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12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게 변했다. '고용불안'은 외환위기 이후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키워드가 됐다. 그저 일만 열심히 했을 뿐인데 어느날 구조조정 대상 명단에 포함돼 하루아침에 평생을 일해온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이 흔해졌다.
물론, 같은 시기에 눈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면, 주주들이 이익을 보는 경우가 많다. 대주주는 배당금만으로도 상당한 수익을 거둔다. 지난해 12월, 대규모 구조조정안을 발표한 뒤,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는 한진중공업의 오너인 조남호 회장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구조조정, 즉 해고의 조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는 과연 있었을까?
한진중공업은 노동자를 대량해고한 이유로 2009년부터 영도 조선소에서 단 한 건의 선박도 수주하지 못했다는 걸 든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조선시장의 평균 선박수요는 밑바닥을 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해운시황분석센터에 따르면, 2009~2010년 평균 선박수요는 1996~2008년의 조선호황기에 비해 4분의1 수준에 그치고 있다. 세계 조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국내 조선 산업의 경우도 이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나마 2010년부터 점차 회복세다. 국내 조선 산업을 대표하는 조선 7사의 경우 2010년 수주 실적치는 2009년에 비해 약 3배 정도 개선됐다. 실제 현대미포 조선소의 경우 2009년에 1건, 2010년에 30건을 수주했다. 삼성중공업도 2009년에 15건, 2010년에 97건을, 대우조선해양은 2009년에 37건, 2010년 112건을 각각 수주했다.
주목할 점은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의 수주 실적은 2009년부터 계속 '0건'에 머무른다는 점이다. 아무리 금융위기로 인해 조선 산업이 위축됐다고 하지만, 다른 조선소가 회복세를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전경. ⓒ노동과세계(이명익) |
이런 기형적인 수치가 발생하는 배경에는 한진중공업이 필리핀에 건립한 수빅 조선소(HHIC-Phil)가 숨어있다. 한진중공업이 2007년 설립한 수빅 조선소는 80만 평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매우 크다. 조선 수주 물량 1위인 현대중공업 산하 조선소와 맞먹는 수준이다.
수빅 조선소는 현재 '5도크'와 '6도크'로 구성돼 있다. '5도크'의 경우 중형선박(5000TEU) 4개를 동시에 건조할 수 있으며 '6도크'는 초대형 선박 2개 이상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다. 지난 3년간 인도한 선박수는 총 18척이며, 2011년~2012년에는 35척이 인도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두고 전문가와 시민단체는 한진중공업이 영도 조선소에 줄 물량을 수빅 조선소에 넘겼다고 주장한다. 센트럴타워 역할을 하고 있는 한진중공업에서 충분히 영도 조선소에 물량을 넘길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노동계에서는 구조조정을 위해 영도 조선소 물량을 '0건'으로 만들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한진중공업 재정구조상 수빅 조선소가 아닌 영도 조선소에 물량을 배분할 여력이 없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수빅 조선소를 지으며 투자받은 금액이 1조1000억 원으로 이자 부담이 심각한 수준이다. 이에 영도 조선소보다 인건비가 싼 수빅 조선소로 물량을 몰아줄 수밖에 없다는 것. 수빅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1만9488명으로 한 달에 약 35만 원을 받는다.
한진중공업 감사보고서를 보면 한진중공업의 영업이익은 2007년 1158억 원, 2008년 5104억 원, 2009년 4609억 원, 2010년 2014억 원이다. 그러나 이자비용은 2007년 399억 원, 2008년 1045억 원, 2009년 1796억 원, 2010년 1925억 원으로 급증하고 있다. 이는 필리핀 수빅 조선소 설립을 위한 대규모 재원 조달 비용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조선 산업 전문가인 허민영 박사는 "수빅 조선소는 국내 영도 조선소의 10배 수준으로 영도 조선소를 완전하게 대체가능하며 이미 2009년부터 한진중공업은 신규 수주한 선박 전략을 수빅 조선소에 집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허 박사는 "당초 2006년 필리핀에 대규모 조선소를 설립했을 때는 세계 경제가 호황일 때였다"며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조선업은 불황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허민영 박사는 "결국 물량도 제대로 수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자 비용 부담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인건비가 싼 수빅 조선소에 모든 물량을 밀어줘야만 회사가 그나마 운영되는 구조가 됐다"고 밝혔다.
조선업계 추세와 반대로 가는 한진중공업
하지만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라는 분석도 있다. 무엇보다 한진중공업의 해외 진출은 여느 조선소의 해외 진출과는 그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간 해외에 공장을 설립한 조선소 중 한진중공업처럼 국내 조선소 공장을 대체할 정도로 규모가 큰 공장을 지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허민영 박사는 "삼성중공업의 경우 부품 공장을 해외에 만드는 등 한국 내 조선소가 핵심 부분이고 해외 공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수준에서 만들어졌다"며 "하지만 한진중공업의 경우 국내에 있는 본사를 버리고 해외에 10배나 큰 본사를 지은 셈"이라고 주장했다. 허 박사는 "그래놓고 경영이 안 된다고 본사 직원을 해고한다고 하면 누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수빅 조선소 설립은 현 조선업계의 추세와 어긋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조선회사는 조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해양산업 등 중심으로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등 빅3는 시추선 분야와 반잠수 식 시추설비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허민영 박사는 "80년대에 큰 불황을 겪은 조선업계는 90년대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했다"며 "현대중공업에서 90년대 초반 골리앗 투쟁이 벌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허 박사는 "기업을 축소한 2000년대 이후부터 조선업계는 새로운 업종을 찾아 사업을 벌였다"며 "배만 만들다가는 불황이 닥쳤을 때 견디지 못한다는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에 시추선 제작과 같은 종합 중공업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
허 박사는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여전히 배 만드는 데 시쳇말로 '몰빵'을 하고 있다"며 "대표적인 증거가 수빅 조선소 건립"이라고 지적했다. 허 박사는 "이렇게 '몰빵'을 할 경우, 금융위기 등 불황이 오면 이를 감당하기 위해 자기 살을 오려내기는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조남호 한진중 회장도 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 수빅 조선소를 건립했다"고 말했다.
ⓒ노동과세계(이명익) |
한진중공업 노조에 따르면, 2010년 초 2800명 규모였던 정규직은 현재 1400명 규모로 줄었다. 하청 등 간접 고용 형태의 노동자도 3500명에서 1000명 규모로 감소했다. 문제는 앞으로도 구조조정이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수빅 조선소 건립으로 인한 물량 감소로 구조조정을 하는 게 합리적 결정이냐를 두고는 앞으로도 계속 논란이 될 전망이다. 다른 대형업체가 빠져나간 조선업 구조 속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소위 '몰빵' 투자를 해야만 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경영 실패의 결과를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대량 해고를 감행하는 건 노동자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한진중공업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반대하며 85호 크레인에서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190일째 농성 중이다. 오는 24일은 농성 200일이 되는 날이다. 3차 희망버스는 한 달 이내 다시 떠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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