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서는 "유로존 위기, 미국 더블딥, 중국 경제 경착륙이 겹쳐 2013년쯤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발생할 수 있다"(뉴욕대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3~4년 전만 해도 이런 말을 믿는 사람이 얼마 없었지만,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그럴 법한 얘기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김석동 금융위원장도 '공황' 가능성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던가. 강만수 전 장관은 지금의 공황이 1930년대의 그것보다 더 심할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하고 있다. 유독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만 낙관적인 전망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행정관료들 사이에는 일종의 역할분담이 이뤄진다. 기획재정부는 '위기가 아니다'라는 쪽을 강조하며 경제상황을 안심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반면, 금융위원회는 위기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언급하는 편이다.
뒤집어 얘기하면,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위기 영향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를 보려면 기획재정부가 아니라 금융위원회 얘기를 주목해야 한다. 공황이 한국에 들이닥치기 하루 전까지도 기획재정부는 '위기가 아니다'라는 말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할지 모른다.
쉬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위기'
<인사이드 경제>가 항상 강조해 왔듯이, 그물망처럼 엮인 세계 경제체제에서 위기는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움직인다. 위기가 지연되거나 진정되어 보이는 그 순간에도, 위기는 활동을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해 활약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체제가 변화한 가장 특징적인 측면이다.
지금까지 위기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우선 2008년 말 미국 금융위기 직후 2009년 초까지 중국의 제조업 위기가 발생했고, 세계 각국이 엄청난 재정을 쏟아부어 2009년 중반쯤에는 위기가 진정되는 듯 보이다가, 2009년 말부터 유럽 재정위기가 몰아치며 다시 세계 경제를 강타했다.
이렇게 미국, 중국, 유럽 등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중심국들에서 순차적으로 위기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1997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환란 위기나 2001년 아르헨티나 디폴트 사태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당시 위기의 발생 범위는 몇 개 국가 또는 일국으로 제한되었고, 따라서 IMF 구제금융 등의 수단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당시와 달리 세계 자본주의의 중추를 담당하는 중심국에서 발생했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4년이 지났지만 위기의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중심국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 유럽의 위기 사이에 각각 다른 국면들이 펼쳐지게 된다.
이를테면 2008년 미국 금융위기는 곧바로 동유럽 국가들의 신용위기, 재정위기로 이어졌다. 서방의 금융에 의존해오던 동유럽 국가 경제의 취약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루마니아, 폴란드, 아이슬란드, 헝가리 등 주요 동유럽 국가들이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거나 구제 패키지를 지원받았으며, 이 흐름은 10월경 인도에 인접한 파키스탄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그리고 2009년 초까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수출 주도 국가들의 제조업 위기가 오는데, 엄청난 국가 재정을 쏟아부으며 위기 타개책을 쓰게 된다. 그래서 2009년 여름쯤이면 위기가 진정되는 듯했으나, 좋지 않은 신호탄이 터졌다. 2009년 11월, 세계 자본가들이 '사막의 기적'으로 칭송해마지 않았던 두바이가 디폴트 위기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유럽 재정위기가 터져 나오게 된다.
2010년 한 해 동안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유럽 전체를 휩쓸고 간 재정위기 이후 다시 중심국에서 위기가 터져 나온 건 작년 8월, S&P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한 직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주식시장이 폭락한 사건이었다. 그럼 유럽 재정위기와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사이에는 위기가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른바 '재스민 혁명'으로 알려진 튀니지,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아프리카 대륙으로 위기가 옮겨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재스민 혁명'을 독재 정권에 맞선 민주화 운동 수준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엄청난 물가 상승과 실업률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직접적인 정권 퇴진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지난해 8월 미국 신용등급 강등 이후 전 세계 자산시장이 폭락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2차 재정위기가 발생했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렇듯 지난 4년의 과정을 반추해보면, 위기는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활동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어느 한 나라에서는 잠시 위기가 멈춘 듯 보이는 순간이 있기도 했지만, 바로 그 순간에도 위기는 다른 나라로 이동해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풍선의 어느 한 부분이 불룩하게 나와 있어서 그곳을 누르면 다른 부분이 불룩해지는 것처럼, 유럽이나 미국, 중국의 위기를 좀 벗어났다 싶으면 다른 부분에서 위기가 터지는 식이다.
▲ 주택 대출금을 갚지 못해 강제퇴거 위기에 몰린 스페인 시민들이 수도 마드리드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는? 더 가난한 나라들로 이동 중!
