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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후 토하던 어머니, 지난 세월 얼마나 모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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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후 토하던 어머니, 지난 세월 얼마나 모질었나요"

[전태일 통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上

이 글은 <그 사람에게 가는 길-공지영에서 문익환까지, 24인의 삶을 스케치하다>(대한기독교서회 펴냄)에 실린 글입니다. 대한기독교서회의 동의를 얻어 2회에 걸쳐 전재합니다. <편집자주>

1929년 태어나 열아홉 살에 결혼해 아이 셋을 낳았다. 마흔 넘어 삶의 기둥이었던 큰아들 전태일을 잃고 난 뒤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었고, 노동운동의 산 역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전태일에게 가르쳤듯이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도 서로 잡아 일으켜주고 같이하는 친구가 되어야만 한다고 가르쳐왔고 몸소 그것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러나 너무 '현장'에만 있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보배로운 믿음이 다 소실된 것 같아 안타까워하고 있다.

동대문역을 빠져나와 창신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완만하지만 계속 각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연결된 작은 골목들 사이로 잔뜩 짐을 실은 오토바이가 곡예를 하듯 빠져나간다. 그 사이로 외국인 노동자가 두리번거리며 내려오고 있다. '미싱사 보조 구함', '가족처럼 일할 직원 구함'이라고 적힌 32절지 종이는 한쪽 귀퉁이가 뜯긴 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날씨는 흐리지만 따뜻한 기온 때문에 땀이 슬슬 나고 숨이 차올랐다. 골목은 조금 더 가팔라졌다. 숨은 가빠졌지만 곧 반가운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였다. 사진에서나 보았던 이소선 어머니가 골목 계단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계단 아래에 있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있다가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올라가던 중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 쉬고 있던 중이었다.

사자후를 토하던 어머니, 지난 세월은 얼마나 풍진 세월이었나

1970년 11월 13일 이후,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사자후를 토하던 어머니, 독재정권의 야수 같은 탄압의 지난 세월 동안 각종 집회에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던 서릿발 같았던 그 어머니가 팔순이 넘어가는 언덕 위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등에 맨 가방을 들어드리려 해도 한사코 마다하던 어머니가 비탈길을 먼저 오른다. 품에 안으면 가려질 것 같은 조그마한 체구의 어머니가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는 것을 따라 걸으며 당신의 지난 세월의 길이 얼마나 한 풍진 세월의 길이었던가 가늠해보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아니 결단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새끼를 품어보지도 못한 것이 어찌 자식을 앞세우고 가슴에 묻으며 미친 듯이 살아온 어머니의 지난 세월을 짐작할 수 있으랴. 다만 만나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소선 어머니는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이니 그 품 안에서 지치고 어지러워진 깜냥을 새로 세우고 싶었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 1층에는 '어머니 사랑방'이라 적힌 조그만 방이 있는데, 그곳이 이소선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이다.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게 도와준 사람은 작가 오도엽 씨였다. 그는 지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머니 곁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후마니타스 펴냄)란 책으로 펴냈다. 사업회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는 그를 보고 어머니는 농담삼아 건달이라고 불렀는데, 그때부터 스스로도 건달이라고 칭하고 다니는 그는 이소선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 사진도 찍으니까 그 옷 벗고 노란색 옷 그거 입지."

날씨가 흐리니 몸이 더 좋지 않아 조금도 움직이기가 싫다는 표정을 짓던 어머니도 그가 노란색 윗옷을 꺼내오자 마지못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한 움큼의 약을 먹었다.

책에서 오도엽 씨는 어머니의 몸을 보고 종합병원이 따로 없다고 썼는데, 지금은 거기다 3도 화상을 입어 한 달 넘게 병원을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하루걸러 치료를 하고 있는데 치료를 한 날은 너무 힘들어 꼼짝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소독을 한다고 상처를 헤집으면 창자가 빠질라고 그래. 짓무른 살 껍질을 도려내던 날은 이를 얼마나 깨물었던지 잇몸이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했어. 나는 비가 올라치면 삼사일 전부터 온몸이 아프기 시작해. 예전에 맞은 자리가 너무 아프고 쑤셔대거든.

그날 유가협에서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먹고 누워 있었는데 우리 유가족 한 사람이 허리가 아프면 대고 누워 있어보라고, 추우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손난로 같은 것을 맨살에 대주었어. 그런데 그게 엄청 뜨거워졌는데도 독한 진통제를 먹었으니 모르고 있다가 하도 뜨거워 일어서 보니까 벌써 살이 헐어서 진물이 흐르고 있었던 거야.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었는데도 그걸 모르고 누워 있었으니, 참…."


