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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52년만에 '무죄'…팔순 넘은 장녀 "이제 내가 죽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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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52년만에 '무죄'…팔순 넘은 장녀 "이제 내가 죽어도…"

대법원 "늦게라도 재심 해 잘못을 바로 잡았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간첩 누명이 52년 만에 풀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이날 전원합의로 이승만 정권 당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로 기소돼 사형 선고를 받은 조봉암 선생 재심 사건을 원심 파기하고 무죄 선고를 했다.

재판부는 사형선고 당시 유죄로 인정한 세 가지 혐의 중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불법 무기소지 혐의는 선고유예로 판결했다.

"조봉암, 간첩 아니다"

재판부는 선고문을 통해 "피고 조봉암은 진보당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국가변란 죄가 적용됐지만 진보당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며 "또한 진보당의 평화통일 정책이 북한의 위장통일과 일맥상통하다는 이유로 국가변란을 꾀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서로 같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판시했다.

또한 재판부는 "진보당이 국가변란을 위해 만들어졌다며 당시 재판부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했지만 진보당의 강령 등을 보면 사유제와 시장제를 전면부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등 사회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며 "체제 전복 등을 실제적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 52년만에 간첩혐의 무죄를 선고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 여사가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을 나서며 김용기(오른쪽) 조봉암선생 기념사업회장과 지용택(왼쪽)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등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재판부는 간첩 혐의를 두고도 "유일한 증거인 증인 양이섭의 진술은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부대가 증인을 영장 없이 연행,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다"며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단 재판부는 권총과 실탄을 소지한 것을 두고는 "불법 무기소지에 해당한다"며 유죄를 인정했으나 선고를 유예했다. 재판부는 "진보당을 창당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했지만 뒤늦게라도 재심을 진행해 잘못을 바로 잡는다"며 "공소사실이 무죄라는 것을 전원 일치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승만 정권, 정적 조봉암 누명 씌워 제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8월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 2010년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동시에 정리위원회는 조봉암 선생 사건을 '위협적인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와 피해 구제 및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권고했다.

재심을 청구 받은 재판부는 2년간의 심리 끝에 "조봉암 선생은 군인·군속이 아닌 일반인인데도 수사 권한이 없는 국군정보기관인 육군 특무부대가 수사하는 등 수사과정의 범죄 사실이 증명됐다"며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었다.

1898년 인천 출신인 조봉암 선생은 YMCA 중학부에서 수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첫 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도 참석하는 등 소련, 중국,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었다.

해방 후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 노선을 걸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 선생은 각각 80만여 표 200여만 표 등을 받았다.

그렇게 대중적 지지를 넓혀가던 조봉암 선생은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했고 3대 대선에서 30%의 지지율을 얻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위협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 선생을 진보당을 창당해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간첩죄를 적용 1958년 구속했고, 조봉암 선생은 사형을 선고 받은 뒤 1959년 처형 당했다.

"이젠 죽어서 아버지 볼 수 있겠다"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 여사는 무죄 선고 이후 "이제 내가 죽어도 아버지를 볼 수 있겠다 싶다"며 "그동안 도와주신 여러 분에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조 여사는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뒤 50년 동안 가족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며 "그래도 세상이 조금은 바뀐 거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조 여사는 "앞으로 이런 일은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무죄가 되면 쓰려고 비워 놓은 아버지 비문을 지인 분들과 상의한 뒤에 새겨 넣겠다. 정적을 이렇게 죽이는 건 말 이 안 된다"고 말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이제야 역사가 판단을 내린 것"이라며 "앞으로 인천에 조봉암 선생의 동상을 세우는 일 등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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