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자서전> 대표집필자 김택근. 이제는 "김대중 신도가 됐다"지만, DJ와 일면식 없던 그는 2004년 초 느닷없이 집필자로 발탁됐다.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그의 문체는 DJ의 생애를 묘사해 내기에 제격이었다. 임종 직전인 지난해 7월, 죽음을 예감한 듯 김 전 대통령은 그에게 자서전 편집위원 임명장과 만년필을 선물했다. 당초, 집권 전까지를 다룬 1부 집필을 맡았던 그는 DJ의 '마지막 임명장'을 수여받고 내리 2부 집필까지 도맡았다. '김대중 역사'의 공인된 사관(史官),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만나 <김대중 자서전>을 미리 엿봤다. <편집자>
▲ <김대중 자서전>의 대표집필을 맡은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 ⓒ프레시안(손문상) |
"자서전다운 자서전은 이번이 처음"
프레시안 : 2004년부터 시작해 작업기간이 햇수로 7년이다. 출간을 앞둔 소감이 어떤가?
김택근 : 끝났다는 실감이 잘 안 난다. 내 글이 부족해서 김 전 대통령의 엄청난 삶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다. 큰 산을 넘어온 것 같은 느낌인데도 두렵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책 제목은 무엇인가?
김택근 : 그냥 '김대중 자서전'이다. 부제도 안 붙는다. 많은 논의를 했고 다른 제목도 많이 나왔는데, '김대중' 자체가 주는 무게나 상징성이 크기 때문에 다른 어떤 제목으로도 그 삶을 담아내기가 어렵다. 외국에 가도 김대중 그 자체가 브랜드니까.
프레시안 : 앞서 나온 자서전과 다른, 이번 자서전이 갖는 의미라면?
김택근 : 예전의 자서전은 김 전 대통령의 삶을 나름대로 구성해서 추인을 받는 형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재임 기간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 이번 자서전은 김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삶 전체를 모두 구술했다. 삶 전체를 관통하는 그런 최초의 자서전이다. 마지막 일기와 관련된 부분도 있고, 퇴임 후 느낀 소회들까지 다 포함돼 있다. 자서전다운 자서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프레시안 : 김 전 대통령의 구술을 비롯해 집필 과정 등을 개괄적으로 설명하자면?
김택근 : 김 전 대통령이 2006년부터 2년 동안 41회를 구술했다. 엄청난 분량이다. 녹화도 다 돼 있다. 한번 할 때 두 시간을 넘기기도 했는데, 건강 때문에 더 하려고 하면 비서들이 말렸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어떤 관성에 의해 글을 써 왔다. 매일 7~8시간 글을 썼고, 잘 안 써질 때에는 소주를 한 컵 들이키고 작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일기에 보면 '김택근 사장이 글을 잘 쓴다'는 얘기가 있다. 나중에 이 글씨를 동판화로 만들어 간직하고 싶기도 하다.(웃음)
프레시안 : 이번 자서전에 처음 공개되는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해 달라.
김택근 : 김 전 대통령의 삶이 베일에 가려있던 게 아니라서…. 그러나 다르게 보면 전부 새로운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모든 사건들에 대한 본인의 소회가 담겼기 때문이다. 비화는 물론 있지만 흔히 말하는 '쇼킹한' 그런 것은 없다.
프레시안 : 언론에서 출생의 비밀을 살짝 언급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공개한다면?
김택근 : 김 전 대통령은 서자(庶子)가 맞다. 소위 '첩의 아들'이다. 그것을 몇 번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이번에 밝힌 것이다. 왜 그간 안 밝혔느냐. 어머니의 삶 때문이었다. 자기만을 보고 살아온 삶인데 그런 얘기를 하면 어머니가 너무 가엾고 불쌍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과 화해도 했기 때문에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말씀을 하셨다. 두 번째 부인의 3남 1녀 중 맏이가 김 전 대통령이다. 하의도에서 어머니 집과 아버지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자란 것이다. 그동안 성이 제갈씨니 뭐니 하는 얘기도 있었는데, 그런 것은 근거가 없다. 저한테 그런 말까지는 안했지만 내가 봤을 때는 틀린 얘기 같다.
