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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를 '철학자'로 만든 고려대가 부러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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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건희를 '철학자'로 만든 고려대가 부러웠나?

[기고] 전남대는 또다시 정몽준에게 명예를 팔려는가?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놓고 전남대학교가 또다시 들썩이고 있다. 전남대는 지난 2007년과 2009년에도 정 전 대표에 대한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식을 열었으나, 학생들과 교수들의 반발로 두 차례 모두 무산된 바 있다.

31일 전남대 철학과 학생들에 따르면, 전남대는 두 차례 무산됐던 정 전 대표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재차 추진하고 있다. 전남대 측은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며 대답을 피하고 있지만, 학위 수여에 대한 논란 때문에 비밀리에 수여식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 학생들의 주장이다. 철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독자 박정민 씨가 학위 수여식을 재개하려는 학교를 꼬집는 기고를 보내와 소개한다. <편집자>

대학을 가리켜 '진리의 전당' 운운하는 것은 점점 낯부끄러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해 봄 '대학 거부'를 선언했던 김예슬 씨의 경우가 이를 보여준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소위 '명문대'에 입학한 신입생 시절, 학교의 교훈인 '자유·정의·진리'라는 단어에 가슴 뛰었던 그는 몇 년 후 대학이 사실상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요, "자격증 장사 브로커"에 불과함을 깨닫고 거기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김예슬 씨가 느꼈을 자괴감에 공감하며 우리 시대 대학의 앞날을 염려했다.

'5.18의 대학'이며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루임을 자처하는 전남대학교도 이런 염려에서 자유롭지 않다. 2007년 전남대는 정치가이자 기업가인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주려 했다. 그러자 철학과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거세게 반대했고, 결국 정몽준 씨는 명예학위 받기를 포기했다. 2년 후인 2009년, 전남대는 다시 명예학위를 주기 위해 정몽준 씨를 불렀다. 하지만 역시 학생들의 반대에 부딪힌 그는 광주까지 왔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또다시 2년이 지난 지금, 전남대 당국은 다시 정몽준 씨를 불러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주려는 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다. 명예학위를 기필코 주겠다는 쪽이나 기어이 받겠다는 쪽이나 정작 철학이니 학문이니 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사실상 이 소동들은 권력자와 대학이 명예학위 수여를 빙자하여 정치적 이익과 재정적 후원을 맞바꾸려는 속내에서 비롯된 것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 지난 2009년 전남대에서 열린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하려다 학생들의 반발로 발길을 돌린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왼쪽)과 김윤수 전남대 총장(오른쪽). ⓒ연합뉴스

어쩌면 학교 당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는 접어두고 눈에 보이는 실리를 챙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김예슬 씨는 "대학은 이제부터 차라리 진리의 전당이기를 당당하게 포기 선언하고 취업고시 학원이라고 천명해야 하지 않은가"라고 꼬집어 물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할 수 있으니 대학이라고 예외라는 법은 없다.

