민주당이 대화록 공개를 '구속적 당론'으로 확정한 뒤에야, 새누리당은 본회의 도중 2차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대화록 공개를 당론으로 결정, 의원 전원이 본회의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 과정을 주도했던 새누리당 소속 서상기 정보위원장은 "필요하면 국정원 녹음파일을 공개하겠다"며 당초 여야 합의 끝에 철회된 안을 다시 꺼내들었다. 서 위원장은 이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화록 원문의 열람·공개가 잘 진행되지 않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상임위 차원의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며 "국정원에 보관된 녹음 파일 공개를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정원 소장 녹음 파일은 새누리당이 공개를 주장했으나 민주당이 강하게 반발, 여야 합의를 통해 공개하지 않기로 결론 낸 사항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당 일각에서 다시 '국정원 카드'를 꺼내들며 논란에 군불을 지피고 있는 셈이다.
결국 새누리당은 '책임 회피'와 '국정원 카드'라는 양동 작전을 쓰고 있는 셈이데, '대화록 원본 공개'로 국정원 비판의 명분을 상당 부분 상실한 민주당이 어떤 출구 전략을 모색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당 지도부에선 대화록를 공개해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다.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불의한 정권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 조작, 날조된 남북정상회담 기록물을 정쟁의 도구로 남용할 수 없도록 쐐기를 박았다"고 전날 표결을 평가한 뒤, "이 기록물 공개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논란이 있는 것 같지만 한 마디로 더러운 물이 엎질러져서 바닥을 더럽히고 있는데 그것을 치우지 말고 그대로 둬야 한다는 논리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며 대화록을 '공개'할 방침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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