프레시안 : 김 전 대통령의 삶은 고난과 역경, 도전과 영광으로 표현되는데, 김 전 대통령이 가장 몰입해서 돌아봤던 인생의 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김택근 : 도쿄에서 있었던 납치사건, 남북정상회담,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것 등이다. 가장 일사천리로 말씀했던 것은 납치사건이었다. 구술을 옮기면 거의 글이 될 정도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이어지더라. 본인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너무 생생하게 기억을 했다. 8월 8일 납치를 당해 8월 13일에 돌아왔는데, 그 날을 각별히 기억하면서 격정적으로 소회를 했다.
프레시안 :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다른 내용이 있었나? 예를 들면 양일동(당시 통일민주당 당수, 일본에서 납치되기 직전 김 전 대통령이 만났던 인사) 등이 협력한 것이냐 하는 의혹도 있다.
김택근 : 아니다. 오히려 양일동 등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와서 보고 바로 추적해 들어가지 않았으면 당했을 것이라고 했다. 토막 살해를 하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으니 수장시키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와서 오히려 시간을 벌어 계획에 차질을 빚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을 하셨다. 항간에 (중앙정보부와의) 밀약설 등이 있는데, 그 설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이 속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렇게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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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김대중 납치사건 등 고난의 상대방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떻게 회고됐나?
김택근 : 박 전 대통령은 정적이었고, 크게 보면 라이벌이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말씀을 안 하셨다. 그러나 결국 모든 고난이 거기에서부터 비롯된 것 아니겠나. 나중에 과거사위원회에서 납치 사건과 관련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련성에 대한 심증은 있으나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어물쩍 마무리했다. 거기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이 굉장히 유감을 표했었다. '이런 무도하고 불의한 사건은 역사적으로도 응징을 해야 하는데, 심증이 가면 당연히 그것을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이후락(당시 납치사건을 주도한 중앙정보부장)을 내치지 않은 것도 미심쩍은 것 아닌가.
프레시안 : 박정희 전 대통령이 관여했다는 '심증'과 관련된 구체적인 증거를 거론하기도 했나?
김택근 : 과거사위가 발표한 것만 인용하셨다. 그러나 본인은 박 전 대통령이 시켰다는 심증을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인내하고 기다렸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당사자 국가인 일본에 갔을 때, 납치 사건을 서로 문제 삼지 않기로 정치적인 선택을 했다. 일본이 당연히 어떤 조치를 했어야 하는데 안한 것이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대통령이 됐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과거사위원회 결론도 퇴임 이후 나오도록 했다. 재임 시기에는 부담을 준다고 생각했다.
대통령 퇴임 이후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하기도 했다. 박정희 기념관도 추진했고, 박근혜 전 대표가 왔을 때도 저한테 말씀하시길 박정희가 살아서 용서를 구하러 온 것처럼 얘기했다. 아주 기분 좋아했었다. 어떻게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딸을 통해 용서를 구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YS와 '역사적 화해'? 글쎄…"
프레시안 : 박 전 대통령을 용서했고, 내란 음모 사건으로 핍박을 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사면을 건의했다. 역사적 정적들과는 대개 화해를 했는데, 왜 한 때 민주화 동지였던 YS는 끝까지 끌어안지 않았을까?
김택근 : 전두환, 노태우는 사실 화해를 한 것이 아니라 김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용서를 한 것이다. 화해는 다르다. 저쪽에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화해를 하는 것이다. YS는 '화해했다'고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YS는 92년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을 빨갱이로 몰았다. 김 전 대통령은 그것을 굉장히 아프게 생각했다. '민주화 동지까지 어떻게 나에게 그런 비난을 할 수 있느냐'면서 굉장히 아파했는데, 한번도 YS는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YS의 3당 합당은 민심에 대한 쿠데타, 과하게 표현하면 군부 세력의 소굴로 YS가 들어간 것 아닌가. 두 사람의 길이 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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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케임브리지로 떠날 때에도 YS는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후에는 YS가 김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를 굉장히 막았다. 심지어 사찰도 하고 미행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YS의 저돌적인 것에는 점수를 준 적이 있다. 내 생각에 YS와 DJ가 애증관계인 것은 분명하지만, 3당 합당, 그리고 YS가 대통령에 취임한 1994년 이후, 김 전 대통령은 YS에 대한 입장 정리를 한 것 같다는 느낌이다.