여기에도 일종의 법칙이 있는데, 특정 국면에 위기를 맞이한 중심국들은 가난한 나라에 위기를 전가하는 방식으로 국면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경제가 중심국들을 중심으로 그물망처럼 엮여 있다는 점에서, 이 법칙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미국의 소비가 위축되면 곧바로 미국 소비를 위해 생산하던 중국의 제조업에 위기가 오고, 중국에 부품과 원료를 제공하는 동남아시아 수출기업이 위기를 맞는 것처럼 말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곧바로 한국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이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데, 그때마다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해둔 돈을 빼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그리스·스페인 위기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일 뿐, 조만간 다른 곳에서 활동을 재개하게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접한 동유럽 국가인 슬로베니아가 구제금융 신청에 나설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유로존 위기 역시 유로존 안에서 더 가난한 나라들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이번 위기가 중심국 밖에서 발생한 것이었다면, 더 가난한 나라들에 위기를 전가하는 방식으로 벗어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중심국이 위기를 아래로 전가하기 때문에, 중심국에서 터질 위기가 주변국에서 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이번 위기의 근원지는 중심국들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주변국으로 위기를 전가해도 해소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상황이다. 특히 더 가난한 나라들의 경우에는 위기가 터져 나왔을 때, '재스민 혁명'처럼 민중들의 정권 퇴진 투쟁이 터져 나오기 때문에 무한정 위기를 떠넘길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현재의 유로존 위기 역시 한동안 동유럽을 떠돌다가 아프리카·동남아시아·중남미의 더 가난한 나라들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중병에 걸린 모순 자체를 치유하기 전에는, 결국 다시 한 번 중심국으로 위기는 옮겨오게 된다. 그러한 국면의 결과가 '퍼펙트 스톰' 아니겠는가.
그 많은 재정 투입, 도대체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갔나?
유럽과 미국·중국 모두 위기의 출발이 무엇 때문이었느냐는 달라도, 종국에는 재정위기로 치닫고 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재정 투입을 했기에,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자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축통화를 갖고 있는 미국은 달러화를 마구 찍어내기(이른바 '양적 완화')까지 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시중에 돈을 그토록 많이 풀었는데, 왜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은 것일까? 미국만 해도 오바마 행정부에서만 몇 조 달러 규모의 재정적자가 늘어났는데, 지난달 실업률은 8.2%로 오바마 취임 전과 차이가 거의 없다. 엄청난 규모의 재정 투입이 있었는데, 도대체 그 많은 돈은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그냥 공중에서 증발해 버린 걸까?
사실은 두 가지 모두이다. 투입된 재정은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기도 했고, 공중에서 증발해 버리기도 했다. 돈이 어떻게 마술을 부려 공중에서 증발하는지는 나중에 따져 보기로 하고, 우선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갔는지부터 살펴보자.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재정 투입은 대자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이를테면 무려 22조 원이 투입된 한국의 4대강 사업에서, 대부분의 사업이 대형 건설사에 낙찰되며 싹쓸이됐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이 사업에 투입된 건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건설 자본이 챙겨간 액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 할 수 있다.
4대강 사업은 한국의 특유한 현상이라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거의 유사한 방식의 재정 투입이 이뤄진 분야가 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후 미국에서 빅 3가 파산 위기에 처하는 등, 국제적으로 자동차 산업 위기가 발생하자 '폐차 보조금'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신차를 구매하거나, 혹은 친환경 차량을 구매할 경우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이다.
한국의 경우 2009년 5~6월에 2개월 동안 개별소비세 30% 인하, 그리고 2009년 5~12월에 '노후차량 교체 시 세금 감면'이라는 방식으로 폐차 보조금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를 통해 소형차 구매 시 약 75만 원, 대형차 구매 시에는 최대 250만 원까지 가격 할인 효과가 발생했으며, 이명박 정부는 이 보조금 제도에 최소한 수천억의 국가 재정을 투입했다.
폐차 보조금 제도는 소비자에게 혜택이 가는 것인데 이걸 대자본 호주머니에 쌓인다고 말할 수 없다고 반론을 펼칠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단 한 달 전 <조세일보>에 실린 다음 언급을 보면 그런 믿음에 고개가 갸우뚱~해질 것이다.
