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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욕망이 그들을 '보수'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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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욕망이 그들을 '보수'로 만들었다

[응답하라, 베이비부머·④] 베이비부머와 아파트의 역사

'사람 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닛'

소설가 이외수 씨는 아파트를 이렇게 표현했다. 번호 키를 열고 들어가면 아파트는 마치 비밀 캐비닛처럼 바깥과 차단된다. 철저하게 고립된 장소인 셈이다.

그런 특징을 지니는 아파트가 현재 한국 주거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서울 주거 형태는 약 55%가 아파트다. 한국 전체 인구의 50%가, 서울 인구의 70%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서구는 아파트 비율이 우리보다 높을 수는 있으나, 산업혁명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긴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와 차이가 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이 공공임대주택의 비중이 매우 높은 도시국가를 제외하고는 이처럼 단기간에 아파트비율이 급속도로 증가한 나라가 없다. 한국에서 아파트의 급속한 확산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닛'이 유독 한국에서만 급속히 확산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인구가 도시로 집중됐고 이는 극심한 주택난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유럽의 서민형 주택단지인 아파트가 집중해서 건설되기 시작한 배경이다. 무엇보다 건축 대지와 공사비를 절약하고, 토지이용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이점이었다.

서울 인구는 1960년에서 1970년 사이 245만 명에서 550만 명으로 두 배 증가했고 1970년에 1990년 사이 다시 배가 늘어 1060만 명을 기록한다. 1960년에서 1990년까지 거의 다섯 배 늘어난 서울 인구는 농촌과 타 도시로부터 대규모 인구 이동에 기인한다.

인구증가의 대가로 교통문제, 환경문제, 주택 문제 등 일련의 도시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 중 주택문제는 모든 도시에서 공통으로 나타났고, 서울에서 특히 심각한 양상을 보였다. 가구당 주택 수로 계산된 주택 보급률은 1960년에 84.2%를 기록했고 1988년에는 70%로 꾸준한 하락세를 보였다. 이후 주택 보급률 80% 선을 회복한 것은 1995년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서울 인구의 70%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걸 설명하긴 부족하다.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한국의 아파트 역사부터 살펴보자.

박정희 의장이 직접 테이프 커팅한 최초의 아파트

아파트 단지 개념으로 건설된 한국 최초 아파트는 1962년에 건설된 마포아파트다. 준공 기념식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테이프 커팅을 했을 정도로 주목받았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서민이 사는 집으로 치부됐다. 마포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8평이라는 좁은 공간, 공동변소를 쓰고 연탄가스가 복도를 가득 차는 서민아파트는 '고층 판자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당시 마포아파트는 입주 희망자가 거의 없었다. 입주자가 전 가구 수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 마포아파트 항공사진. ⓒ국가기록원

하지만 이런 아파트의 개념은 1970년대에 달라졌다. 1970년에 완공된 한강맨션이 대표적이다. 고소득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당시엔 최대 평수인 51평형과 55평형을 분양했다. 서민용으로 인식됐던 아파트에 고급화라는 이미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다 1974년 대한주택공사가 완공한 반포단지는 '아파트=고급'이라는 등식을 완성했다. 부유층을 겨냥한 반포단지는 가장 작은 평수가 22평이었다. 가장 넓은 평수는 복층 64평이었고 전 세대가 중앙난방이었다.

아파트 고급화 전략은 성공했다. 고급화를 표방한 아파트 분양이 시작되자 엄청난 인파가 아파트 분양을 받기 위해 장사진을 이뤘다. 분양아파트 수는 수요보다 턱없이 모자랐다. 이 시기쯤 정부는 아파트 분양 추첨제를 도입했다.

반포단지의 성공은 대단지 아파트 시대를 여는 전주곡이었다. 게다가 중동에서 벌어온 오일달러와 맞물려 민간기업이 아파트 건설에 적극 참여하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조성됐다.

주목할 점은 아파트 대단지 건설 붐이 일면서 고급화 이미지의 아파트는 또다시 이미지를 변신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주도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잠실단지는 앞서 건설된 반포단지에 비해 사회 계층이 구별됐다. 상류층을 겨냥했던 반포단지와는 달리 소득 수준이 중간 정도인 젊은 세대를 목적으로 지어졌다. 잠실단지 아파트 평수는 12평에서 16평에 불과했다.

그래서일까. 수요는 더 많아졌다. 1980년대에도 아파트 건설 붐은 꺼지지 않았다. 정부도 관련법을 개정해 아파트 건설을 독려했다. 1980년대에는 대형화되고 고층화된 건물 건설에 대한 규제가 전반적으로 더욱 완화되었다. 아파트 지구 이외의 주거지역에서 건물의 높이와 용적률을 제한했던 종래 도시계획법의 핵심내용이 달라졌다. 이로써 또 한 번의 도시 밀집화가 가능했다.