프레시안 : 87년 대선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권 단일화 실패의 원인으로 많이 지목되는 것 같다. 김 전 대통령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나?
김택근 : 자서전에서 꽤 상세히 설명을 한다. 당시에 김 전 대통령과 YS 사이에 역할 분담론이 나왔다. 누가 먼저 대통령을 하느냐 그런 문제들이었다.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김 전 대통령이 아닌가 생각한다. YS가 외국에 나가서 '나이가 많은 DJ가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랬는데 모든 언론에서는 반드시 YS가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가 '군부가 DJ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군부 독재를 없애자고 선거에 나서는데, 군부가 반대한다고 해서 안 된다? 군부를 깨부수자는 사람이 군부를 그렇게 무서워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그런 식으로 언론에 대단한 피해를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은 단일화 실패에 사과했다.
프레시안 : 분열의 책임이 자신에게만 몰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김택근 : 그렇다.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분열된 것처럼 보인 것은 내게 큰 책임이 있다'고 했다.
프레시안 : JP에 관한 부분은? 가령, DJP 연합에 대해선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데.
김택근 : JP와 같은 강한 보수층을 끌어안은 것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독일 사민당의 공동 정부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러면서 'JP를 끌어안은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내가 대통령이고, 내 국정 철학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고 했다. 긍정적으로는 다소 급진적인 DJ의 대북 정책에 대해 국민들이 거부감을 덜 갖게 하는 측면도 있었다. JP 계열로 입각한 각료들이 DJ 정부에서 일을 하며 'DJ의 재발견'을 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도 이들이 굉장히 일을 잘한다고 봤다. 그래서 (IMF 이후)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데 서로 협심을 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당선되고 나서 나는 내가 가진 국정철학대로 했기 때문에 다시 그 상황이 되도 (DJP연대를) 하겠다. 어차피 정치라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인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는 것이지 그런 흠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독일의 연정의 예를 많이 들었다.
프레시안 : 집권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성공했으나 결국 공동정부는 붕괴되지 않았나.
김택근 : 선거에서 져서 붕괴된 것이다. 당시 대북정책 때문에 균열이 됐다고 하는데, 그것은 구실에 불과하다. 사실은 선거를 통해 자민련이 미미해진 것이다. 제자리를 못 찾으니까 자민련이 축출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일 때와 공동정부일 때 국정 기조나 통치 스타일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DJP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김 전 대통령을 흠 잡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공동정부가 깨진 과정에서 JP에 대한 서운함도 있을 법 한데?
김택근 : 공동정부가 깨지자 김 전 대통령이 총리였던 JP를 배웅하러 문 앞까지 나온다. 잘 가시라고, 그리고 '그간 보여준 열정을 나는 잊지 않겠다'고 했다. 김종필 총리도 와서 열심히 했던 것 같다. JP도 그 이후에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섭섭해 하거나 비하하는 말을 거의 안했다. 김 전 대통령은 사람을 믿었고, 또 성과를 내면 꼭 칭찬했다. 상대방 말을 경청한다. 나와 대화할 때도 반말을 한 번도 하지 안했다. 그렇게 많이 뵀는데도 그렇다. 내가 <경향신문> 계열사 사장을 한 적이 있는데, 꼭 나를 사장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배려를 한다.
"남북정상회담, 글을 쓰던 나도 가슴이 벅찼다"
프레시안 : 재임기의 기록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이라면?
김택근 : 자서전 전체적으로 봤을 때, 김 전 대통령이 6.25 전쟁 당시 서울에서 탈출해 목포까지 가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고 눈물겹다. 그리고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다. 또 한 가지는 김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하러 가서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설득하고, 결국 설득한 후에 땅을 떠나올 때의 그 감회, 정말 인상 깊었다.
