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곰돌이 탈을 쓴 남자가 온갖 치장을 한 여성들에 둘러싸여 끄덕끄덕 어깨춤을 추던 광고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 광고는 4년 후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예고편과 같은 것이었다. (곰돌이가 아니라 '똥돼지' 탈을 씌웠더라면 '노스트라다무스'급 CF가 되었겠지만.) 이 CM송은 히트를 쳤다. 이것이 하나의 징조였을까? 대중매체에서도 부의 대물림를 당연하게, 혹은 한발 더 나아가 자랑스러운 것으로 내세웠던 것은.
한 케이블방송에서 20대 무직에 최고급 명품들로 치장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4억 명품녀' 이야기를 내보내 시청자들의 반감을 사면서 논란이 확대되고 있다. 시민들의 반발에 국세청이 불법 증여 및 탈세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 관련기사 : "국세청, '4억 명품녀'를 조사하라")
'노이즈 마케팅'도 주요 전략으로 삼는 케이블 방송으로서는 큰 히트다. 이전에도 한 케이블 방송에서 재벌 2세 남성들의 일상을 담는 <파파리치>라는 프로그램을 내보내려다 시청자들의 반발에 보류한 바 있다. 부자들의 생활을 조명하는 미국 프로그램을 모방한 가십성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짚은 방송이기도 하다.
▲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CM송을 히트시킨 광고. ⓒ현대카드 |
이 '4억 명품녀'는 얼마전 큰 파문을 일으켰던 유명환 전 외교부장관의 딸과 함께 이런 슬픈 소식들의 대척점에 섰다. 지난 7일 충남 당진군 환영철강에서 근무하던 29살 청년 김 모씨가 새벽 2시께 용광로 위에서 작업을 하다 발을 헛디뎌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지름 6m의 용광로의 쇳물은 섭씨 1600도를 넘는 온도였고 10일에야 김씨의 시신 중 다리뼈와 대퇴부 만을 수습할 수 있었다.
'흑진주 아빠'도 있다. 가나 출신의 부인을 사별로 떠나보내고 혼혈 삼남매를 키우는 사연이 지난 2008년 <인간극장> '아빠와 흑진주'편에 소개됐던 황 모씨는 지난 9일 생활고를 못 이기고 부산 태종대에서 투신 자살했다. 고아로 남은 세 아이들은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인 '지구촌 사랑나눔'이 양육할 예정이라고 한다.
양극화의 2세들,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억지로 만들려 해도 더 마땅한 사례를 찾기도 어려울 듯한, 양극화 사회의 적나라한 두얼굴이다. 어떤 자녀는 안전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용광로에서 새벽 작업을 하다 참사를 당하거나 생활고에 못이겨 고아가 되고 어떤 자녀는 4억 원어치 명품을 몸에 걸치거나 부모 덕으로 '특채'가 된다.
이들 사건들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부모의 경제 사정에 따른 빈부격차가 자녀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의 빈부는 부모의 슬하에 있던 어린 시절을 벗어나 성년이 되어도 극복되거나 좁혀지지 않는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에서 급속도로 확산된 양극화가 '빈부의 대물림'을 거쳐 그 2세대를 낳고 있는 셈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계급 사회로 더욱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공정한 사회'를 말했다. 제대로 찔렀다. 어찌보면 늦은 자각이기도 하다. 취업을 하지 못하는 젊은 이들에게 "내가 젊을 때는"을 운운하거나 "눈이 높다"는 둥 입지전적인 자신의 젊은 시절을 내세오던 그가 시대의 좌절감에 대해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한 사회'는 허무할 뿐이다. 유명환 전 장관의 자녀 특채의 경우는 '공정'이라는 최소 기준도 지키지 못해 웃음거리가 됐지만 부모의 재력과 권력에 따라 자녀가 갖출 수 있는 '스펙'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당연한듯 요구하는 어학연수도 일반 서민가정에서는 부담하기 어려운 거액의 돈이 든다.
몇몇 보수신문들은 양극화에 대한 지적을 하면 "부자에 대한 반감을 키운다"거나 "국민을 분열시킨다"고 반박해왔다. 4억 명품녀를 비난하며 '공정한 사회'를 내세우는 지금은 '부자 감세'의 부당함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봤을까? 반성을 바라는 것은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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