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처음 촬영에 들어간 것은 2009년 가을이다. 올해 9월 3일 어머니가 숨을 거두실 때까지, 이 땅에 남은 이소선 어머니의 마지막 인생을 차곡차곡 필름에 담은 영화. DMZ영화제 상영을 위해 가편집된 한 시간 반가량의 영화를 보고 나니, '더 늦기 전에' 이 소중한 작업을 해준 사람들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9월 30일 서울 홍대 앞의 한 음식점에서, 영화의 후반 작업에 한창 바쁜 태준식 감독을 만났다. 태준식 감독은 <인간의 시간>(2000), <필승 Ver1.0 주봉희>(2003), <당신과 나의 전쟁>(2009) 등으로, 우리 사회의 그림자 속에서 희망을 만들며 분투하는 이들의 삶을 꾸준히 기록해왔다. 태준식 감독이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좇아 서울 창신동 이소선 어머니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가게 된 까닭은 뭘까.
"어머니가 워낙 매력적인 분이시잖아요. 반 코미디언이시고, 반 투사시니까.(웃음) 어머니는 사람에 대한 전제가 없어요. 사람을 지위나, 나이나, 성별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인간으로 대해주는 분이시죠. 2009년 이맘때,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인사를 드리러 간 날도 잊혀지지 않아요. 어머니가 방에서 홍시를 드시고 계셨는데, 처음 보는 저한테 오히려 촬영이 힘들 거라고 걱정해주시고 굉장히 편안하게 대해주셨죠."
▲ 이소선 여사를 인터뷰하고 있는 태준식 감독. ⓒ태준식 |
낙천과 겸손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의 '낙천'과 '겸손'에 매료된 사람은 태준식 감독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태준식 감독이 이소선 어머니를 영화에 담고자 처음 마음먹은 것은 노동운동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 노동운동의 원칙을 이야기해줄 어르신들을 만나는 '대화' 시리즈를 기획했는데, 그 첫 번째가 이소선 어머니였다.
원래 작업을 빨리 하는 스타일이라 6개월 정도면 장편영화 한 편은 만든다는 태준식 감독이지만, <어머니>를 작업하면서는 그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단다. 감독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만드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최소 이삼 년은 내다보면서 관계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그래서 처음 대여섯 달 동안은 카메라 없이도 '뻔질나게' 이소선 어머니의 방을 드나들면서 담배 심부름도 하고 약 심부름도 했다.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게 2010년 봄이에요. 올해 들어서는 이삼 일에 한 번씩 가서 진짜 많이 찍었죠. 그래서 어머니 쓰러지셨을 때 자책이 심했어요. 인터뷰라는 게 자꾸 옛날 생각나게 하는 거고, 담배 한 대 더 피우시게 하는 거고 그렇잖아요. 쓰러지시기 전까지 어머니를 가장 귀찮게 했던 존재가 저인 거죠. 촬영만 아니었다면 어머니가 더 사셨을 거라는 생각도 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태준식 감독만큼은 아니더라도 자기 탓을 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영화는 이소선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는 여러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처럼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소선 어머니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여겼을 거다.
태준식 감독이 영화에서 보여주려 한 것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들의 존재다. 고스톱 자금을 동전으로 바꿔 한 봉지 가득 갖다준 아들, 이사 가는 날 창신동 좁은 골목에서 냉장고를 옮기며 땀 흘리는 이주노동자 아들, 생신 잔치에서 케이크 생크림을 찍어 이소선 어머니 얼굴에 묻히며 장난치는 아들, 나무에 등을 치는 게 건강에 좋다며 이소선 어머니를 나무 책장 앞에 앉히고 하루에 백 번씩 치라는 지령(?)을 내리는 아들.
"어머니를 찾아와서 어머니와 서로 위로를 나누는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담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소선이라는 사람이 쌓아놓은 역사가 보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장기투쟁 노동자들을 만나면 먼저 꼭 한번 안아줘요. 그러면서 귀에다 속닥속닥 '먹고 싸워라', '죽지 말고 싸워라' 하고 얘기해요. 그리고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을 만나면 껴안고 '부비부비'도 하시고 그래요."
