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방의 'P'자도 모르는 A씨였다. 유명 가맹점 업체에 모든 걸 맡겼다. 실내장식비, 컴퓨터 구매비 등에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어갔다. 게다가 권리금으로 8000만 원이 들었다. 가게 월세는 240만 원. 열심히 일했다. 다행히 장사는 잘됐다. 오전 11시부터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은행대출금 1억 원도 차근차근 갚아나갔다. 한 달에 이것저것 다 빼면 500만 원 정도 남았다.
하지만 2008년부터 매출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현상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금융위기가 A씨 가게에도 미쳤다. 동네 상권도 마찬가지였다. 인근 호프집, 화장품 가게, 분식집 주인에게서도 '장사 못해먹겠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게를 내놓으려 해도 쉽지 않았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턱없이 낮아진 권리금이 발목을 잡았다. 마음을 고쳐먹고 버텼다. 고객 예약제를 도입하고, 은행에 추가 대출을 받아 새 컴퓨터를 장만했다.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렵게 가게를 꾸려나갔다.
겨우 먹고 살만해졌다. 그러자 이번엔 건물주가 문제였다. 월세를 3배나 올렸다. 못 내겠으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답이 안 나왔다. 차라리 장사를 접는 게 나았다.
고심 끝에 가게를 팔기로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건물주가 요구하는 월세를 내려는 사람이 없었다. 가게를 보러 온 사람 대부분은 '권리금은 맞춰줄 수 있지만 월세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앉아서 돈만 까먹는 날이 반복됐다.
더 버티다간 빚만 늘어날 거라 판단했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PC방을 정리했다. 권리금은 한 푼도 챙기지 못했다. 컴퓨터 등을 팔고, 보증금 등을 돌려받으니 3000만 원 정도가 남았다. 그동안 빚진 것도 갚을 수 없는 돈이었다. A씨는 "권리금만 받았어도 다른 곳에서 다시 장사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게 됐다"고 한숨을 쉬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보증금보다 3배 가까이 높은 권리금
A씨가 이런 상황에 부닥친 이유는 권리금이 시장에선 인정되지만 법적으론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권리금이다.
이런 권리금은 어떤 기준으로 책정되는 걸까. 우선 권리금은 점포 세입자가 다른 사람에게 점포를 넘길 때 받는 돈을 말한다. 점포를 터전으로 쌓아온 고객관계, 신용 등 무형 재산과 장소 이익 등에 관한 대가를 받는 거로 생각하면 된다.
세부적으로 보면 크게 세 가지로 권리금은 구분된다. 시설권리금, 영업권리금, 바닥권리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시설권리금은 업종을 같이 인수받을 경우, 발생하는 권리금이다. 점포를 그대로 이어받을 경우, 지급하는 비용을 말한다. 영업권리금은 구매할 점포 매출에 따라 책정되는 권리금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바닥권리금은 유동인구가 많고 입지 조건이 좋은 점포를 넘겨주는 대가로 치르는 금액이다. 권리금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요하며 금액상으로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업계 관계자는 "시설권리금이나 영업권리금은 그다지 중요하게 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핵심은 바닥권리금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권리금 규모는 얼마나 될까. 2011년 10월, 점포거래 전문기업 '점포라인'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서울 소재 점포 2117개의 평균 권리금은 3.3㎡ 당 255만6268원이었다. 평균 면적 158.67㎡로 치면 1억2291만 원이다. 반면, 평균 보증금은 4771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증금보다 3배 가까이 높다.
지역별로는 서울 중구 연평균 권리금이 1억3492만 원, 종로구 1억2681만 원, 구로구 1억2491만 원, 강남구 1억2433만 원, 서초구 1억1883만 원이다. 서울 대부분은 1억 원이 넘는다.
이렇다 보니 창업을 하려 해도 권리금이 부담스러운 게 현실이다. 2010년 중소기업청이 조사한 전국소상공인실태조사보고서를 보면 자영업자들이 창업 시 첫 번째 애로사항으로 꼽은 게 자금조달(54%)이었고 다음이 입지선정(43%)이었다. 전국 1만69개 사업체를 대상으로 했다.
▲ 서울 재리시장. ⓒ뉴시스 |
대기업에 내몰리는 자영업자
억 단위 돈이 오가는 권리금이지만 정작 책정 기준, 즉 바닥권리금 기준은 상당히 애매하다. 상권 근접성, 유동인구, 상권 변화 예측 등 종합적인 부분을 파악해야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이런 수치나 통계가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결국, 점포를 파는 업주나 부동산 중개업자에 의해 정해지는 게 권리금이다. 점포를 거래할 때, M&A 식으로 점포 가치를 산정해 거래 액수를 결정하는 외국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권리금 거래가 법으로 규정지어지지 않기 때문에 업계 관행으로 은밀하게 거래되고 있다. 이런 관행은 자영업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부동산 중개업자와 건물주가 서로 짜고 자영업자를 '물' 먹이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컨설팅 관계자는 "목 좋은 곳이 있다면 부동산 브로커가 건물주에게 월세를 5배로 부풀려 주겠다고 일종의 '펌프질'을 한다"며 "이게 가능한 건 목 좋은 곳을 선점하려는 대형 자본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중개업자의 이야기에 넘어간 건물주는 기존 세입자와 계약이 만료될 즈음, 월세를 높여 받겠다고 통보한다"며 "그러면 그 돈을 도저히 낼 수 없는 세입자는 그곳에서 보증금만 받고 빠져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게 가능한 건, 권리금은 건물주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돈이기 때문이다.