김 전 대통령이 일생에 두 가지 목표가 있었는데, 민주주의, 그리고 남북통일이다. 두 가지가 삶을 관통한다. 지금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성이 됐는데, 남북관계는 그렇지 않다. 그 분이 마지막 할 수 있는 것이 남북관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이다. 정상회담을 끝내고 와서 거의 기절하다시피 쓰러진 것이다. 정리하다보면 내가 격해져서 (글을) 못 쓸 때가 많았다. 글이 절제가 된 상태로 나아가야 하는데, 절제하다가도 내가 가슴 벅찰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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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남북정상회담은 부인할 수 없는 최대의 역사적 업적이다.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하는 과정 등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이 많이 얘기를 하기도 했다. 특별하게 추가적으로 얘기된 것은 없었나?
김택근 : 임 전 장관이 당시 배석했기 때문에 거의 같다. 김 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평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후한 편이다. 그 외에는 임 전 장관의 '피스메이커'에 나온 내용과 비슷한데, 김 전 대통령의 소회가 많이 들어간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았다'는 표현을 하더라. 모든 것을 다 쏟은 것이다. 그리고 관철시켰는데,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더라.
프레시안 : 자서전 집필위원으로 이름을 올리는 유시춘 씨는 재임기간 중 정치자금 부분이 가장 예민한 대목일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김택근 : 정치자금 문제는 '20억+알파'와 비자금 문제다. 수사에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다 밝혀졌다. '20억+알파'와 관련해 20억 부분은 사과를 했다. 자서전에서도, 아무리 관행이라도 받지 않아야 할 돈을 받았다고 고백을 했다. 항상 김 전 대통령은 돈은 받았어도 문제될 돈은 안 받았다는 얘기를 꼭 했다. 누군가는 '엄청난 돈을 모아서 저장하고 있다'고 주장도 하던데, 저는 모르겠다.
김 전 대통령이 자식에 대해 소회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큰 아들은 몸이 아프고, 둘째는 선거에서 떨어지고, 셋째는 직업이 없다'고. 이런 것을 보면 김 전 대통령은 돈이 없는 것 같다. 노벨평화상 상금을 11억 원 받아서 3억 원을 김대중도서관에 내놓고 8억을 갖고 있었다. '11억 다 주지'라는 항간의 얘기가 왜 없었겠나. 그런데 이 8억 원을 이희호 여사에게 줬다. 이 대통령도 본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이 여사에게 8억을 남긴 것이다 본인도 '폼 나게' 다 주고 싶었을 것 아니겠나. 그러나 '늙은 아내'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으로 봐서 돈 문제는 흠 잡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한다.
프레시안 : 퇴임 이후 얘기도 많이 들어가나?
김택근 : 다 들어간다. 중요한 얘기들을 퇴임 이후에 많이 하셨다. 퇴임 이후에는 인생을 관조하는 시각이 드러난다. 일기 내용이 많이 들어간다. 세상과 정치 그리고 인생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담아 놓으셨다. 미래세대에 대한 염려가 많이 들어있다. 잠언도 있고, 직설적인 사자후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한시도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는데, 그 분은 최후에, 병실에서도 최경환 비서관에게 보고를 받고, '민심은 어떤가'라고 물어본 적도 있다. 그렇게 살았다. 서서도 민족이고 누워서도 나라였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내 몸의 절반이 무너졌다'고 한 표현이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재임기에 나온 대북송금특검이나 북한의 핵실험 정국에서 보여준 노 전 대통령의 태도에 대해선 서운함이 꽤 깊었던 것 같은데.
김택근 :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후계자로서 '내 몸이 절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정책적으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특검 같은 것은 생전에도 말씀했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다고 했다. 대북 정책을 나무라기도 했다. 마지막에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을 때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닥치고, 용산 참사사건이 나고 했을 때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하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살아온 게 민주주의다. 그리고 민주주의 때문에 살아왔다. 그게 무너진 것이다. 절박한 얘기를 하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솔직한 점, 인간적인 매력 등을 좋아했는데, 대북정책과 관련해 나중에 이쪽(김 전 대통령 쪽)으로 선회하기 전 실책들에 대해 속상해 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기다리는 스타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기다린 것이다. 임기 말에 두 분이 만났을 때는, 기록을 보니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은 대화를 했더라.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 곁으로 갔고, 또 아버지가 품어준 것이다. 그래서 '내 몸의 반쪽이 무너졌다'는 표현도 나오지 않았겠나.
