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친구와 여행을 가고 싶은 나라를 얘기한 적이 있다. 나는 당시에 브릿팝(Britpop)에 푹 빠져 있어서 영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친구는 뜻밖에도 쿠바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쿠바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TV에서 잠깐 봤던 '난민들의 나라'뿐이었다.
"왜 그 곳에 가고 싶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을 때 친구는 "낭만의 도시니까"라며 웃으며 대답을 했다. 좀 의아했다. 난 보트를 타고 미국으로 도피하는 쿠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낭만이 있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쿠바의 관한 인상은 대체로 두 가지일 것이다. 한쪽에서는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로 못사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인권 유린이 심한 나라로 여기는 것인데, 이러한 시각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산물로 볼 수 있다. 다른 쪽에서는 럼주와 시가의 나라,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가 사랑한 나라, 아름다운 경관과 음악과 춤이 있는 낭만의 나라로 여기는 것인데, 이런 시각은 관광 개발 이후 여행자들의 눈에 비친 이미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쿠바는 자유가 억압받는 나라도 낙원도 아니다.
쿠바식으로 산다는 것은?
▲ <쿠바식으로 산다>(헨리 루이스 테일러 지음, 정진상 옮김, 삼천리 펴냄). ⓒ삼천리 |
조사는 수도 아바나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그는 '아래로부터의 접근 방법'(bottom-up approach)을 통해 아프리카계 쿠바인들의 생활과 문화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를 큰 맥락 속에서 바라보고, 그 개념을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틀로 사용했다. 쿠바의 도시와 국가 건설 사업은 정부의 친 민중적 성격을 가장 많이 반영하고 있다.
쿠바 사회에는 10년 전쟁(1868~1878년, 에스파냐와의 전쟁) 이래 계급 간의 이데올로기적 이원성이 존재했다. 자산 계급(엘리트, 지주, 자산가, 상인, 사업가, 은행가, 철도 재벌, 전문가, 일부 지식인)은 독립을 원했지만,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사회를 원했다. 하지만 민중 계급은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쿠바의 독립과 함께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데올로기적 이원성이란 공화국 시기(1898~1958, 독립전쟁 이후), 혁명 시기(1959~현재)에 걸친 두 계급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특히 '특별 시기'(El Periodo Especial : 1989~2006년, 舊소련 붕괴 이후)라고 일컬어진 기간에 쿠바인의 가족과 이웃 공동체(el barrio)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1989년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는 쿠바인에게 갑작스러운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많은 쿠바인은 고난과 시련을 벗기 위해 섬을 탈출하기에 이르렀고, 쿠바의 미래는 밝지 못했다. 하지만 힘든 시기에도 쿠바는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결국 '특별 시기'의 고난은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특히 국제 관광 사업으로 경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쿠바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쿠바의 실상을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분석한 책은 없을 것이다. 쿠바를 경험해보지 않고서 내리는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옹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쿠바식 삶에 관해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
'엘리트 계급'과 '민중 계급'의 괴리
쿠바는 수백 년간 제국주의 식민 통치, 해적 침입, 독립전쟁, 미국의 봉쇄 조치 등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제1장에서는 독립전쟁 이후 나타난 '엘리트 계급'과 '민중 계급' 간의 갈등을 보여주며 '끝나지 않은 혁명'의 역사를 말한다.
1868~1878년 벌어진 에스파냐와의 10년 전쟁 이래 쿠바는 자산 계급과 민중 계급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이원성이 나타났다. 둘 사이의 간극은 쿠바를 완전한 혁명으로 이끌지 못했다. 이 틈을 타 미국은 엘리트 계급을 이용하여 쿠바를 식민지 사업화하려 했다. 기회를 잡은 엘리트들은 민중 계급을 통제할 수 있는 공화국 건설에만 관심에만 관심을 가졌다.