치열했던 어머니의 삶이 영화를 통해 가벼워 보일까 걱정도
이소선 어머니의 '부비부비'라니, 버릇없는 말씀이지만 생각만 해도 참 '귀엽다'. 영화에도 이소선 어머니의 유쾌하고, 친근하고, 재치 넘치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글머리에서 내가 '이미 슬픈' 영화라고 표현한 것은 지금의 상황 때문이지, 영화의 내용 때문은 아니다. 노동절 집회 단상 위의 이소선, <전태일 평전> 속의 이소선을, 밥상 앞에 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는 내 옆자리로 살짝 옮겨놓은 느낌이랄까.
이소선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이삼십 대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꼭 보기를 바란다는 태준식 감독. 그런 바람 때문인지 영상도 참 예쁘고 감각적이었고, 삽입곡을 부른 인디뮤지션 이아립의 섬세한 목소리도 젊은이들의 감성에 잘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가까움'이, 이소선 어머니의 치열했던 삶을 이 영화가 더 무게 있게 전해주길 바라는 사람들에겐 좀 '가벼워' 보일 거라는 걱정도 됐다.
"어떡할까요?(웃음) 전 일단 관객을 찍어 누르듯이 얘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인물이 살아온 역사와 일상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감동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거고요.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이소선의 일대기는 아니에요. 어떻게 영화 한 편으로 어머니의 삶을 다 다룰 수 있겠어요.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깨지 않는 선에서 그런 걱정들을 반영할 거예요."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더 '뜨겁게' 영화에 담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소선 어머니가 더 이상 우리 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더욱 커졌을 것이다.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빈소에 놓인 영정사진을 보고 감동했다. 노동절 집회 단상에서 마이크를 쥐고 "하나가 되라"고 연설하는 모습의 사진. 마지막까지 이소선이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울림을 선물해줘서 참 고마웠는데, 그 사진도 태준식 감독의 선택이었단다. 이소선 어머니가 아직 우리에게 해줄 말씀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달 정도 지났다. 그동안 유가족들보다도 더 많이 이소선 어머니의 얼굴을 본 사람은 바로 태준식 감독일 거다. 어디서 '이소선'이라는 이름 석 자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텐데, 하루 종일 영상으로 이소선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제가 원래 편집할 때 감정을 넣고 빼는 걸 잘해요. 그런데 이번에는 안 되더라고요. 한 컷 한 컷 붙일 때마다 담배 한 대씩 피우고……. 제가 일부러 어머니 집 근처로 작업실을 옮겼거든요. 정말 어머니처럼 여기면서 심심하면 찾아뵙고 그랬는데, 허전함이 크죠. 워낙 눈물이 없어서 장례식 때도 안 울었는데, 편집할 때는 찔끔찔끔 울 수밖에 없더라고요. 근데 한편으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실감이 안 나기도 해요. 제 눈앞에는 (영상 속에서) 왔다 갔다 하시잖아요.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아직 살아 계신 건지도 몰라요."
ⓒ태준식 |
관객들로 꽉 찬 극장에서 이소선 어머니를 모시고 이 영화를 보고, 영화가 끝난 뒤 젊은 관객이 이소선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살아 계서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을 꿈꾸며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태준식 감독. 그는 이 영화가 혹시나(?) 잘돼서 이소선 어머니의 노후자금을 조금이라도 마련해드리고 싶었다는 '소박한' 욕심을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을 보면서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야 했다.
11월에 영화가 완성되고 내년 봄께 정식으로 극장에서 개봉하게 되면, 다시한번 이소선 어머니의 얼굴을 보러 가야겠다. 이소선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인사는 드리지 못하겠지만,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이 저마다 가슴속에서 이소선이라는 '꽃'을 다시 피워내 눈물로 인사하는 모습은 분명히 보게 될 것 같다.
"저한테 어머니는 꽃과 같은 존재였어요. 그래서 영화에 꽃을 많이 집어넣었어요.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많은 것들을 끌어모으잖아요. 꿀로 벌을 끌어모으고, 향기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그리고 세상에 홀씨를 뿌려서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해주죠. 어머니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과 같은 사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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