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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띄우는 KBS, '필립 베탕'의 말로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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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띄우는 KBS, '필립 베탕'의 말로를 아는가

[장행훈의 광야의 외침] 필립 베탕과 백선엽

지난 7월 28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비시 정부의 수반이며 국가 원수였던 필립 베탕(Philippe Petain)이 종전 후 나치 독일 점령군에 협력(부역)하고 조국을 배반한 죄로 무기 징역 형을 받고 대서양 연안의 외딴 섬 릴디외(l'ile d'Yeu)의 성채 감옥에서 95세의 생을 마감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페탕 원수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과 프랑스 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베르덩 전투의 승자'로 한 때 프랑스 국민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던 인물이다.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그는 프랑스 전군 사령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 공로로 원수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 터지고 비시 정부를 이끌게 된 페탕 원수는 나치 독일군과 협력하고 부역했고 그 죄로 여생을 감옥에서 마쳐야 하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욕교반졸'의 KBS, 공영방송은 할 수 없는 '폭거'

그의 비참한 죽음을 새삼 회상하는 것은 그의 생애가 최근 논란이 된 백선엽 장군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페탕 원수는 제1차 대전의 영웅으로 프랑스를 전승국으로 만든 전군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나치의 공격으로 붕괴 직전에 있던 프랑스의 운명을 걸머지게 된 페탕은 나치 점령군과 협력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이런 정책은 종전 후 탄핵법정에서 '적과 공모'하고 '조국을 배반한 죄'로 단죄를 받게 되고 1차 대전의 영웅 페탕은 여생을 외딴 섬 감옥에서 쓸쓸히 마감해야 했다.

프랑스는 조국을 배반한 죄를 다스리는데 과거의 혁혁한 공과를 따지지 않았다. 그만큼 조국을 배반하는 죄가 무거운 것이다. 그런데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에 충성하고 독립군을 '소탕'하는 간도 특설대의 장교로 활약했던 백선엽은 6월 24일과 25일 두차례에 걸쳐 공영방송 KBS에서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미화됐다. KBS는 동족을, 그것도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낯선 이국땅에서 투쟁하는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제의 하수인 역할을 한 사실은 밝히지 않은 채 그가 한국전쟁 때 세운 전공만을 내세워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우리 선열의 독립 투쟁사를 도외시하고 한국의 역사가 마치 반공투쟁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보수 우익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두둔하는 역사의 왜곡이었다.

▲ KBS가 지난 24~25일 2부작으로 방영한 '전쟁과 군인' ⓒKBS

비극의 원인은 간단하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세우면서 친일행위자들을 처벌하는 역사청산을 하지 않은 것이다. 반민특위가 제대로 활동했더라면 이런 황당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일은 2차 대전 후 나치 부역의 역사를 청산한 유럽에서는 상상할 수 없ㄴ슨 일이다. 역사 청산은 비단 프랑스나 독일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치 독일이 점령한 나라에서는 어디서나 있었다.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에서는 소급법을 제정해서 '국가적 수치'를 청산했다. 프랑스에서는 나치에 부역한 수 천 명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나치 점령자들과 협력한 죄로 단죄 받은 사람은 공민권과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제한받았다. 네덜란드에서는 '외국에 봉사한 죄'로 6만 명이 국적을 상실했다.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특별법원을 설치했고 군법회의에서 이들을 재판하기도 했다. 사형을 당한 건수는 프랑스보다 적지만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을 받은 인원은 오히려 이들 주변국들이 더 많았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프랑스는 인구 10만 명 당 94명이 나치에 부역한 죄로 재판을 받은데 비해 덴마크는 374명, 네덜란드 419명, 벨기에 596명, 노르웨이 633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렇게 역사를 청산한 나라에서 조국을 배반하고 동족, 특히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포를 점령군 편에 서서 살상한 자가 조국 독립후 다시 출세하는 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런 개탄할 일이 벌어지게 된 데는 미국에도 책임이 있다. 나치 독일과 싸울 때는 동맹국이었지만 종전 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과 적대 관계가 된 미국은 새로운 적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과거의 적을 친구로 만드는 정책을 추구했다. 미국은 어제의 적이었던 일본과 서독을 소련을 적대하는 동맹국으로 삼았다. 미국에는 나치의 전범을 색출하는 것보다 소련을 제압할 '요원'을 스카우트 하는 것이 더 필요했다. 미국은 나치의 과학자와 정보원을 포섭하는데 소련과 경쟁을 벌였다. 한반도를 통치하는데도 한국을 가장 잘 아는 친일분자들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했다. 이승만 박사가 일본 경찰과 군대 출신의 친일분자들을 대거 기용한 것도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역사 기록에 나와있는 사실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도덕적으로 비판을 피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백선엽 같은 인물이 일제 군대 '경험'을 무기로 우대를 받고 한국 전쟁에서 '전과'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산물이었다.