"하지만 현대차는 성능 개선과 새로운 옵션(사양)을 장착한 신차를 내놓으며 세금이 감면되는 만큼 가격을 올리는 교묘한 상술을 폈다. 최다 판매 차종인 소나타의 가격을 7% 인상하고 베르나의 경우 최고 13.9%까지 인상을 단행하여 소비자에게 돌아갈 이익을 가로챘다." (<조세일보> 6월 4일자 민경종 전문위원의 글, "현대차, MB정부 4년간 받은 특혜 '백화점 수준'"에서 인용)
한쪽에선 노동자들 죽어나가고 있었는데…
개별소비세 인하, 노후차량 세제 지원 등 수천억의 국가 재정이 폐차보조금으로 나가기 시작하던 2009년 5월은 어떤 때인가? "해고는 살인"이라며 3000명에 달하는 정규직·비정규직 정리해고에 맞서 원·하청 공동으로 점거파업이 시작된 시기이다. 법원, 채권단, 정부 모두 쌍용차의 '유동성 위기'를 인정해 법정관리와 정리해고를 정당화했다.
그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준다 하더라도, 고작 1000억~2000억 원의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였다. 그 당시 이명박 정부는 무려 22조 원의 혈세를 4대강 사업에 쏟아붓겠다고 하고 있었다. 같은 자동차 산업에서도 폐차보조금 제도를 도입하며 수천억의 돈을 퍼부어주던 시절이다.
국가재정 투입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판매량이 급감하고 미국의 빅 3 중 GM과 크라이슬러가 파산보호신청을 해야 했던 2009년, 국내 자동차업계의 내수 판매량은 2008년보다 오히려 늘어나는 기염을 토했다. 2008년 대비 국내 자동차 판매증가분이 23만8000대에 달했는데, 그중에서도 현대기아차가 95.7%인 22만8000대 판매를 늘려 '싹쓸이'를 했다.
ⓒ<조세일보>(6.4)에서 재인용 |
위 현대자동차 영업실적을 보면 한국의 폐차보조금 제도가 현대차의 이익에 어떻게 복무했는지 금방 드러난다. 세계 자동차 산업의 위축으로 인해 현대차 매출액 중 수출매출은 4조 원가량 줄어드는 반면, 내수매출은 무려 3조 8000억 가까이 늘어나게 된다.
2009년 자동차 산업 최대 위기를 현대차는 이명박 정부의 폐차보조금 덕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의 탄탄한 지원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2010년에는 수출매출을 회복하여 승승장구 성장세를 이어가게 된다.
이게 바로 운영자금 1000억~2000억 유동성 위기로 수천 명이 살인이나 다름없는 해고통보서를 받고 경찰특공대와 헬기 최루액 난사에 맞서 77일간 점거파업을 하던 그 시점에 벌어진 일이다. 엄청난 규모의 재정투입! 그게 누구의 호주머니를 강탈해서 누구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는지 쉽게 알 수 있는 대목 아닌가!
그렇다면 위기의 대가는 수혜자가 지불하라!
올해 최저임금이 고작 280원 오른 시급 4860원으로 결정 나자 경총을 비롯한 자본가들이 난리법석을 피운다. 경제가 어려운데 이게 웬 말이냐면서 말이다. 엄청난 국가재정 투입으로 수조~수십조의 이윤을 올리고 있는 그들이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한 시간 일해 백반 한 끼 사먹을 수조차 없는 최저임금을 두고서 말이다.
2008년에 시작된 세계 경제위기는, 이제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점점 대공황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자신만 살아남으려는 자들, 즉 강자가 약자에게 위기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라고 강요한다. 중심국은 주변국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말이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던 위기의 전가 사슬을 참조하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심국이 주변국으로 위기를 전가하지만, 결국 다시 위기는 중심국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다른 변수가 없다면 중심국은 끊임없이 주변국이 위기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여 벗어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민중들의 저항이 터진 것이다. 그 저항은 결국 독재정권을 무덤으로 보내는 순간까지 지속되었다. 더 이상 위기의 비용을 이들에게 청구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중동·아프리카로 번져가던 재스민 혁명의 말미에, 결국 유럽의 2차 재정위기가 시작된 것이 바로 이 메커니즘이다.
그렇다면 지금 터져 나와야 할 것은 더 가난한 나라의 위기가 아니라, 지금까지 위기의 비용을 지불했던 이들의 저항이다.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민중은 물론이고, 중심국과 신흥국의 가난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이다. 위기로부터 오히려 혜택을 입었던 이들에게 비용을 물리도록 만드는 것! 앞으로 <인사이드 경제>는 그 방법을 여러분과 구체적으로 논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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