프레시안 : 이명박 대통령 관련 부분이 포함돼 있나? 현 정부의 정책이나 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평가 등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한 게 있다면?
김택근 : 구체적이라기보다 은유적인 표현이 있다. 생전에 얘기한 것이 있지 않나. 서민경제, 민주주의, 남북관계가 위기에 처한 것을 표현한 것들이 있다. 처음에는 이 대통령을 굉장히 좋아했다. 중도실용이라는 것, DJ의 실사구시도 그런 것 아니겠나. 그런데 비핵개방3000이 나오면서 실망을 하게 됐다. 북쪽 입장에서는 모욕적인 것이다. 우리는 2만불 3만불 하는데, 너희는 개방하고 핵을 안 가지면 3000불을 만들어주겠다? 이것은 비현실적이면서도 동포들에게 아주 비정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외교를 굉장히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 사실 외교가 절단 나지 않았나. DJ의 외교적 혜안이 요즘 너무 가슴에 와 닿더라. 중국을 그렇게 중요시하고 장쩌민(江澤民)과 우정을 쌓고, 주룽지(朱鎔基)와 거의 형제 아닌가. 주룽지가 '따거(형님)'이라고 했었다. 당시에는 중국이 우리를 믿고 존중해줬다. 중국이 지금 우리에게도 절절하지 않나. 그런 면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는 사상가, 정치가의 수식어도 있지만 선각자라는 수식어도 어울린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탁월했다. IT를 강조하면서 그 노구를 이끌고 국무회의에서 '나같이 낡고, 손가락도 안 돌아가는 사람도 (컴퓨터를) 하려고 하는데 당신들이 왜 안하냐'고 했다. 그래서 임기 몇 달 안남기고 전자정부를 완성하고 가지 않았나. 많은 사람들이 '레임덕'이라고 했지만 '레임덕'일 새가 없었다. 일에 미쳤었다.
"DJ의 '결'과 '향'을 평전에 담고 싶다"
프레시안 : 자서전 때문에 처음 DJ와 인연을 맺었는데, 탈고하고 난 뒤 DJ는 어떤 사람으로 다가오나?
김택근 : 평화의 또 다른 이름이 김대중이다. 굉장히 파란만장한 인생, 격동과 격정의 격한 삶을 헤쳐 나왔지만 마음은 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래서 (가해자들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이런 표현을 했다. '나는 많은 위인들의 삶에서 많이 배웠지만 나는 그런 위인들의 삶과 내 삶을 바꾸라고 한다면 바꾸지 않겠다'고. 자기 생을, 삶을 사랑한 것이다. 한 번도 절망 속에 떨어지지 않고, 한 번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단한 위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와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됐을 때는 그분을 '평화의 눈'으로 보지 않을까.
프레시안 : 이후 김대중 평전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객관의 눈을 떠나서 평전 작업을 한다면 DJ는 어떻게 재구성될까?
김택근 : 자서전은 아주 조심조심했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못한 것들이 있다. 평전으로 간다면 DJ의 알몸, 알생각을 담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 자서전에서는 일자일획도 꼼짝을 못했는데, 평전을 하면 내가 구성도 새로 하고, 극적인 장면은 집중과 선택을 해서 강약을 주며 기술할 수 있겠다. 자서전에서 다룰 수 없는 부분이 이를테면 '눈물'이다. 김 전 대통령은 눈물의 대통령이었다. 자서전에는 그의 '눈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는데, 그 의미를 부여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 분이 철학이 국정에 반영됐는데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 그것도 뽑아서 쓰고 싶다. 정책의 시작과 끝이 거의 같다. 71년 대통령 선거 때 4대국 안정론을 폈고, 그것이 27년 후 대통령이 된 뒤 '6자회담'과 맥이 닿는 부분이 있다. 이런 것들과 함께, DJ가 가진 '결'과 '향'을 뽑아서 남기고 싶다.
ⓒ프레시안(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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