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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큰 바위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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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큰 바위 얼굴'이다

[민교협의 정치시평]<10>안철수 현상? 언제까지 '영웅' 기다릴건가

영웅을 열망하는 민중

미국 문학의 고전인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은 민중의 마음 같다. 늘 민중들은 영웅, '큰 바위 얼굴'을 한 사람이 새 세상을 열어주길 갈망해 왔다. 한시도 고단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민중들은 하늘을 열고 영웅이 내려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큰 바위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통 왕조시대에는 왕이나 권문세도가들의 끔찍한 폭정을 직면할 때면 민중들은 운명 탓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뒤에서는 분노로 욕설을 퍼붓거나 '동대문서 뺨 맞고 서대문서 화풀이'하듯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간혹은 광대놀음을 보며 대리 만족을 해야 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열망했다. 민중의 생활은 늘 고단하기 마련이고, 새 세상의 꿈이 없다면 현실의 고통을 버티기 어려웠다. 민중은 죽도록 일해도 양반 귀족만 살찔 뿐 늘 가난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에 따라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조선 중기 이래로 권력이 문란한 틈을 타고 나타난 크고 작은 민란을 통해 낡은 세상을 갈아엎고 새 세상을 꿈꾸었다. 민란 속에는 이런 저런 영웅이 있기 마련이다. 민중이 기다린 영웅이 임꺽정이나 홍길동의 꿈으로 나타났다. 조선조 말기 갑오농민전쟁은 이미 생명이 다한 왕조에 대해 민중들이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갑오농민전쟁도 동학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조 당대에 새 세상의 꿈을 이루려고 했던 층들은 왕족들과 성리학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늘 권력에 가까이 있었지만 강력한 왕권에 휘둘리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부패한 왕권, 성리학적 세계관에 위배되는 왕이 등장하면, 소위 '역성혁명'을 통하여 자신들의 꿈을 이루었다. 조선조 되풀이되는 난(亂)이나 반정(反正)은 신하들의 치열한 논쟁과 정당성 속에서 왕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적 이상형 사회를 열지는 못했다.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당파의 정신에 부합하는 왕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지, 유교적 이상사회인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세상, '대동세상', 즉 '민중과 함께'하는 세상이라는 인식은 수사에 불과했다. 국가가 왕과 양반, 선비들만의 것이었던 세상에서 민중은 그저 그들을 빛내게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전통시대 민중들이 바라던 '큰 바위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철수 현상'에는 없는 '큰 바위 얼굴'

세월을 건너뛰어 민중이 영웅을 기다리는 것은 현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2012년 '안철수 현상'이나 2007년의 문국현 현상이나 이명박 신화는 각각 다르지만 비슷한 결이 있었다. 성공한 사람에 대한 열망이다. 그러나 차이가 커보인다. 최근 안철수 현상에는 이명박 신화의 절망에 대한 또 다른 기대감이 배어져 있다. 정보화시대 성공 신화에 새 정치(자본주의 제도 내의 공정성과 상식이 통하는 정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등) 신드롬이 안철수 현상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20, 30대 청년층에게 안철수는 50, 60대의 이명박 신화 이상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청년층에게 '안철수'는 '무의식'에 가까운 존재이다. 청년층이 유년기때 부모 외에 가장 가깝게 만났던 이름이 안철수연구소(안랩)의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들이었다. 또한 안철수는 초, 중등, 고등학교의 6과목에 걸친 교과서 16종에 등재된 인물이다. 과목을 살펴보면 초등학교 1종, 중학교 9종, 고교 6종의 교과서에 언급됐다. 교과별로는 도덕, 국어, 사회, 진로와 직업, 기술가정, 컴퓨터 일반 등이다. 심지어 초등학교 3년2학기 도덕 교과서는 국정이므로 한국의 10대들 중 안철수를 모르는 청소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세대들을 안철수 세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가운데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안철수의 새 정치 행보에는 안철수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청년들이나 낡은 정치에 염증이 난 중장년층까지 열광하도록 되어 있었다. 안철수의 성공신화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중산층이면서도 상식이 통하는 양심적인 자본가이고, 최고의 엘리트이다. 또한 그는 기성의 정치판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반공주의나 지역주의 등에 물들지 않은 채, 새 정치를 실현시켜 주리라는 기대를 받을 만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직을 박원순 현 시장에게 양보했던 것은 안철수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공고화시켜주는 근거가 되었다.