▲ 이소선 여사. ⓒ프레시안(손문상)
어머니의 기억을 담은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어머니는 기념회 사무실보다 유가협에 더 많이 있다. 1986년 창립된 유가협의 초대 회장이었고, 지금은 유가협 운영위원으로 아직까지도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유가협 회원들은 명동성당에서 할 밤샘농성을 준비하고 있었고, 어머니에겐 유가협을 지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상을 입은 뒤로는 한 번도 집회에 나가지 못했다고 했다. 집회를 못 가니 답답하기도 하고 당뇨가 있어 좀 걸어 다니기도 해야 했기에 모셔다주겠다는 회원을 뿌리치고 혼자서 걸어오던 중 우리를 만난 것이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는 지금의 '이소선'이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책에 쓰인 것은 어머니가 한 얘기에 비하면 20분의 1도 되지 않을 거라고 오도엽 씨는 말했다. 그토록 많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힘이 들지는 않았을까.

"전혀 힘 안 들었어. 이렇게 책을 낼 줄 몰랐지. 그때는 오도엽 씨가 내 방 옆에 살고 있었는데 저녁을 먹고 나면 할 일이 없으니까 옛날이야기 하자는 거야. '뭔 얘기?' 하니까 살아온 얘기를 해 달래. 글 쓴다는 얘기는 안했지. 이제 보니까 조그마한 거 앞에 놓고 이야기했는데 그게 녹음기였는데 그땐 몰랐지. 그때부터 평생 살면서 내 속에 감춰두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하게 된 거야.

돌이켜보면 참 이상하더라고.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오다 보니 책도 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보면 참 괴로워. 나는 항시 생각 속에,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는 죄책감이 있었어. 내가 안 났으면 태일이도 없었을 거고…. 나처럼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세계적으로 골라 보려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만날 속에만 끼고 살았는데 이제 팔순이 되니 노망이 들었는지 평생 누구한테 안 해본 소리를 했어.

건달이가 재주는 있더만. 그냥 옛날이야기 하고 놀았는데 그걸 다 써서 책을 낸다는 거야. 나는 안 된다고 두 달 동안 버텼는데, 밤에 고민을 막 하니까 몸에 간지러운 병이 생기더라고. 그런데 안 한다 하면서도 이 동네에서는 다 추진하고 있었는가 봐.

참, 한편으론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내가 마무리할 단계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죽는 마무리를 해야 되지 않나 싶었어. 이 못난 사람이 이때껏 살아오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마움 속에 있었겠어. 그래서 그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어머니 평생 살아오며 마음속에 걸리던 것 하나

이소선 어머니는 작년(2008) 12월 5일, 팔순을 기념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는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와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헌정한 문집인 <조선 질경이 이소선>(전태일기념사업회 펴냄)의 출판기념회도 함께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어머니는 일일이 다니며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안아주었다고 한다.

이소선 어머니는 평생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늘 걸리던 것이 하나 있었다. 5살 무렵에 친정어머니가 재가를 한 일이다. 이 일은 평생 가슴에만 담아두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한으로만 남아 있었다. 4살 때 당신의 아버지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가 죽음을 당한 뒤 친정어머니는 스무 살도 더 많은 새아버지에게 개가를 했다.

아버지를 일본 순사에게 뺏겼듯이 어머니도 할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빼앗겼다는 상실감에 이소선은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했다. 고집을 부리며 절대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반항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일본한테 저항했던 일 때문에 일본 순사가 우리 아버지를 뒷산에 가서 죽이고 우리 집을 불태워서 나하고 오빠, 엄마는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고향을 떠나도 일본 놈들이 계속 감시를 했어. 그러니까 엄마는 오빠가 조선에 있으면 아버지처럼 죽게 되겠다 싶어 일본에 있던 외삼촌 집으로 보내려 했던 거야.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니 어떻게 보내. 그래서 스무 살도 많은 의붓아버지에게 개가를 했던 거지.

우리 오빠를 밀항선이라도 태워 일본에 보내 목숨이라도 구하게 하려고 조건부로 그랬던 거야. 어렸을 땐 어떻게 그것을 알아. 내가 우리 엄마를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했는지…….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그때는 봉건시대잖아. 여자가 일부종사 못하면 이부부터는 창부라고, 그런데 엄마는 왜 그랬는지.

