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무엇 때문에 땀방울을 길 위에 쏟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거창한 게 아니다. 미군기지가 들어설 경기도 평택 대추리, 도두리 마을에서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들은 계속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많은 보상금을 받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정말 평택 주민들은 '이상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40여 년 전 가까운 일본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주민들의 움직임에서 이 질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가누마 현은 일본 열도 최북단 홋카이도에 있는 인구 2만여 명의 작은 마을이다. 이곳 주민들도 평택 주민들이 겪고 있는 것과 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40여 년 전 미국과 일본 정부는 나가누마 현에 소련 폭격기에 대비하는 미사일 방어(MD) 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평생 농사밖에 몰랐던 이곳 주민들은 고향 마을에 미사일 기지가 들어서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들고 일어섰다. 이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나가누마 미사일 기지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1심 재판에서 후쿠시마 시게오라는 젊은 판사가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았다. 비록 2심과 3심에서는 주민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1심 재판 이후 일본 사회에서 진행된 논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평생 살아 온 고향 마을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데 대해 저항하는 주민들을 '공익과 안보'라는 명분으로 비난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 나가누마 미사일기지 사건을 자세하게 다룬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이경주 인하대 법학과 교수는 "나가누마 미사일 기지 사건은 평화적 생존권이 재판규범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며 평화적 생존의 권리는 협소한 법률 논리를 넘어선 보다 근본적인 인권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인권오름>에 실린 이 교수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미사일기지 위에 꽃핀 '평화적 생존권'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바야흐로 CNN의 계절이다. 언제적 모습인지 불분명하지만 살기(殺氣) 넘치는 북한군의 퍼레이드, 길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먹는 남루한 옷차림의 굶주린 사람들, 비밀리에 입수하였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돌려대는 공개처형 장면들…. 구태의연한 레퍼토리이긴 하지만, 이런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북한은 두말할 나위 없는 '불량국가'(rogue state)다. 그런 CNN이 이번에 새로 개발한 메뉴도 있다. 북한 미사일에 대한 요격 가능성과 관련한 언급이다. 부시는 이 미사일방어시스템이 아직 만족스럽지는 못하다고 했지만, 뉴스의 행간을 읽어보자면 "위험스런 '공공의 적'을 공중에서 격파하는 공익의 수호자를 상상하여 보라.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뭐 이런 식이다.
그런데 적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환상적 논리도 또한 알고 보면 미국의 군비증강을 위한 오랜 애창곡 중의 하나다. 미국은 냉전이 한참일 무렵, 웨스턴 일렉트릭 컴퍼니(Western Electric Co.)라는 무기개발회사를 통해 공중에서 소련의 폭격기를 요격할 수 있는 무기개발에 열을 올린 적이 있다. 급기야 이를 실전배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나이키(Nike) 미사일이다.
작은 시골마을에 미사일기지 날벼락
그런데 이러한 개념의 미사일이 배치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공익이 수호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쟁에 휩쓸려 공익이 송두리째 뽑혀나갈 가능성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폭격기나 미사일로 공격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요격미사일기지는 공격목표 제1호로 격상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미사일기지 주변에 사는 범부중생의 평화적 생존이 송두리째 날아가리라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나아가 아무리 방어를 명목으로 건설되는 것이라고는 해도 미사일기지는 그 자체로 주변국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기지임이 분명하다. 나가누마 미사일기지 사건은 미국이 규정한, 1960년대의 이른바 불량국가 소련의 폭격기에 대비하는 요격미사일 나이키를 나가누마에 배치하려는 데서 시작됐다.