안철수 전 대선 후보가 대선 출사표를 던졌을 때 많은 민중들이 갈채를 던졌다. 그러나 지난 11월 23일 전격적인 사퇴와 12월 3일 대선캠프 해단식 때는 또 다른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그가 출사표를 던졌던 이유인 진심의 정치를 위한 공약과 정권교체의 의지는 별로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늘 해단하지만 오늘의 헤어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여운으로 해단식 발언을 마무리함으로써 '애매모호'함을 무기로 하는 노회한 정치인이나 외교관과 닮아 있었다. 해단식에 나타난 안철수 발언 속에는 새정치를 다짐했던 진심의 안철수 현상은 없었다. 그런 안철수 속에는 민중들이 바라는 '큰 바위 얼굴'은 없었다.

민주주의시대, 민중이 영웅이자 '큰 바위 얼굴'

우리는 민주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 주지하듯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인 되는 정치이다. 민주국가에서 국가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헌법적 상식이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자유와 평등이다. 일개 시민이나 정치적 지도자 모두 '한 표'라는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명하고 사안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 이래로 민주주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민주적 영웅들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최고의사결정권을 갖는 대통령, 수상, 정치적 지도자들이다. 민중들의 역할이란 그런 영웅들을 민주적 절차에 따라 뽑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곤한다. 정치가들에게 민주주의는 선거 때에만 필요한 장치이다. 평소에는 엘리트 정치, 제왕적 대통령에 의한 정치이다. 그야말로 민주주의 시대에도 민중은 민주주의를 위한 수사였다.

미국이 독립되기 전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펜실베니아의 총독이었던 영국인 펜(W. Penn 1644~1718)은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이 통치한다고 생각하게 하라. 그러면 그들이 통치받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근대국민국가 형성 당시 귀족들이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인식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엘리트의 입장에서는 우매한 백성들이 정치권력자를 선출하도록 하는 불쾌감을 감춘 표현이라고 할까? 선거 절차의 불쾌한 순간을 잠시 감수하면 엘리트는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엘리트가 아니라, 민중이다. 어느 틈엔가 민중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엘리트가 권력을 양보해준 것에 감지덕지하고 있다. 1960년대 이래로 1980년대까지 처절한 독재정권과의 투쟁 속에서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되었고, 민주주의가 가능했음을 망각하고 있다.

민중은 신자유주의 양극화 시대, 정경유착, 부패구조, 학벌주의 사회를 원망하며 정치적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 표현 방법이 정치적 무관심이고, 낮은 투표율이다. 그러나 지배 엘리트들의 입장에서는 선거의 정당성만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일반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투표율이 낮을수록 좋은 일이다. 사실 2007년도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대통령 선거 사상 최저의 투표율(63.0%)을 기록했고 총 선거인수에 대한 득표율이 30.5%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1위와 2위간의 표차가 531만7708표로서 역대 최대라는 것만을 강조했다. 사실상의 정치적 무관심의 덕으로 집권을 했던 것이다.

정치적 무관심 속에 지난 5년간의 반민중적 정치 행보는 국가재정파탄으로 끝나가고 있다. 성장은 했다고 하는데, 밥그릇은 비어있는, 소위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시대이다. 그 책임이 현 정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민중은 책임이 없는 것인가. 2007년 당시 대통령후보자는 4대강 공약(대운하공약의 변형)을 내걸었고, 친기업성향의 정책 공약, 강력한 한미동맹 복귀 공약, 반북적인 비핵개방3000 공약 등을 내걸었던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국민의 결정이었다. 심지어 안철수 현상을 만든 것이 안철수 자신이 아니고, 새 정치를 기다리는 민중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부언컨대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고, 권리와 의무의 정치이다. 국민이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의무를 제대로 행사해야 권리가 제대로 주어진다. 독재자와 독재자의 후계를 뽑아놓고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일은 어리석지 않은가. 폭력에 길들여지고 학습된 사람이 폭력적 방법을 내려놓는 일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듯이, 독재라는 정치에 길들여지고 학습된 사람이 민주주의 정치를 행할 것으로 상상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꽃은 영국 정치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 Mill)이 말하듯이 시민의 자발적 '참여'이다. 시민이 자발적으로 선거에 참여할 수 있고, 국가적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시민도 제대로 책임을 질 수 있다.

민중이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권력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원하는 정부를 만들기 위해 국민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권력의 독단을 행하고자 하는 정치엘리트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민중이 깨어있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수식어에 불과하다. 정치엘리트가 선정을 펴게 만드는 것도 민중이고, 악덕을 펴게 하는 것도 민중이다.

민중이 진정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치가 구현되는 것을 희망한다면, 구국의 영웅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자 세상을 만드는 사람은 국민 또는 민중 자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중 자신이 '큰 바위 얼굴'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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