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 2일 저녁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교육실(서울 마포구)에서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를 주제로 강연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주최한 연속 강좌 '한국 경제와 복지국가' 중 7번째 강연이다.
정 연구위원은 1929년 대공황이 터지기 전후의 역사와 오늘날의 위기를 비교했다. 정 연구위원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정말 재수 없게도 80년 전 세계 대공황 때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공황이 터졌을 때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점도 비슷하고, "전 세계 진보 세력에게 자유주의, 긴축 논리에 적절히 대응할 논리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도 1930년대 초와 닮았다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200여 년간 자본주의를 움직인 핵심 사상이 자유주의"라고 말한 후, 이를 보수적 자유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로 구분했다. 정 연구위원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대처 전 영국 수상 등을 보수적 자유주의의 사례로 들었다.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이렇게 진단했다.
"영어로는 social liberal이라고 한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케인즈다. 1910년대에 영국 자유당이 역사적인 변신을 했다.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자, 당 내에서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처칠이 대표적이다. '자유, 시장 원리도 좋지만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해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1919년 자유당은 집권하자마자 누진소득세를 도입했다. (특수 상황인) 전시를 제외하고, 누진소득세로 복지를 하겠다는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 이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젊은 케인즈 같은 이들이었다. 이런 사상이 (대공황 때)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이 대목에서 정 연구위원은 '경제 민주화론자'로 분류되는 진보 성향의 학자들을 비판했다. 정 연구위원과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이종태 <시사IN> 기자는 <프레시안>을 통해 '경제 민주화론자'들과 한국 경제 성격 논쟁을 벌이고 있다.
정 연구위원은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social liberal 전통을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누진세와 복지를 강조한 건 몇 년 안 된다. 지난 20년간 이들은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고 시장을 강조했다. 케인즈 경제학을 이야기하는데, 실제로는 국가 개입보다 시장을 강조하는 맨큐 같은 뉴케인지언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이런 진보적 자유주의가 20년간 진보 세력을 이끌어왔다."
정 연구위원은 "김영삼·이명박 정부에서는 박세일·박형준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자유주의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주도했다"며 "이 두 자유주의는 공통점이 많다"고 말했다.
▲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프레시안(최형락) 자료 사진 |
"투자, 생산, 공급을 고민하는 복지국가 필요"
정 연구위원은 진보적 자유주의에서 벗어나, 사회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연구위원은 "보편적 복지국가는 성장과 대치된다고 하는 이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투자, 생산, 공급"에 대한 적극적인 해법이 복지국가 건설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케인즈 경제학은 수요 중심 경제학이다. 소득과 소비가 주요 관심사다. 경제 민주화론자들은 '복지국가가 소비와 소득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 복지국가가 되면 내수 시장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60퍼센트를 넘는데, 이걸 40퍼센트 정도로 낮춰야 한다. 일본은 15퍼센트 정도이고 미국은 5퍼센트도 안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소득과 소비도 늘려야 하지만 그것보다 총투자를 늘려야 한다. 소득과 소비만 이야기하는 복지국가가 아니라, 자본도 늘리고 평생교육과 연계된 노동을 공급해 완전고용을 달성하게 하는 그런 복지국가가 필요하다. 투자, 공급, 생산과 이에 대한 사회적인 통제가 필요하다."
정 연구위원은 영국-미국과 독일-스웨덴을 비교했다.
"흔히 '복지국가는 한물갔다'고들 한다. '케인즈 경제학은 1970년대에 무너지지 않았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공급을 중시하지 않는 복지국가였다. (수요 중심의 케인즈 경제학을) 문자 그대로 실천한 영국 노동당과 미국 민주당(의 방식)은 1970년대에 무너졌다. 그와 달리 독일과 스웨덴에서는 무너지지 않았다. 공급에 대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정 연구위원은 "스웨덴은 보편적 복지, 평생교육을 통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산업 정책을 통한 기업 육성 등을 한 묶음으로 해 복지국가가 됐다"며 높이 평가했다. 이어 "박정희 모델에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보편적 복지가 없었지만, 우리가 만들려는 복지국가는 보편적 복지, 노동권 보장 및 노동시간 단축, 평생교육 체제를 갖춘 나라"라고 말했다.
"세수 확대 핵심은 법인세가 아니라 개인소득세"
정 연구위원은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한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4대강 사업 등에 마구 쓰이는 예산"을 줄이는 등의 재정 낭비 방지 대책도 필요하지만, 세금 문제도 피해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 연구위원은 "세금 낭비를 줄이는 게 우선이고, 세금을 더 걷는 문제는 그 다음"이라며, "복지국가5개년계획 같은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연구위원은 세금 문제에서도 '경제 민주화론자'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정 연구위원은 "경제 민주화론자들은 법인세를 대폭 인상해 복지국가 재원을 조달하자고 하지만, 법인세를 더 거둬들일 필요는 없고 그동안 감면한 것만 없애면 된다"고 주장했다. 법인세를 낮추는 대신, 주주에 대한 배당을 줄이고 재투자 비율을 높이게 한 스웨덴의 경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공정 경쟁을 위해 소유 집중을 깨자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이라며 "(그와 달리) 난 종부세처럼 소유에 대해서가 아니라, 소득에 대해 과세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정 연구위원은 "조세 수입 중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이 개인소득세"라며 "누진적 개인소득세 중심의 세수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각종 교육비 공제 등 개인소득세 비과세 및 감면 제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보는 것이 대한민국 상위 30퍼센트"이며, 이로 인해 개인소득세에서 조세의 공평성 원칙이 무너졌다는 진단이다.
정 연구위원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같은 사람에게 33퍼센트가 아니라 프랑스처럼 75퍼센트의 소득세를 물리자'는 식의 이야기가 필요하다"며 "이런 걸 대선 공약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올랑드 대통령이 이끄는 프랑스 정부는 1년에 100만 유로(약 15억 원) 이상 버는 사람에게 75퍼센트의 소득세를 부과할 방침이다. 정 연구위원은 "이런 방안이 경제 민주화론자들의 재벌 개혁 방안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