아파트 = 신분 상승을 위한 도구

하지만 고급화 전략과 대중화 전략만이 지금의 아파트 공화국을 만들었다고 보긴 조금 부족한 면이 있다. 박해천 홍익대 BK연구교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통해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압구정동의 대형 평수 아파트는 감히 넘볼 수 없더라도 1970년대 후반 이후 강남에 대규모로 건설된 중형 평형대 아파트들은 중산층이 자신의 평범치 않은 평범함을 확인하는 주거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여의도부터 이촌동까지 한강 변을 따라 마주 보며 늘어섰던 중·상류층 맨션아파트들이 1970년대 후반부터 8학군 위세에 휩쓸려 압구정동의 대형 아파트들에 패권을 인계했지만, 그 아파트들이 창출해낸 현대적 문화생활의 조건들은 강남 중산층이 자신의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하지만 아파트라는 주거 모델의 연속성에도 1970년대 한강 변과 1980년대 강남, 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한강맨션이나 여의도 아파트촌이 서울 출신의 젊은 중상류층이 기존 계층 질서를 확대해가는 과정의 산물이었다면 대다수 강남 아파트 단지들은 서울로 올라와 대학 교육을 받은 지방 출신의 젊은 세대들이 경제 성장으로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고 내 집 마련과 함께 신흥 중산층으로서 운신의 폭을 넓히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아파트에 입주하는 걸 신분 상승의 척도로 여긴 심리도 아파트 공화국에 일조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여기에는 쉼 없이 오르는 아파트 가격도 한 몫하고 있다. 아파트는 사두기만 하면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아파트를 분양받는 게 이윤의 원천이었던 시대였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가구는 중간계급으로 편입되고 체제의 수혜자가 됐다. 한국에서 아파트단지는 '중간계급 제조 공장이었던 셈이다. 그렇다 보니 너도나도 아파트를 투자의 목적으로, 신분상승의 목적으로 사기 시작했다.

베이비부머는 왜 보수화됐을까

하지만 과하면 문제가 생기는 법.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이 가져온 고성장은 시중 유동 자금을 증가시켜 주가와 더불어 부동산 가격 상승을 더욱 부추겼다. 특히 아파트 가격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렇다 보니 되레 새로 사회에 진입하는 세대가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걸 막는 게 아파트가 됐다. 이 탓에 피해는 1955년 이후 출생해 이제 막 내 집 마련을 준비하고 있던 베이비부머가 받아야 했다.

▲ 1987년 7월 9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대규모 시민이 운집한 모습. ⓒ연합뉴스

박해천 연구교수는 이 시기를 1987년 6.29선언으로 봉합됐던 사회적 갈등이 '집이 있는 계층과 없는 계층', 그리고 베이비부머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로 확산할 조짐을 보였다고 해석했다.

물론 정부도 이런 흐름을 인식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 문제를 또다시 아파트 공급으로 해결하려 했다. 노태우 정권의 주택 200만 호 공급이 그것이었다. 이는 여러 문제점을 낳았다.

"주택 문제 해결이 초미의 국가 현안 과제로 대두한 가운데 주택 200만 호 건설과 수도권 신도시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실제 분당, 일산, 평촌, 중동, 산본 등의 신도시에 입주가 시작되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설계자들은 내가 거주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감각의 모델이며 인지의 모델이라는 사실, 즉 서두에서 언급한 '장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은 신도시에 입주한 베이비붐 세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반골의 386세대가 빠르지 않은 속도로, 그러나 멈춰 서지 않은 채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강남에선 한창 1970년대생 신세대들이 대중문화의 열기에 휩싸여 청춘의 시간을 소모하던 이 시기, 신도시의 아파트 거주자들은 매일 출근길에 동네 부동산 창유리에 나붙은 평형대별 매매가 전단을 볼 때마다 우측으로 10센티미터씩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이동시켰다. 180만 원대의 평당 분양가가 안겨다 준 자산의 증가분, 즉 실거래가와 분양가의 차액은 그들의 욕망이 활활 타오르게 만드는 불쏘시개용 장작이나 다름없었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아파트에 미치다>를 통해 비슷한 의견을 제시했다. 전 교수는 한국 사회가 압축적 경제 성장 과정에서 여러 차례 위기, 즉 87년 6월 항쟁 등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선택하지 않은 건 아파트 공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노태우 정권 당시, 수도권 신도시에 세워진 200만호 아파트 단지는 베이비부머로 대표되는 집 없는 이들에게 아파트를 소유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기 충분했다.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다시 생겨난 셈이다.

전 교수는 이 시기를 베이비부머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로 변한 변곡점이라고 설명했다. 베이비부머는 그간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을 경험하고 참여한 세대지만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한 이들은 체제를 옹호하는 보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전 교수의 설명이다.

전 교수는 아파트를 가진 이 세대는 점차 급진적인 정치 이념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한국사회의 이념적 좌경화를 막는 결정적 방파제 역할'을 떠맡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아파트가 정치적으로 진보 성향을 가진 베이비부머를 보수화시켰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아파트에는 고도 성장, 부의 축적, 신분 상승 욕구 등이 복잡하게 혼재돼 있다. 거기다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서 체제의 안정화를 꾀한 정부의 의도도 섞여 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아파트 공화국'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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