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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전태일 통신]<83> 명동 '포탈라' 운영하는 민수 씨와 근혜 씨

이 글은 포탈라를 운영하는 민수 씨와 근혜 씨가 살아온 이야기이다. 나는 4년 전 두 사람을 만난 후 이 글을 집필했다. 그후 두 사람은 티베트 식당 '포탈라'를 열었고 나는 가끔 그곳을 방문해 인연을 이어왔다. 그리고 얼마 전 '포탈라'가 명동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글은 4년 전의 글을 꺼내어 몇 차례 수정한 것이다.

1. 근혜 씨 이야기

2007년 10월 9일 한글날. 근혜 씨를 만났다. 그녀는 불룩한 배를 내밀고 조심 조심 걸었다. 아기는 열흘 후면 세상에 얼굴을 내밀 예정이다.

18년 전인 1989년. 소녀는 열 번째 겨울을 맞이했다. 어느 날 소녀가 학교에 갔을 때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어서 집으로 가렴."

소녀는 조퇴하고 병원으로 갔다. 아빠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아빠의 얼굴은 화상 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소녀는 이날부터 57일동안 병원을 지켰다. 아빠는 세상을 떠났다.

아빠는 1980년 5월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의 길을 걸었다. 그는 거제도에서 대우조선 하청업체의 노동조합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해고되었다. 그후 노점상으로 생계를 잇던 중 도시환경정비를 이유로 단속하는 정부에 항의해 분신했다.
그의 이름은 이재식 열사이다.

소녀는 아빠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소녀는 혼자 울었다. 그후 소녀는 평범하게 자랐다. 강원도 원주에서 회사를 다녔고, 요리를 배웠고, 음식점에 취직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엄마의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려 했다.

서울에서 아빠의 친구들을 찾아갔다. 인사차 들른 것이다. 사무실 입구엔 <전국노점상연합>(약칭 전노련)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김흥현(전국빈민연합 의장) 씨가 말했다.

"네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하겠니?"


그녀는 시골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의견을 여쭈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지 못해 죄송했다. 내가 못한 일을 네가 해라."


이때부터 시골처녀는 전노련의 활동가가 되었고, 사회 부조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 재개발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근혜 씨. 안경을 쓴 여성이 이근혜 씨다. ⓒ프레시안(허환주)

2. 민수 씨 이야기

"티베트 출신의 네팔 사람입니다."

한글로 글을 쓰고, 한국어로 말하는 민수 씨가 말했다. 'Nobody is illegal. (누구도 불법노동자가 아니다!)' 그의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다. 그의 고향은 네팔 카트만두. 1996년 여행 중 우연히 만난 한국의 승려와 트래킹을 함께했는데,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 때문은 아니지만 인연은 그를 이 땅으로 불러들였다. 민수 씨는 1998년 11월 한국 땅을 밟았다.

그의 또 다른 고향은 티베트다. 1950년 중국은 제국주의 세력 척결을 내세워 티베트를 침략했다. 중국은 100만 명의 티베트인들을 살해했고 6000여 개의 사원을 파괴했다.

그의 조부모는 전쟁을 피해 달라이라마와 함께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로 피신했다. 부모님은 다람살라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네팔로 이주한다. 민수 씨는 네팔 카트만두의 <티베트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민수 씨의 원래 이름은 텐징 델렉이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달라이라마가 지어준 이름이다. 티베트는 이름을 지어준 스님의 이름을 그대로 쓴다고 한다. '텐징'은 달라이라마의 이름이다.

어린시절 그는 집에서는 티베트어를, 밖에서는 네팔어를 썼다. 현재는 한국어를 쓰고 있고 영어와 인도어도 배웠다. 한국에 오기 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은 감옥에 갇힌 일이다.

티베트 국치일을 기해 중국 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하다 검거되었다. 네팔 경찰은 중국 당국으로 넘길 22명 명단에 그를 포함시켰지만 다행히 보름 만에 풀려나게 되었다.

민수 씨는 여행을 좋아했다. 돈만 모이면 떠나고 싶었단다. 한국에 머물 계획은 아니었다. 미국행을 준비했는데 네팔인이라면 무조건 불법 체류자로 보는 공항 직원들의 고압적 태도가 그를 한국에 머물게 했다.

1998년 11월. 낯선 땅에 도착한 민수 씨는 수색에 있는 인쇄소와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 그가 다닌 직장은 모닝글로리의 하청업체였다. 그후 동대문의 봉제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속칭 노가다를 하기도 했다. 경기도 여주에서 미나리 재배 일도 했다. 월급을 빼앗기기도 했고, 이유 없이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러다 이주노동자 단속이 심해 한 달 정도 쉬던 중 시청 성공회성당 농성장에 갔다. 농성장에서 천막 치는 일을 도우며 일주일 정도 머물렀는데, 이때 처음 '이주노동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탄압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부당한 제도를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성은 3개월가량 진행됐다. 그가 처음 농성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정부의 단속으로 자살한 이주노동자가 3명이었다. 3개월 후, 희생자는 12명으로 늘었다. 민수 씨는 몇 번을 결단했다.

