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 제 애인에게 100만 원 주면 함박웃음을 지을걸요.(웃음)
교수 : 무섭군요. 진심도 돈으로 살 수가 있나요?(웃음) 이 친구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믿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나중에 돈을 살 수 없는 것을 목록으로 써서 내라고 하겠습니다.
교실 안 분위기는 시종 화기애애했다. 점심시간 직후에 시작된 수업이었지만 강의실을 가득매운 50명의 학생 중 누구 하나 지루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30일 있었던 경희대학교 교양 수업 중 한 장면이다.
이날 교양수업은 1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고전철학 수업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란 무엇인가'가 이번 강의의 주제였다.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행복이란 '선'의 실천이라고 못 박았다. 인간이란 존재의 모든 행위와 선택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선을 지향한다는 것. 그렇기에 모든 존재의 이유는 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다소 어려운 철학 내용이지만 교수는 이날 발표된 신공항 건설 백지화를 비롯해 등록금 문제, 대학 기업화 등 대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회 문제를 예로 들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 즉 선의 실천이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 대기업의 이름이 붙은 대학 건물들. 캠퍼스가 '기업 박람회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대학마다 기업 유치에 열을 올리는 상황에서, '대학주식회사'는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이에 따라 대학들은 점차 기본 역할을 포기하며 소위 말하는 취업훈련소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기업화 된 대학들, 직업훈련소?
대학이 기업화됐다지만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 고유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드문드문 눈에 띤다. 1학년 수업에 회계학을 필수과목으로 정한 중앙대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경희대는 올해부터 교양수업을 대폭 강화했다.
2011년부터 이 대학교에 입학하는 모든 학부생은 1년 동안 학교에서 정한 교양 수업을 의무적으로 받아야만 한다. 이날 있었던 수업도 이것의 일환이다. 지난 3월 출범한 경희대 교양교육 전담기구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1학년 학생들의 교양수업 전체 커리큘럼을 책임지고 있다.
다른 대학이라고 해서 교양수업이 없는 건 아니다. 경희대가 특별한 건 이를 위한 별도의 컨트롤타워, 즉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국내 대학 최초로 신입생 전원이 1년 동안 공통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두개 의 중핵(中核) 과목을 신설했다. 1학기에는 '인간의 가치탐색', 2학기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것. 이 큰 주제 속에 여러 강의들을 짜 놓았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은 이것을 1년 넘게 준비했다. 2009년 8월부터 교양교육 전문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해 11월, 16명으로 구성된 교양교육개편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 결과, 전문지식과 연구역량 강화, 취업에 필요한 실용적 직업교육, 폭넓은 식견과 열린 정신을 위한 교양교육, 이 세 가지의 균형이 이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도정일 대학장의 생각은 단순했다. 그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경제성장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은 취직을 잘하는 게 당연시하게 여겨졌다"며 "대학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업이 원하는 실용적 직업교육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다보니 교양교육을 왜 하는가 등의 회의가 대학 내에서는 끊임없이 제기됐다"며 "교양을 하는 목표 의식도, 방향 감각도 없다보니 내용이 부실하고 빈곤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좀 과격한 용어를 쓰면 비참한 상태까지 다다른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은 대부분 졸업장을 받아 취업을 하는 게 대학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며 "결국 지금의 대학은 졸업장 발급소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하지만 대학 교육이라는 건 취업 등 실용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며 "그건 훈련이지 교육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교육은 훈련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훈련은 교육의 요소를 가질 수 없다"며 "하지만 현재 대학은 취업이 제1의 목표가 되어 다른 것을 모두 잠식시켜버렸다"고 주장했다.