일본 홋카이도에 위치한 나가누마 현
나가누마는 일본 열도 최북단 홋카이도에 위치한, 인구 2만을 넘어본 적이 없는 우리의 군 단위쯤에 해당하는 조그만 시골이다. 그나마 요즘은 삿포로 시가 넓어지면서 전원생활을 하며 출퇴근하려는 사람이 늘었지만, 고원평야의 쌀농사가 전부이고 수해방지 등을 위한 숲(보안림)의 일종인 수원 함양림 마오이 산이 한켠에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조그만 촌동네에 미국과 일본 정부는 대소련 방공(防空)기지로서의 '역사적 책무'를 맡기려고 했다. 이에 일본정부는 방위력증강계획을 세우고 그 일환으로 이곳에 항공자위대 기지를 설치, 이곳에 나이키 미사일을 배치하고자 했다.
미사일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막대한 토지가 필요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위해 나가누마 내에 있는 마오이 산 일대 약 10만 평(35헥타르)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보안림 지정을 해제하고자 했고, 해제 처분을 위한 법리상의 명분으로 들고 나온 것이 다름 아닌 '공익상의 이익'이었다.
'강요된 공익'에 반기 든 주민들
그러나 지역주민 173명(이후 소송인단은 359명으로 늘어났다)은 기지건설을 위한 보안림 지정 해제 처분이 공익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익을 해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보안림 해제 처분이 이루어진 1969년 7월 7일, 즉각 이를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것이 나가누마 나이키 미사일기지 사건의 시작이다.
사실 법을 접하다 보면 일반인은 물론이고 법률전문가조차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가는 추상적인 개념들, 괜히 주눅이 드는 개념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공익, 국가안보, 뭐 이런 개념들이다. 이런 개념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첫째, 누구의 공익인지, 무엇을 위한 공익인지, 누가 판단하는 안보인지가 불분명하다. 둘째, 이런 개념에 시비를 걸면 괜히 공익보다는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인간 같고, 안보는 도외시한 채 한가한 소리만 하는 사람으로 도맷금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은 개념이라는 점이다. 셋째, 그런 탓인지 법률전문가조차 그냥 넘어가기 때문에 대부분 정부가 생각하는 공익과 안보가 국민의 공익과 안보로 둔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가누마 주민들은 이에 대하여 'NO'라고 선언했다. 요격미사일기지가 설치되면 농사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깨지고 전쟁에 휩쓸릴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기 때문에 공익이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익을 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사일기지 설치를 위해 '공익'을 이유로 보안림 지정을 해제하는 것은 정부의 행정편의이자 정부가 생각하는 공익일 뿐이지 주민들의 공익, 곧 평화적 생존에 대한 배려 및 증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나가누마 미사일기지 사건은, 그 시작은 비록 조촐했지만 같은 해인 1969년에는 산리즈카 공항 분쇄 투쟁, 동경대학의 야스다강당 점거사태 등으로 이어지면서 일본 사회를 평화와 인권 함성의 격랑으로 밀어넣었다.
1심 판결 "미사일기지는 평화적 생존권을 침해한다"
이 격랑의 와중에 주민들의 소박한 생각에 손을 들어 준 것은 후쿠시마 시게오라는 젊은 판사였다. 우리나라로 보면 386세대의 판사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실제 후쿠시마 판사는 사법개혁을 추동하기 위하여 결성된 청년법률가협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청년법률가협회의 지시나 시책에 따라 판결을 내린 것은 아니고, 판사로서의 양심과 법리에 따라서 재판하였을 뿐이었다.