대학이 '먹고 살기가 만만찮으니 진리 탐구는 여기까지만 하고 앞으로는 취업을 위한 도구로 거듭나겠다'라고 선언한다면, 그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다. 그러면 대학은 자기의 새로운 역할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 사회가 학문적 탐구를 필요로 하는 한, 다른 형태의 학문공동체가 어딘가에 또 생겨날 것이며 학문을 연마하고 전수하고자 하는 이들은 그리로 다시 모여들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실리를 추구한다는 이들은 대학이 단지 '취업고시 학원'일 뿐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지도 못한다. 진심이든 사탕발림이든 이들 또한 여전히 대학이 '진리의 전당'으로서 위엄과 명예를 지님을 시인하고 있다. 정몽준 씨만한 유력인사가 고작 취업학원의 명예수료증을 받겠다고 그 망신을 당하면서까지 몇 년째 광주를 들락거리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들은 진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빙자해 얻은 명예의 사회적 이용 가치가 크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결국 이들은 대학이 진리를 탐구하는 기관이라 당당히 말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실리를 추구하는 기관이라 솔직히 말하지도 못하며, 겉으로는 진리니 명예니 하는 말들을 내건 채 안에서는 다른 이득을 챙기는 모순과 이중성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이중성이 치졸하거나 속물적이라는 데에만 있지 않다. 대학의 명예가 본래 제 소유라면, 그것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든 누구를 주든 제 얼굴에 먹칠하는 것 외에 다른 해악은 없을 것이니 우리는 그런 집단을 가리켜 '방탕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악하다'고 말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이 지니고 있는, 그래서 누군가에게 수여하기도 하는 그 명예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명예는 내 스스로 얻을 수 없다. 명예는 오직 남들이 나에게 부여해주고 지속적으로 인정해줌으로써만 내 것이 된다. 대학이 진리의 전당으로서 지니는 명예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의 권력이 제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듯, 대학의 명예 또한 본래 제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학문 탐구와 교육을 통해 사회 전체에 보편적 유익을 끼치라고, 그런 일을 하라고 사회가 대학에게 명예를 위탁한 것이다. 제 집안 식구들 살림살이 불리는 데 유용하게 쓰라고 명예를 맡긴 것은 아니다. 이를 잊어버린 채 대학이 사회로부터 위탁받은 명예를 힘 있는 자에게 팔아 제 살을 찌우는 데 사용한다면, 시민들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데 쓰는 정치인들이 권력의 찬탈자라 불리듯 그러한 대학 또한 사회적 가치의 약탈자라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 지난 2009년 2월 전남대가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려 하자, 전남대 학생들이 행사장 입구에서 정 의원의 진입을 막고 있다. 이날 정 의원은 학생들의 반발로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하고 돌아갔다. ⓒ연합뉴스

남의 물건을 맡은 사람은 곱게 쓰고 돌려줘야 할 무거운 책임을 진다. 맡은 물건이 귀하고 소중한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앞에서 대학 일반이 학문 탐구의 기관으로서 지니는 명예에 대해 말하였지만, 사실상 전남대는 다른 대학에 비해 특별한 명예를 더 누리고 있다. 그것은 전남대가 '5.18의 대학'으로서 갖는 명예이다.

이 명예는 단지 전남대 학생들이 80년 5월에 권력자의 총칼에 저항함으로써 광주 민중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 때문에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전남대는 5.18의 정신을 학문적으로 계승하는 대학임을 자처해왔다. 5.18 연구소를 두어 지속적인 연구를 했고, 5.18 수업을 통해 민주화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지금도 교수들과 학생들은 전남대가 계승해야 할 정신적 전통을 다른 무엇보다도 5.18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5.18 민중항쟁이 한국 사회의 귀하고 소중한 역사적 자산인 한에서, 그 자산을 돌보고 배양하는 역할을 자처한 전남대는 그만한 명예와 함께 그만한 사회적 책임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책임이란 곧 돈과 권력에 굴종하지 않은 채 자유롭고 비판적인 지성의 공동체를 지키고 일구어야 할 책임이다.

전남대가 앞서 두 번이나 정몽준 씨를 부른 일이 이미 충분히 부끄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슬로 대학 교수인 박노자 씨가 굳이 "이건희를 '철학자'로 명명한 고려대보다는 철학과 교수와 학생의 반발로 정몽준에게 끝내 '명예 철학박사'를 주지 못한 전남대가 앞으로 비판적 지성의 고향이 될 확률이 더 높은지도 모른다"라며 격려하고 응원했던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전남대에 명예를 부여하고 신뢰를 보내기를 아까워하지 않고 있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어디 전남대뿐이겠는가. 흔들림 많은 우리 시대에 뜻있는 이들이 학문공동체인 대학들에 보내는 기대와 희망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남대 대학본부와 정몽준 씨에게 청한다. 사회가 대학에 위탁한 명예를 돈으로 사고파는 일을 중단하라. 교육자와 정치가로서 누구보다도 한국 사회를 염려해야 할 당신들이니 이 일이 누구에게 어떻게 득과 실이 될지 멀리 보고 판단해 달라. 앞서 두 번 그러했듯이 우리는 다시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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