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말 이후 급락하고 있는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을 보다 유연화시켜 비정규직을 확대해야한다는 처방이 재계에서 나왔다. 최근 경기둔화 조짐이 뚜렷해지면서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대한 요구가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노동시장 유연성의 또다른 측면으로, 노동인력의 직무수행 능력에 초점을 두는 기능적 유연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특히 고용과 해고의 용이성을 추구하는 수량적 유연성의 강화는 사회 양극화로 귀결될 뿐만 아니라 이런 방안이 장기적으로 기업 경쟁력 강화에도 도움이 될지도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경연 포럼 "비정규직 늘리자"
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 주최 강연에서 허찬국 한경연 경제연구본부장은 "1990년 대 말 이후 성장률 급락과 일자리 창출의 정체는 근본적으로 인적 부존자원 활용의 실패 탓"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경제의 실패: 인적자원의 낭비'란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허찬국 본부장은 "1980년대까지는 상대적 저임금과 빠른 기술습득 능력을 바탕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며 "이는 인적 부존자원 활용에 성공했기 때문"이라며 주장했다.
허 본부장은 이어 "15~64세 인구 중 취업자 비중은 신생 동구권과 터키, 멕시코 등 저소득 국가와 비슷한 수준인 63.6%(2004년 기준)에 불과하다"며 "낮은 고용률은 경직된 고용관행으로 기업들이 고용을 기피하기 때문에 유발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세계은행 자료를 인용하며 "(우리나라와 같은) '고용 낙제국'들은 창업 용이도나 고용과 해고 용이도, 투자자보호 정도가 공통적으로 세계에서 낮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며 "특히 법적 고용보호 규제 강도가 높을수록 고용률은 낮다"고 고용률과 고용보호 규제와의 상관성을 강조했다.
허찬국 본부장은 이를 바탕으로 "비정규직 보호 강화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의 고용 유연화를 통해 전체 고용 증대를 도모해야 할 시점"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노동시장의 유연화 목소리 주춤했던 재개, 왜?
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비정규직 증대, 정규직 고용보호 완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재계에서 처음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IMF 외환위기 이후 개방적 경제구조로 우리 경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노동시장 경직성에 대한 비판은 재계와 이에 동조하는 각 연구기관의 단골 메뉴였다,
그러나 지난 1~2년 사이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확산되고, 정부마저도 이 문제에 대한 법·제도 개선을 검토하면서 이런 종류의 주장은 주춤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추세와 정반대로 '비정규직을 더 늘려야 한다'라는 취지로 마련된 이날 한경연 포럼은 재개가 또다시 전가의 보도처럼 흔들던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을 다시 본격적으로 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과연 수량적 유연화가 답인가?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대목은 노동시장의 유연화 중 해고의 용이성을 강조하는 수량적 유연화에만 재개가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IMF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법'의 도입으로 가속화된 노동시장의 수량적 유연화가 가져온 사회적 손실을 반복하자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값싼 인건비를 무기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경제를 감안할 때 수량적 유연화를 통해 얻어낸 낮은 인건비로 세계시장에서 경쟁한다는 전략도 그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낸다. 즉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방편으로 노동시장의 유연화, 특히 수량적 유연화를 강조하는 재개의 해법은 번짓수를 잘못 짚은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가운데 오랜 기간 고용을 보장하면서도 높은 경영실적을 내고 있는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도요타의 성공은 수량적 유연화에 집착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의 직무능력 확대를 통해 기능적 유연성을 강화했던 도요타 경영진의 전략이 주효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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