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가 분단체제 하에서 독재정권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라는 점에 머물지 않는다. 그에 대한 우리의 더 큰 관심은 한국의 현대역사 속에서 그가 실천하고자 했던 역사의 길에 있다. 즉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해방 후 분단의 과정에서, 그리고 전후 1950년대 한국정치의 과정에서 그가 밟았던 삶의 궤적은 역사현실의 구체적 조건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역사의 한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공산주의자에서 혁신파까지…현실에 발을 딛고 선 정치
이번에 발간된 정태영의 <조봉암과 진보당>(후마니타스 펴냄)은 조봉암이 살았던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 그 궤적을 통해 조봉암이 추구했던 역사의 길을 탐색하고 있다. 진보당원으로서 역사의 현장에 직접 참여했고 뒤늦게 진보당 연구에 매진해 온 저자에 따르면, 그 길은 비미비소(非美非蘇)의 한국적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의 한국적 길이라는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조봉암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나온 엘리트 공산주의자였고, 7년 이상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그럼에도 그는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과 결별하고 민주주의 독립전선을 통해 중간파의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남북한에 분단정부가 수립되는 상황에서는 중간파의 다수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불참했던 것과 달리 남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조봉암의 선택은 그를 현실 영합주의자로 평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바탕을 두고 행동했던 것이 바로 그의 장점이자 특징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현실주의자였고 참여자였다.
그러나 그를 현실주의자이자 참여자로 규정하는 것은 그에 대한 절반의 평가일 뿐이다. 그는 현실에 참여하면서 그 참여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와 같은 그의 시도는 1950년대 후반에 가장 잘 드러났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서 무려 216만 표를 얻었던 그는 혁신 야당인 진보당을 결성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노선을 실천하고자 했다.
조봉암이 추구했던 노선이란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을 기하는"(진보당 강령)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미비소(非美非蘇)의 한국적 제3의 길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노선이 본격적으로 실천되기도 전에 그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됐다. 그리고 그 진상조차 규명되지 않은 채 반 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서야 다시 빛을 발하는 조봉암
나는 전후의 분단체제에서 때 이르게 제기된, 그 결과 시대의 한계를 넘기 어려웠던 조봉암의 노선이 어쩌면 민주화와 탈냉전, 그리고 세계화의 현 상황에서 더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국가사회주의의 공산독재 체제도 이미 붕괴했거나 그 의미를 갖기 어렵게 됐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시장과 자본가의 힘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 노선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은 매우 크다. 또한 탈냉전과 더불어 남북한 평화통일의 길은 특정 강대국에 기대는 태도가 아니라 강대국들 사이에서 자주적이고 균형 잡힌 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의 조건을 인정하고 그 현실에 대한 참여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조봉암의 태도는 현실적 진보주의자로서 우리의 귀감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시간은 흘러 조봉암 시대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진보주의가 우리 사회에서도 점차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경험하듯이, 진보주의는 현실을 무시하기 쉽다. 그 결과 진보주의란 현실에 책임을 지지 않는 한낱 추상적인 비판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보주의가 진정 현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봉암의 삶은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