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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시간제 일자리? 말장난이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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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시간제 일자리? 말장난이지 않으려면…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시간제 일자리의 전제 조건

1998년 무렵, 간호사로 일하는 독일의 노조원들이 한국을 방문해 보건의료산업노조를 찾았다. 자연스레 근무 형태와 노동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여성이자 엄마이기도 했던 독일 노조원들은 파트타임, 즉 시간제 일자리를 노조가 요구한다고 소개했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엄마 입장에서 오전 근무나 오후 근무만 한다든지, 아니면 격일로 근무한다든지 하는 시간제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노조가 이것을 중요한 단체교섭 사안으로 사측에 요구한다는 설명이었다.

이 말을 들은 한국 노조 간부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당연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노동조합이 시간제 일자리, 즉 비정규직을 요구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런 반응에 독일 노조원들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한국 엄마들에겐 일만 중요하고, 육아는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물론 이날의 해프닝은 서로 이해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수긍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 노조원들은 독일에서와 같은 시간제 일자리라면 자기도 시간제로 일하겠다고 했고, 독일 노조원들은 한국에서와 같은 시간제라면 자기도 정규직을 고집하겠다고 화답했기 때문이다.

'동일 노동-동등 대우'와 노동자 경영 참가

독일 측 설명에 따르면, 시간제 일자리와 정규직(전일제) 일자리의 차이는 노동 시간의 차이밖에 없었다. 고용 안정이 보장된다. 시간당 단위 임금이 같다. 사회 복지는 물론 기업 복지 혜택이 같다. 성과급도 노동 시간에 비례해 공평하게 지급된다. 노동조합 가입과 활동의 자유는 완전히 보장된다. 무엇보다 시간제에서 전일제로 전환, 혹은 그 반대로 전환하는 것이 노사 대화를 거쳐 이뤄진다. 공장이나 사무실마다 '공동 결정'을 위한 노동자 경영 참가의 법정 기구인 종업원평의회(works council)가 있어 회사의 핵심 정보는 물론 인사권이나 경영권 관련 사안도 노사가 함께 논의하고 교섭한다.

고용 계획 수립, 신기술 및 새로운 노동 과정의 도입, 새 기계의 설치, 공장 구조와 작업 방식의 변경, 생산 시설의 설치와 확대, 신규 투자, 인사 관리, 해고, 직업 훈련, 직무 내용, 개별 노동자의 채용과 배치 전환을 결정할 때 노동자 대표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은 물론, 사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노사가 충분히 협의하고 교섭한다. 노동자 경영 참가를 통한 경제 민주화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독일 사정을 듣고 나니, 한국 노조 간부들로서는 시간제 일자리를 반대하고 전일제 일자리를 고집할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반대로 독일 노조원들은 한국형 시간제 일자리라면 자기들도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일을 하는데, 시간당 임금은 절반도 안 된다. 고용 불안은 일상이다. 사회 복지는 그림의 떡이고, 기업 복지도 언감생심이다. 성과급은 꿈도 못 꾼다. 노동조합 가입과 활동의 자유는 무시당한다. 무엇보다 시간제에서 전일제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대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강성 노조' 수준의 투쟁을 하지 않으면 회사의 기본 정보조차 공유되지 않는다. 인사권이나 경영권 관련 사안에 대한 노사 교섭은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앞장서서 무력화·불법화한다. 한국 노조원들로부터 이런 사정을 듣고 난 독일 노조원들은 시간제 일자리는 반대하고 정규직 일자리를 주장하는 게 노동조합의 당연한 임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 박근혜 대통령(자료 사진). ⓒ청와대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정되고 존엄성이 존중되는 일자리"

지금 정부는 시간제 일자리를 말하면서 "양질의", "반듯한",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고 있다. '좋은 일자리' 타령은 박근혜 대통령이 시초는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10년 신년 연설에서 "31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고, 양질의 일자리도 크게 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명박 씨가 말한 31만 개의 일자리는 대부분 저질의 나쁜 일자리였다. 필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자리가 무엇인지를 두고 국제 사회가 합의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좋은 일자리'(Decent Work)' 관련 정책이 그것이다.

ILO는 좋은 일자리를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정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생산적인 일자리"로 규정한다. 좋은 일자리이려면, 일자리 창출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질을 갖춰야 한다. ILO는 고용의 양과 고용의 질이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좋은 일자리를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본다. 고용 안정성, 노동 기본권, 사회 복지, 사회적 대화가 그것이다. 네 가지 요소는 불가분의 관계로 어느 하나가 빠지는 순간 좋은 일자리는 불가능해진다.

ILO의 목표인 '좋은 일자리'의 네 가지 요소를 한국 상황에 비추어 풀어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좋은 시간제 일자리는 고용 기간의 정함이 없는 정규직으로, 파견 노동 같은 간접 고용이 아닌 직접 고용이어야 한다. 관계법, 단체협약, 취업규칙, 근로계약에 '동일 노동-동등 대우' 원칙을 명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사정 3자의 공동 노력을 경주한다. 주 40시간을 명시한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 대기업은 물론 중소·영세 사업장의 노동 시간을 근로기준법에 맞게 단축한다. 나아가 국제 수준에 부합하도록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개선하고, 노동 시장과 노사 관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차별을 철폐한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가 강조하는 ILO의 8개 핵심 협약에 대한 비준을 완료한다(관련 기사 : '사람 사는 세상'과 노동자 결사의 자유). 나아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사회 복지를 실현한다.

시간제 일자리야말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한 사안

고용 안정성, 노동 기본권, 사회 복지 같은 거대 정책은 정부의 일방적인 드라이브나 기술-관료적 해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한 의제들이다. 이 때문에 ILO는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네 번째 요소로 사회적 대화를 강조한다. 대통령이나 고용노동부 장관은 오해하고 있는데, 대법원이 이미 판결해버린 '상여금의 통상임금화'는 사회적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없다. 노동자들이 받는 상여금은 일한 대가(代價)의 일부로 이를 임금으로 보는 것은 국제 사회의 상식이다. 나라 안팎의 자본가들이 반대한다고, 사법부가 거듭 확인한 국제 사회의 상식을 '사회적 대화'로 뒤집자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반면, 고용률 70%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반듯하고 좋은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이런 일자리를 만들 것인가는 사회적 대화가 필요한 의제들이다. 노사정 3자의 대화 과정에서 고용률이 높은 선진국들의 사례를 국제 비교할 수 있고, 유엔 공식 기구로 전문성을 인정받는 ILO로부터 좋은 일자리에 대한 컨설팅과 협조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국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적 기준에 맞는 좋은 일자리 모델이나 지표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고용률을 높이자는 대통령의 제안은 원칙적으로 옳은 방향이다. 시간제 일자리를 양질의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문제는 방법론이다(관련 기사 : "박근혜, 세상 물정 몰라도 너무 모른다"). 테크노크라트의 일방통행이 아닌 사회적 대화가 중요하다. 독일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작업장 수준에서는 노동 기본권이 충분히 보장되고 노동자 경영 참가가 활발해야 한다. 그리고 산업 및 전국 수준에서 고용 안정, 노동 기본권, 사회 복지 의제를 아우르는 노사 양자의 단체교섭과 노사정 3자의 사회적 대화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런 전제 조건들이 미시와 거시 수준에서 충분히 논의되고 성의 있게 실천되지 않는다면, "반듯하고 좋은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는 대통령과 장관의 말장난이 될 것이고, 5월 30일 있었던 한국노총-경총-노동부의 노사정 합의도 먼지수를 잘못 찾은 립 서비스로 전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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