후쿠시마 판사는 1973년 9월 7일 '일본 헌법에 비무장평화주의를 규정하고 있는데도 그 규모로 보나 장비로 보나 군대에 해당하는 자위대를 두는 것은 헌법 원리에 반하며, 따라서 자위대의 일부인 항공자위대의 미사일기지 건설을 위한 보안림 지정해제는 공익과 무관하다'고 판결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정부의 보안림해제처분이 일본국 헌법 전문에서 규정하고 있는 평화적 생존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는 점이다. 곧 나이키 미사일 발사기지가 설치되면 유사시 상대국의 첫 번째 공격목표가 되는 바, 이는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의 권리를 침해하는 공권력 행사'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청년법률가협회와 같은 많은 법률가단체, 노동조합, 지역주민, 각종 정당과 사회단체의 지지 속에 14년이나 계속된 나가누마 미사일기지 사건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요즘 평택에서도 평화적 생존의 권리가 주창되고 있다. 평택 미군기지가 북한지역은 물론 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한 신속기동군 기지로 재편되면 유사시 상대국의 첫 번째 공격목표가 되는 바, 이는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의 권리를 침해하고 침략전쟁을 부인한 우리 헌법의 평화주의 원리에도 반한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판사의 판결과 궤를 같이 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재판규범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다
다시 1970년대의 일본으로 눈을 돌려보면, 용기 있는 지역주민과 헌법원리에 충실한 재판을 하고자 했던 판사의 양식이 어우러져 헌법학자뿐만 아니라 평화애호 세력을 흥분시키고 전국민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나가누마 미사일기지 사건 1심판결은 그 뒤 무참히도 뒤집혔다. 특히 고등재판소는 1976년 8월 5일 자위대 설치와 같은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갖는 국가적 행위는 위헌 무효로 명백히 확신할 수 없는 이상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른바 '통치행위론'이라는 궤변으로 평화적 생존에 대한 전국민적 기대를 뒤집은 것이다. 그 후 1982년 9월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14년에 결친 재판은 종결되었고, 결국 나가누마에는 항공자위대의 미사일 기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나이키 미사일 대신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배치되어 오늘도 정체 모를 가상의 적(아마도 북한)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고된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미사일기지가 결국에는 설치되고 현재까지 엄존한다고 해서, 고등재판소와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다고 하여 실망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간 추상적으로만 논의되던 평화적 생존권, 평화와 인권을 연결해주는 평화적 생존권이 재판규범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법정을 넘어 인간의 함성으로
사실 요즘 우리 사회의 새로운 관심은 평화와 인권이다. 그런데 이 평화와 인권은 별개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정책의 문제이고 인권은 그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평화적 생존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는 신체의 자유나 언론출판의 자유와 같은 인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화적 생존권은 인권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평화적 생존권은 평화적 생존을 저해하는 국가적 행위에 저항하는 권리이며, 무기수출과 같은, 국가에 의한 평화저해 행위를 견제하는 권리이며, 분쟁에 휩쓸리기 쉬운 정책을 취하지 않도록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평화적 생존권은 자기가 사는 나라에 대해서만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다른 나라, 예를 들어 미국에 대해서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이러한 인권을 어려운 말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3세대의 인권'이라고 한다. 제3세대의 인권은 연대의 권리이기도 하다. 평택의 평화적 생존은 평택 주민만의 분투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민과 미국민, 그리고 평화를 애호하는 모든 사람이 연대하여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의 신속기동군 전략을 견제하여야 온전히 지켜질 수 있는 권리다.
따라서 평화적 생존권이 우리 법원에서 재판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낙담할 필요는 없다. 인권은 재판규범이면서 동시에 정치규범이다. 재판의 기준이 되기 위해서는 소의 이익, 입증책임 문제 등 복잡한 소송기술로 인하여 그 당위성은 인정받으면서도 승소할 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정치규범으로서의 인권은 국가의 정책결정이나 입법과정을 통해 반영될 수 있는, 보다 진면목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평화적 생존을 저해하는 국가적 행위를 인권의 이름으로 반대함으로서 민초들의 목소리가 국가정책 결정에 반영되도록 하고, 평화적 생존을 저해하는 입법이나 조약을 개폐하도록 하는 것도 인권의 책무다.
나가누마 미사일 기지 사건은 평화적 생존권이 재판규범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면서 동시에 평화적 생존의 권리는 법정에 가두어 둘 인권이 아니라, 국민들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함성 속에 꽃피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화적 생존의 권리, 한국사회에서도 과연 주권자인 국민의 함성으로 메아리칠 것인가.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 제13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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