하지만 내가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보니까 우리 엄마만큼 대단한 사람도 없어. 자식 하나 살리려고 자기를 버렸다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자식을 위해 희생했는데 내가 철모르고 그랬으니 우리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나. 내가 이 일을 하고 보니까 우리 엄마가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식을 위해서 나 같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아마 못할 것이야"


친 자식과 산 22년보다 많은 39년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하지만 '자식을 위해서' 이소선 어머니만큼 한 사람도 없을 듯하다. 죽어가는 자식이 부탁한 일을 들어주기 위해서 친자식하고 같이 산 22년보다 더 많은 39년의 세월을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아오면서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으니까. 많은 이들이 그랬지만 특히 노동운동, 인권운동을 한 사람들이 지난 1970~1980년대를 살아오면서 얼마나 지옥 같은 시절을 견뎠는가.

더군다나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한 번도 피하지 않고 전투적으로 살아온 이소선 어머니였으니…. 그 역경과 고난을 다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 시절 '법무부 문서'에 기록된 180번이나 법을 어겼고, 3년여의 옥살이를 했다는 객관적 기록만이 치열한 삶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1929년 경북 달성군에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재가한 어머니를 따라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하느라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글이라도 배우고 싶었던 어머니는 이웃에 살고 있던 아주머니가 언문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을 알고 틈틈이 배워 한글을 깨쳤다. 너무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한글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렵사리 구한 한글로 된 책을 뜻도 모르는 채 보았지만 글 읽는 밤은 참 행복했다. 하지만 집안도 나라도 어머니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13살 때 대구의 방직공장에 근로정신대로 끌려가 2년 동안 생고생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 공장을 탈출하여 해방을 맞을 때까지 산속에 굴을 파고 숨어 지냈다.

열아홉에 집안 어른의 결정으로 대구 출신의 전상수와 혼인을 했다. 남편은 봉제 기술자였는데 뛰어난 기술과 성실성으로 한때 부산에서 꽤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장마통에 직물창고가 무너지면서 파산하고 말았다. 그 후 10년 세월 동안 대구와 서울 등지에서 가족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다시 만나 살기도 하였지만 언제나 가난은 지독한 해일처럼 마구 덮쳐올 뿐이었다.

살아보려고 마지막 여력까지 쏟아 부었던 학생복 사업도 사기를 당해 폭삭 무너지고 나니 남편은 그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술에 의존하며 살았다. 무뚝뚝하지만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했던 전상수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폭음과 폭행으로 자신과 가족들을 괴롭혔다.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교회

시장에 떨어진 우거지까지 삶아 파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모조리 다 해도 가난은 벗어날 수 없었고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어머니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갔다. 그러다 영양실조와 스트레스 때문인지 눈이 멀어 결국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장님도 고친다며 교회에 나가보라는 이웃의 말을 듣고 기다시피 해서 교회로 갔다.

당시 살고 있던 쌍문동 무허가촌에는 천막교회가 있었다. 예수도 모르고 기도하는 법도 몰랐지만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100일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기도를 나갔다. 눈이 퉁퉁 붓고 목이 터져라 기도를 한 지 100일 째, 그러나 앞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두 눈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어린 것들은 굶고 있는데 어찌 살라는 거냐. 어머니는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마구 비벼대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딸 순옥이가 울고 있는 엄마를 위로하며 세수를 하라고 물을 떠주자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아! 기적처럼 수건 색이 보였다. 눈앞이 보이는 것이었다. 한 번도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한 삶,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삶이었는데, 비로소 희망을 알게 된 것이다. 교회가 수렁으로 빠져들기만 하던 어머니의 삶을 꼭 붙들어준 것이다.

"계속 교회를 다녔어. 우리 집이 쌍문동이잖아. 그래서 개척교회도 하고, 또 철원에 있는 수도원(대한수도원)에서 은혜도 받고 했지. 지금 우리 아들 태삼이와 며느리 윤 집사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선교(AIM 국제교회)를 하고 있어. 내가 태일이 때문에 청계천으로 나오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 윤 집사가 나대신 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열심히 잘하고 있어요.

청계시절(청계피복노동조합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탄압이 심해지자 목사들이 자기네 교회에 오지 말라고 했어. 하지만 그 교회에서 쫓겨나면 다른 교회에 가고 그랬지. 그 당시 7번 정도 옮겨 다니면서도 악착같이 교회는 다녔어. 요즘은 몇 달 동안 교회를 못 다녔어. 사람은 육신보다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힘이 나거든. 새벽기도도 못 가고 그러니까 영적인 것이 너무 흐려졌어요.

예수 안 믿어본 사람은 그런 거 모르지만 예수 믿어보면 영이 새로워져 얼마나 용기가 생기는지 몰라.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생각나고, 열심히 기도하면. 마음으로 눈이 떠져 영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기도를 안 하면 바람 빠진 공 같아. 지금 바람 빠진 공처럼 살고 있으니까 걸음도 제대로 못 걷고 이러고 있지. 휴우…."


<내용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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