"이주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언론은 이들이 왜 죽었는지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때 나 하나 죽으면 변화된 세상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노동허가제 쟁취를 위한 투쟁은 389일간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한 민수 씨는 농성장에서 음향기기 설치 작업을 주로 했고, 이때 문화일꾼들과 인연을 쌓는다. 농성을 마치고 <이주노동자조합(이하 이주노조)> 활동가로 일할 때 문화일꾼들과의 인연으로 음향업체 '자유'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 민수 씨. ⓒ김영길 사진작가

3. 근혜 씨와 민수 씨 이야기

근혜 씨는 이주노동자 농성장에서 율동에 열중하는 민수 씨를 처음 보았다. 춤 추는 일을 좋아하는 민수 씨가 이주노동조합 동대문 분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다. 그 후 이주노동조합 활동가들이 회의 장소로 전노련 사무실을 이용하면서 만남이 잦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결혼에 대해 운을 띄운 건 민수 씨다. 결혼하면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며 분위기를 만들었다. 남녀 간의 일에 다소 둔한 근혜 씨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민수 씨는 기다리다 못해 결혼해달라고 말했다.

"저와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 않고 무엇보다 나를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냥 남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 사람 때문에 바뀌었어요. 그리고 아내는 사람들 말을 잘 들어주는 재능이 있어요."

"민수 씨는 제가 화낼 때 잘 받아줘요. 감수성이 풍부한 데다 섬세하고 자상하며 상대방을 잘 배려하죠. 손재주도 많고 제가 부족한 면을 많이 갖춘 사람이죠. 이 방도 통째 남편이 꾸몄어요."


민수 씨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한 네팔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깨어 있는 분이세요. 딱 한 마디 하셨어요. '남의 딸 고생시킬 거면 하지 말아라.'"

결혼식은 여의도 한강고수부지에서 한국 전통혼례로 열렸다. 민수 씨는 한국에 살면서 한 번도 전통혼례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한국식 전통혼례를 준비했다. 한국의 '빨리빨리' 결혼문화가 싫었던 터라 장장 5시간에 걸쳐 결혼식을 진행했다. 가수 연영석이 결혼 축가로 「코리안 드림」을 불렀다.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내 돈을 돌려주세요


노래를 들으며 민수 씨는 펑펑 울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도 함께 울었다.

4. 나는 이주노동자입니다!

두 사람은 딸이 태어나면 아기의 이름을 '새옴'으로 지어줄 계획이다. '새'는 새롭다. '옴'은 오다. '새날을 안아온다'는 뜻이란다. 호주제 폐지 덕에 아기는 엄마의 성을 얻게 될 것이다. 아기를 위한 예비 부모의 덕담을 부탁했다.

"아기에게 다른 세상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이 조금이라도 없어지는 세상을요."

"거친 세상에서 내가 살아왔듯 역경을 잘 이겨내기 바란다. 네가 거둘 세상의 열매는 네가 어떻게 씨를 뿌리느냐에 달려 있다."

민수 씨는 한국에서 결혼한 이주노동자들의 모임을 만들고 싶단다. 단체를 만들면 이주노동자가 자유롭게 일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근혜 씨의 아버지는 어제(10월 8일) 명예회복되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살아온 인생을 책으로 내고 싶다고 해서 도와드릴 계획이다. 민수 씨에게 물었다.

"당신은 한국인인가요? 네팔인인가요? 티베트인인가요?"
"아뇨. 나는 이주노동자입니다."


그의 이메일 아이디는 '이노민수'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네팔에 갔다 다시 돌아와 합법적으로 활동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거부했다. 그는 이주노조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 크다.

"전 세계적으로 이주노동자가 직접 운영하는 독자적인 노동조합은 한국이 처음입니다."

어떤 환경이든 금세 적응하는 민수 씨에게 국가는 중요치 않아 보였다. 민수 씨는 세계의 이주노동자, 그리고 이 땅의 한국인들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언론은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식의 보도를 통해 노동자 사이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가 벌어들이는 달러가 얼마인지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모든 사업장에 이주노동자가 있습니다. 한국이 원해서 이주노동자들은 이 땅에 왔습니다. 이 나라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 원치 않았으면 우리가 들어올 수 없잖아요. 이제 한국 사회는 백만 외국인 시대입니다. 더 이상 단일 민족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제 한국도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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