"교육의 본질은 단순 취업이 아니다"
결국 대학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도 학장은 "대학에서 공부한 뒤 직장을 얻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걸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라면서도 "교육의 본질, 목표는 단순 취업에 있는 게 아님에도 취업 이상의 것을 교육하지 않는 게 문제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런 교육이 계속된다면 "앞으로의 사회는 전망이 어둡다"고도 했다. 그는 "현재 대학은 기술적 탁월성을 가진 사람들만 길러내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며 "이게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3년 전 발생했던 금융위기를 예로 들며 "당시 금융위기는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젊은이들이 사회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 회사에게 어떤 이익을 줄 것인가만 생각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이 사회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 반인간적인 행동은 아닌가 등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다"며 "튼튼한 교양 베이스가 결핍됐을 때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가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준비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까. 이날 수업을 들은 김민영(가명·20) 씨는 "고등학교 때와는 다른 수업이라서 재미있다"며 "철학이라는 건 고리타분한 줄만 알았는데, 나와 사회 안에서 풀어낼 수 있는 거라는 걸 수업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윤성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는 "학생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며 "교양에 목말라하던 학생들에게 높은 호응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도 없고 질문을 하면 다양한 대답이 돌아 온다"고 덧붙였다.
실제 1학년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수업을 짰으나 재학생들도 대폭 수강신청을 한 상황이다. 이에 한 반에 40명으로 제한했던 정원은 부득이 50명으로 늘렸다. 그래도 모자라 경희대에서는 최초로 400명이 수업을 듣는 대형 강의도 이번 학기에 처음 개설됐다. 도정일 대학장은 "예상보다 1000명이 넘게 수강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 등록금 인하를 촉구하며 삭발식을 단행한 김윤영 서강대 사회과학대 학생회장. 대학생들은 높은 등록금이 어떻게 책정됐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좀더 내실 있는 교육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다. ⓒ프레시안 |
대학가에 불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바람, 그 여파는?
이러한 움직임은 경희대에게만 국한될지도 모른다. 도 학장은 "교육의 본질을 일깨우는 게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대학가에서도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는 계기가 되길 바라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물론 몇몇 대학교에서는 인문·사회를 중심으로 교양 강의 강화 바람이 불고 있는 건 사실이다. 포스텍(옛 포항공대)은 올해 신입생부터 2년 동안 공통 기초교육과정인 '포스텍 칼리지'를 이수해 전공에 구애받지 않는 기초·교양교육을 받게 할 방침이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포스텍 칼리지' 과정을 통해 전공, 학과에 상관없이 글쓰기, 영어, 사회봉사, 공통기초과학, 이공계 핵심기초과목을 집중 공부시킬 계획이다. 이를 위해 10명이었던 인문사회부 전임교수를 20명으로 늘렸다.
좋은 교양 강의를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학교도 있다. 서울대의 경우 일반인을 대상으로 서울대 강의를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는 '서울대학교 온라인 지식나눔 서비스'를 지난 학기부터 시작했다. 교육은 인문, 사회, 경영,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교양강좌와 전문강좌, 기획강좌 등으로 구성됐다.
전남대학교의 경우, 2011년부터 기존 핵심교양과목 51개 중 기초학문 성격을 갖추지 못했거나 학사관리가 어려운 과목 21개를 핵심교양과목에서 제외시켜켰다. 또 핵심 교양과목을 문학과 예술, 역사와 철학, 사회의 이해, 자연의 이해 등 4개 분야로 나누고 올해 신입생부터 분야별로 1과목 이상 의무수강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학생들은 수강과목 관련 고전읽기가 의무화됐다. 뿐만 아니라 교양과목 운영을 담당할 책임교수 7명을 임명했다. 교양관련 교과목 개발, 교과과정 운영 등 강의의 질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는다. 이는 흥미 위주의 단순 지식 전달 교양수업을 학생들에게 필요한 기초핵심교양으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육 통해 어떤 게 내가 만족할 인생인지 고민하게 해야"
도정일 대학장은 "대학교에서는 어떤 게 뜻깊은 인생인지, 내가 만족할 인생인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며 "하지만 지금의 대학은 좋은 직장, 높은 돈, 즉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을 취할 수 있는 방법만을 가르쳐주려고 혈안이 돼 있다"고 말했다.
도 학장은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돈이라고 했다"며 "살면서 돈은 중요하지만 삶의 목적을 거기에 두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돈은 우리가 어디로, 즉 목적으로 가기 위한 다리라고 볼 수 있다"며 "그렇기에 우리는 다리 위에서는 살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지만 지금의 대학 교육은 우리가 전부 다리 위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로 길러내려는 게 목적인 듯하다"며 "그게 못내 안타깝고 답답하다"고 작금의 현실을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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