이는 통계 자료에도 잘 나타난다. 지난 2월, 수익형부동산 정보 분석기관 '에프알인베스트먼트'에서 서울과 수도권의 주요 상권 10곳(강남역, 명동, 종로, 건대입구역, 노원역, 신림역, 천호역, 분당 서현역, 인천 월동)의 1층 점포(12평 기준) 시세를 지난 3년간 조사해 합산평균치(10개 상권)를 구한 결과, 2010년 1월에 비해 올 1월 기준 권리금은 약 4000만 원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임대료는 500만 원가량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현상은 부동산 관계자가 말한 대로 중심상권 핵심부 상가에 관한 가맹점 출점경쟁이 심화했기 때문이라고 에프알인베스트먼트는 분석했다. 대부분 대기업이 홍보나 시장조사 목적으로 안테나 매장 운영을 위해 막대한 임대료를 제시하며 들어오는 추세라 기존 세입자들은 쫓겨나는 상황에 부닥쳐있다는 것. 홍대 리치몬드제과점도 이와 비슷한 예다.
실제 서울 지역 주요 상권 내 가맹점 업체 비중을 조사한 결과, 2005년에 비해 평균 10% 이상 가맹점 업체 상권 점유율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대기업 가맹점 말고도 기존 패션(의류, 화장품, 잡화 등) 업종에 더해 커피전문점, 패스트푸드에서도 유동인구가 많은 핵심입지를 선호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건물주는 1년 단위계약을 맺어놓고 수시로 세입자를 바꾸면서 임대료를 올리는 실정이다. 홍대에서 20년 가까이 칼국수집을 운영해온 B씨는 "갑자기 건물주가 임대료를 5배 가까이 올려달라고 했다"며 "결국 도저히 낼 수 없어 가게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B씨는 "권리금도 한 푼 받지 못하고 나왔는데 얼마 뒤 그 자리에 대형 프랜차이즈 떡볶이 점이 들어섰다"고 밝혔다.
▲ 서울 지역 주요 상권 내 프렌차이즈 업체 비중을 조사한 결과, 지난 2005년에 비해 평균 10% 이상 프랜차이즈 업체 상권 점유율이 증가했다. ⓒ에프알엔베스트먼트 |
사면초가에 놓인 자영업자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는 권리금은 불경기에도 영향을 받는다. 경제가 불황기로 접어들 경우, 자영업자 목을 옥죄는 장치로 작용한다.
국내 자영업자 수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웃도는 수준으로 터키, 그리스, 멕시코 3개국만이 우리보다 자영업 비율이 높다. 지난 29일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자영업은 자영업과 경쟁한다 - 자영업자의 10대 문제'를 보면 자영업자 과반수는 3년을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는 실정이다. 월평균 소득은 150만 원에 불과했다.
중소기업청이 2010년 조사한 내용도 비슷하다. 자영업자의 월평균 순이익은 149만 원으로 3년 전보다 감소했다고 응답한 이는 73%이지만, 증가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6%에 불과했다. 또한, 개업 초기 대비 고객 수가 증가했다는 응답은 8.3%였지만 감소했다는 응답은 70%를 차지했다.
하지만 쉽게 장사를 접지 못했다. 자영업을 시작할 때 치른 권리금이라도 받는다면 가게를 내놓겠지만 불경기엔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응답자 중 35.1%가 권리금을 회수하기 어려워 계속 장사를 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2010년에 나온 '권리금에 대한 상가건물임차인의 행태분석' 논문을 보면 설문에 응한 자영업자 995명 중 32.6%가 권리금을 반환받았지만, 67.3%가 반환받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뒤이어 들어올 자영업자가 있다면 권리금을 받을 수 있지만, 들어올 자영업자가 없다면 가게는 공실로 남기 때문이다.
빚을 내 자영업을 시작했으나 경기가 어려워지자 빚만 쌓이는 자영업자. 계속 장사를 해도 빚만 쌓이는 자영업자가 상당수다. 가계부채는 임금근로자의 두 배인 9000만 원에 달한다. 그나마 목이 좋아 이익이 남는 가게는 대기업에서 눈독을 들여 언제 빼앗길지도 모른다. 권리금이라도 받고 나간다면 다른 곳에서 다시 자영업을 할 수라도 있겠지만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권리금은 그마저도 어렵다. 이래저래 사면초가에 놓인 자영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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