한두마디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아주 민감한 문제이다. 유럽에서는 '백선엽 영웅 만들기'같은 프로그램은 공영방송은 물론 민간 방송에서도 감히 다룰 생각을 할 수 없는 폭탄이다. 이런 문제를 KBS가 뻔번하게 두차례나 특집 방송으로 다뤘다. 한국의 역사를 무시하고 우리의 독립 선열들을 두번 죽이는 몰상식한 만용이었다. 백보를 양보해서 방영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간도 특설대의 실체와 백선엽이 그 부대에서 무슨일을 했는지는 다루었어야 했다. 그러나 KBS 특집은 완전히 일방적인 미화 방송으로 일관했다는 평가다. 그 결과 분노한 시청자들이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활동을 폭로해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그의 수치스런 과거를 널리 알리는, 예상치 못했던 '성과'를 올렸다. 결과적으로 KBS 방송이 백선엽 장군을 영웅으로 만들기 보다는 그의 민족 배반바 활동을 더 부각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욕교반졸(欲巧反拙, 잘 만들려고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도리어 졸렬한 결과를 보게 됨)이었다.

조국 배반한 원수의 비참한 말로

프랑스 국민이 페탕 원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보자 2차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6월 히틀러의 군대가 파리를 위협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일군을 막을 전쟁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폴 레이노 정권은 페탕 원수에게 나라의 운명을 부탁하기로 결정한다. 정권을 인수한 페탕 원수는 전쟁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독일과 휴전 협정을 맺는다. 파리에서 클레르몽 페랑을 거쳐 온전 휴양지 비시로 정부를 옮긴다. 이후 페탕 정부는 임시 수도의 이름을 따 비시 정권으로 불리게 된다.

나치 독일과 휴전한 페탕은 헌법을 개정해서 스스로 국가원수가 되고 의회의 존재를 무시하고 독재체제를 갖춘다. 페탕은 자유 평등 박애의 국시(國是)를 가족 노동 애국으로 바꾼다. 페탕은 개인 숭배 운동을 벌인다. 페탕은 독일과 휴전하는 조건으로 프랑스를 남북으로 갈라 독일군의 북부 점령을 인정하고 비시정부는 남쪽만 통치한다.(1942년말 이후에는 독일군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함) 그리고 독일 점령 당국과의 협력을 약속한다. 물론 페탕이 처음부터 무조건 독일 편을 든 것은 아니었다. 연합군과 나치 독일 사이에 양면 정책을 쓰며 프랑스의 실속을 차리려는 꼼수도 부렸다. 스페인의 프랑코 외교 노선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정권을 맡기 전에는 스페인 대사로 일한 경험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지스탕스의 반(反) 나치 반 비시 활동이 격화되면서 비시 정권과 나치 점령군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비시 정부는 나치의 요구대로 유태인들을 검거해서 독일의 집단 수용소로 보냈다. 연합국에 대해서는 점점 적대적이 됐다. 프랑스 국민의 눈에 비친 비시 정권은 적국과 공모하고 조국을 배반하는 정권으로 각인되게 된다.

이러한 프랑스 국민의 감정은 종전 후 탄핵 고등법원의 판결로도 나타난다. 페탕은 1945년 8월 15년 탄핵 재판에서 대독(對獨) 부역죄, 조국 배반죄로 모든 지위와 재산 박탈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는다. 다만 80세의 고령을 고려해서 법원은 사형 집행을 보류했다. 페탕의 부관을 지냈고 당시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있던 드골이 그의 사형을 무기로 감형해 준다. 그는 피레네 산맥 안에 있는 포르탈레 성채 감옥에 수감된다. 페탕은 그해 11월 16일 대서양의 외딴 섬 릴디외의 시타델 성채 감옥으로 이송되고 그곳에서 1951년 7월 23일 95세의 나이로 초라한 여생을 마치게 된다. 그가 수감 생활에서 누린 특혜가 있다면 고령임을 고려해 부인이 매일 그를 면회할 수 있게 허용한 것과 죽기 직전 건강이 너무 악화돼 성채 부근의 민가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준 것 뿐이었다. 그의 유해는 섬의 어부들 묘소에 묻혀있다.

'어떠한 공적으로도 용서받지 못한다'

페탕의 비참한 말로는 조국을 배반한 죄는 과거의 어떠한 공적으로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프랑스의 교훈이다. 페탕이 받은 대우와 비교하면 KBS의 백선엽 특집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공영방송의 폭거였다. 백선엽 파문으로 대다수 국민의 역사 의식을 다소나마 감지하게 됐는지 KBS가 광복절 편성에서 '이승만 특집' 방영을 연기하기로 했다는 보도이다. 백선엽 방송 파문을 계기로 조국을 배반한 죄가 얼마나 무서은 죄인지를 KBS나 보수 우익 세력이 깨닫게 됐기를 바란다. 제1차 대전의 영웅이었지만 국가를 배반하는 죄를 범했을 때 프랑스 국민과 법원이 페탕을 어떻게 단죄했는지 알았다면 앞으로 친일분자의 죄과를 평가하는데 유익한 참고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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