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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국민을 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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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국민을 믿지 못했다

[이태경의 고공비행] 유신 없이 중화학공업화는 불가능했다고?

박근혜 캠프의 좌장격이라 할 홍사덕 전 의원이 '박정희가 권력유지가 아니라 수출 100억불 달성을 위해 유신을 했고, 유신이 없었더라면 수출 100억불 달성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 모양이다. 수출 100억불 달성을 위해서는 중화학공업화가 필수적이었는데, 유신이 없었더라면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할 수 없었다는 게 홍 전 의원의 부연설명이다.

홍 전 의원의 발언을 들으면서 불현듯 과거에 읽은 김형아 교수(정치, 사회 변동학)의 <유신과 중화학 공업 -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이 생각났다. 이 책은 박정희의 공(功)은 경제성장과 조국 근대화이고, 과(過)는 유신으로 상징되는 민주주의 압살이라는 도식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부국강병을 꾀한 근대화주의자, 박정희

김 교수는 이 책에서 박정희를 부국강병을 꿈꾼 근대화주의자로 정의한다. 그리고 박정희의 근대화주의의 배경에는 민족주의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유신과 중화학 공업 -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에 따르면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직후부터 박정희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온통 공업화를 통한 경제개발이었다. 이는 1962년에 시작되어 비약적인 성과를 거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나타나며 그 구체적인 방법은 1964년부터 본격화된 '수출'이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위해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전시하의 총동원체제로 편성하고 자신이 그 체제의 정점에 선다. 경제발전을 위해 박정희는 사용 가능한 모든 대내외 역량을 동원했다. 자본과 금융에 대한 철저한 통제, 적극적 산업·무역·기술 정책, 재벌을 중핵으로 하는 경제성장, 일본과 국교 정상화, 월남파병, 냉전 국면을 이용한 미국의 수혜 등은 박정희가 급속한 경제개발을 위해 선택하거나 주어진 것들의 목록이다. 이때만 해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큰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KBS 새노조 제공

중화학공업화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 유신?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박정희가 가까스로 승리했던 1971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초야에 묻혔다면 그에 대한 평가와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평가도, 대한민국의 운명도 지금과는 자못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1971년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박정희는 의식과 토대의 양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개조(?)를 추구했다. 의식개조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토대개조는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이루고자 했다. 박정희가 국가개조프로젝트라고 불러도 좋을 수준의 변화를 추진한 배경에는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의 경제성장과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미국의 보호막이 걷힐지도 모른다는 박정희의 두려움은 자주국방의 일환으로 중화학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하게 하였다.

<유신과 중화학 공업 -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던 중화학공업화는 1973년 1월 공식화되었는데 이 중화학공업화는 박정희를 필두로 한국은행 출신의 김정렴 비서실장, 자동차회사 공장장을 지낸 오원철 경제수석비서관으로 구성된 이른바 '중화학공업화의 3두 체제'에 의해 추진되었다. 특기할 점은 박정희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경제기획원 관료들이 아니라 상공부의 기술관료들에게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우위와 적극적 간섭 등을 고려해 보면 결국 박정희식 경제모델은 자유방임보다는 세계시장을 염두에 둔 계획경제에 가까웠다고 평가해도 큰 무리는 없을 성싶다.

한편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세부 계획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유신헌법에 대한 기초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는 박정희가 유신체제로 상징되는 폭압적 정치체제 아래서만 중화학공업화라는 대역사가 가능했다고 사고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마리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당시 적지 않은 엘리트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유신'과 '중화학공업화'가 양날의 선택과도 같았다는 이러한 인식은 중화학공업화 추진의 핵심실세였던 오원철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요사이 많은 사람이 박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실패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 아래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화와 유신 개혁을 별개의 문제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한 것은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화가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시행되도록 국가를 훈련했기 때문이다. 유신이 없었다면 대통령은 그런 식으로 국가를 훈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1996년 10월, 2000년 1월 오원철 인터뷰), (<유신과 중화학 공업 -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본문 294P)

어쨌건 박정희의 의도대로 중화학공업화는 달성됐다. 재벌 중심 경제로 경도, 중복과잉투자라는 문제점이 고스란히 남았고, 유신 이후 대한민국은 박정희 1인과 가족들만 자유로운 완벽한 현대판 전제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하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국민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점증하는 요구에 더해 핵무기 개발로 상징되는 자주국방 노선으로 미국과 겪은 심각한 갈등은 결국 박정희 체제의 몰락을 가져왔다. 박정희의 통치기간 동안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는 너무나 부자유스러워졌고 경제적으로는 더 부유해졌다.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유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는가? <유신과 중화학 공업 -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의 저자 김형아 교수는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중화학공업화가 당시 가장 적확한 국가발전전략이었는지, 설사 그렇다 해도 유사파시즘 체제라 할 유신 없이는 이를 추진할 수 없었는지, 국민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 다시 말해 더 성숙한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할 수는 없었는지 등의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백보를 양보해 박정희가 종신집권 야욕이 아닌 중화학공업화 달성을 위해 유신을 단행했다 해도 그런 박정희의 결단에 동의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박정희가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국민들의 주체적 역량이라는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중화학공업화와 맞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선의를 인정한다 해도 박정희가 국민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다.

박정희의 여성 아바타처럼 보이는 박근혜는 그 아비 박정희와는 달리 국민들을 신뢰하고 국민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운명을 개척하려 할까? 유신에 대해 박근혜가 한 발언을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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