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국정원 사건의 국정조사에 합의한 지 반나절 만에 국면이 급격히 전환된 셈인데, 21일엔 민주당이 '선(先) 국정조사-후(後) 대화록 공개' 카드를 꺼내들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이 공개되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남북 정상 간의 회담 내용이 고스란히 담긴 비밀 기록물을 공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여야의 정략적 목적 때문에 국가 안보와 직결된 대화록 원본을 공개하는 것은 향후 북한과의 회담에서도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조급한 새누리, '위법'도 감수?…'공공기록물'로 보더라도 누설하면 '불법'
국정원 사건으로 수세에 몰렸던 새누리당은 '국면 전환'을 위해 위법 논란까지 감수하며 갈등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우선 발췌본 열람 자체가 '불법 행위'가 될 공산이 크다.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닌 공공기록물이기 때문에 국정원장이 허용하면 열람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여당 정보위원들이 열람했다는 발췌본이 대통령기록관이 아닌 국정원에 보관돼 있다 하더라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의 적용을 받는 대통령기록물로 봐야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대화록은 2부가 작성됐는데, 한 부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대통령기록관에, 또 한 부는 국정원에 넘겨져 보관돼 왔다. 결국 서 위원장의 주장대로라면 동일한 대화록을 단지 국정원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이유로 기관장의 허락만 있으면 쉽게 열람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대통령기록물의 경우 15년간 자료 제출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보호기간까지 두는 등 매우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가운데)을 비롯한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을 확인했다"며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을 열람한 사실을 밝혔다. ⓒ연합뉴스 |
새누리당의 주장대로 발췌본을 '공공기록물'로 보더라도, 열람 자체는 위법이 아닐 수 있지만 '비밀 누설' 차원에서 불법의 여지가 있다. 열람 당시 내용을 누설까지 않겠다는 서명을 한 새누리당 의원들이 발췌록에 담긴 내용을 공개하면 공공기록물관리법 제47조 '비밀 누설 금지' 조항에 따라 처벌될 수 있는 것이다.
검찰도 같은 이유에서 지난해 'NLL 양보 발언에 근거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도 그 근거가 되는 내용을 공개하진 못했다. 서상기 위원장 역시 기자회견 당시 이를 의식한 듯 "처음부터 끝까지 비굴과 굴종의 단어가 난무했다"는 자극적인 단어를 쓰며 노 전 대통령을 비판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진 못했다.
그러나 '뒤'에선 달랐다. 발췌본을 열람한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은 일부 언론에 구체적인 내용을 흘리며 '막후 공세'를 펼쳤다.
이날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엔 "(NLL 관련)법을 포기하자고 발표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제안에 노 전 대통령이 "예, 좋습니다"라고 답한 내용, "내가 봐도 NLL은 숨통이 막힌다. 이 문제만 나오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데 NLL을 변경하는 데 있어 (김정일) 위원장과 내가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고 노 전 대통령이 말한 내용 등 구체적인 발언이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의 전언을 통해 그대로 보도됐다.
공공기록물관리에관한법률 47조는 비밀 기록물 관리 업무를 담당했거나 비밀 기록물에 접근·열람했던 자는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에 따라 대화록을 열람한 새누리당 정보위원 5명을 대통령기록물관리법과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으로, 이들에게 발췌록 열람을 허용한 남재준 국정원장과 한기범 국정원 1차장을 국정원법 위반으로 각각 검찰에 고발했다.
민주, 전문 공개로 '맞불'…전문가들 "대화록 공개 신중해야"
새누리당과 국정원의 'NLL 역공'으로 '공수(攻守)'가 맞바뀐 민주당은 21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공개하자"며 승부수를 띄웠다. 공개의 전제 조건은 국정원 대선 개입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다. 전날까지만 해도 대화록은 국가 기밀 사항에 해당한다며 새누리당의 발췌록 열람을 거세게 질타하던 민주당이 아예 '전문'을 공개하자며 정면돌파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민주당의 이 같은 '강경 모드' 전환은 전문을 공개하더라도 손해볼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읽힌다. NLL 관련 부분만 떼어내지 않고 정상회담 전문을 공개한다면 새누리당의 정치적인 '짜깁기'와 곡해가 드러날 것이란 판단을 한 것이다. 2007년 정상회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지낸 문재인 의원 역시 이날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의 절차에 따라 대화록 원본은 물론 녹취 자료까지 공개하자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전문 공개는 새누리당 역시 요구하고 있다. 서상기 위원장은 전날 "NLL 포기 발언 전문 공개를 위한 범국민 촉구가 있어야 한다"며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영토 포기 동조세력"이라고 몰아 붙였고, 최경환 원내대표 역시 이날 오전 "어제 발췌본이 원본과 다르게 조작됐다는 주장을 민주당에서 하는데, 그렇다면 발췌본이 조작된 게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원본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역시 "문건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해 국회 요청이 있을 경우 법적 절차를 거쳐 전문 공개를 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상태다.
다만 새누리당은 민주당이 요구한 '선 국정조사-후 전문 공개'에 대해선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과 NLL 논란 두 건 모두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며 맞서고 있다.
그러나 여야가 가까스로 의견 일치를 봐 전문 공개를 추진한다고 해도 논란의 여지는 남는다. 민주당은 국회의원 3분의2 이상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공개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법적 절차를 밟았다 하더라도 국가 기밀에 해당되는 남북 정상의 대화록이 여야 모두의 정략적 목적에 의해 공개됐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처럼 △군사·외교·통일에 관한 비밀 기록으로 공개될 경우 국가 안전 보장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기록물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나 입장을 표현한 기록으로 공개될 경우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기록물 등은 자료 제출 요구를 15년간 거부할 수 있는 등 공개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15년의 보호 기간 중에 기록물을 열람하려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 의결을 얻거나 △관할 고등법원장이 해당 기록물이 중요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발부한 영장이 제시될 경우 등에 해당돼야 한다. 쉽게 공개된다면 대통령이 자신의 행위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공산이 커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전문 공개'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상 간의 회담 전문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은 국내외적으로도 전례가 없을 뿐더러 앞으로 남북 간 협상에도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여야의 '샅바 싸움'에 국가 안보와 관련된 비밀 문건이 쉽게 공개되는 전례를 남겨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남북 회담록, 더군다나 정상회담 대화록을 국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전면 공개한다면 기본적으로 회담에 임하는 당사자들에겐 신의와 비밀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일방적으로 대화록이 공개되는 상황에서 앞으로 북한이 정상회담은 물론 실무회담을 할 때도 신의와 비밀의 원칙을 지키려 하겠나. 결국 협상을 제대로 못하는 구실을 우리가 북한에게 제공하는 셈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화록 전문 공개는) 향후 각종 회담은 물론 남북 관계 개선에 상상하기 힘든 피해를 끼칠 수 있다"며 "정치권이 경계하고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꼬집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전문을 공개해 버리면 이후 대통령들도 남북 회담을 할 때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대화록 공개의 선례를 남기면 어느 대통령이 민감한 회담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겠냐는 것이다.
다만 고 교수는 "이미 요약본 형태로 공개가 됐고, 특정 내용이 잘못 인용되거나 부각될 수 있으니 오히려 진실 규명 차원에서 공개할 수 있다고 본다"면서도 "다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원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정치권이 신중한 태도를 보일 것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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