미국의 개입으로 형성된 '공화국'은 완전한 혁명을 이루지 못한 시기를 의미한다. 완수되지 못한 혁명은 호혜성의 원리, 부의 공정한 분배, 사회경제적 정의에 기초한 사회 건설을 다음 과제로 남겼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생산의 수단과 도구로, 상품으로, 하나의 사물로 전락시켜 버리는 사회의 가장 모순적이면서 응축적인 억압의 지점에 놓여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서만 혁명은 실현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쿠바의 민중들은 제국의 열강들 사이에서 노동력을 갈취당하고 자유마저 빼앗겼다. '독립이냐, 죽음이냐'를 외치며 독립전쟁에 참여했지만 돌아온 것은 엘리트 계급과의 괴리였다. 쿠바의 민중 계급은 더 이상 때를 지체할 수 없었고 그들의 진정한 혁명은 이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민중의 도시 아바나 건설
"올해는 일하는 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는 앞으로 전개될 삶보다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를 '정화'하려고 합니다." (77쪽)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민중 계급의 이미지로 쿠바를 개조하려 했다. 이전의 엘리트 중심의 공화국 도시에서 민중의 도시 '아바나'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카스트로가 주도한 1959년 혁명이 승리했을 때 아바나는 낙후된 섬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도시에 불과했다. 실업, 취약한 산업화, 부족한 사회 기반 시설, 낮은 기술 수준, 열악한 교육과 보건 상태 등 낙후된 국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였다. 혁명군은 토지 소유, 산업화, 주택, 실업, 교육, 보건 등 여섯 가지 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조를 실시했다. 또 혁명군은 최소 생활 수준을 정해 어떤 주민들도 그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안전망'을 구축하고, 사회 복지를 '기본적 인권'으로 선언했다. 이후 아바나는 민중의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리고 도시를 재(再)상징화함으로써 사회적 메시지에 변화를 주었다. 이전의 엘리트 중심의 도시 상징물을 민중의 상징물로 탈바꿈시켰다. 대통령궁은 박물관으로 전환하고 시민광장(Plaza Civica)은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으로 이름을 바꾸고, 컬럼비아 군사기지는 '도시 해방'(Ciudad Libertad, 초등과 중등을 합친 복합 학교)으로 전환하는 등 혁명군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가치 신념을 반영했다.
카스트로의 쿠바 개조는 일단 성공했다. 1990년대 후반, 집을 보유한 가구는 85퍼센트를 넘었고, 무상으로 실시한 교육은 라틴아메리카 중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했다. 또한 가정의 간호사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안착되어 주민들의 질병을 무상으로 진료했다. 하지만 쿠바의 시련은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봉쇄 조치로 타격을 입으며 다시 시작된다.
쿠바의 힘은 공동체로부터 나온다
마르크스는 이 세계 모든 것들은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다. '나' 자신 또한 '나'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연관되어 있는 세계와의 상호관계를 맺음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총합이며,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 안에서 규정된다. 쿠바인은 이러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당연하게 여긴 셈이다.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고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쿠바의 힘은 공동체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공동체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제도나 정치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혁명군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주민과 협력하여 문제들을 해결하고 이웃 공동체를 발전시키고 이웃 공동체 수준의 사회경제적 활동을 조정하고 주민들을 정부와 접촉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인민위원회(consejos populares)'와 같은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목표가 달성되어야 하는데, (1) 거의 모든 인구를 포괄하는 대중조직들의 연결망을 수립하는 것 (2) 이웃 공동체에 바탕을 둔 대중조직 및 주민들과 상호관계를 가지는 이웃 공동체 기구를 발전시키는 것 (3) 이웃 공동체와 정부 사이에 상호 연계를 확립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쿠바인들은 이웃 공동체와 지역 공동체 안에 속해 있으면서 관계를 맺고 생활하게 되었다.
현재의 쿠바는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관광 산업을 통해 들어오는 자본주의 물결이다. 쿠바의 관광 산업은 새로운 엘리트주의를 낳고 아바나를 배타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화려한 호텔과 부유한 외국인 관광객들은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관광 산업으로 쿠바인들은 페소화(임금으로 받는 돈으로서 대부분은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받는 데에만 사용할 수 있다)뿐만 아니라 달러화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달러는 그들의 개인적 취향을 만족시키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들이 본 부유한 외국 관광객들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쿠바 사람들은 이웃 공동체 특유의 복원력으로 이 위기를 잘 헤쳐 나가고 있다. 소비 열망을 적절히 관리하면서 민중 중심적인 사회를 유지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혁명군의 유연한 대처와 쿠바인들의 '투쟁'적 참여는 지금의 시련을 극복하는 열쇠가 되고 있다.
더 큰 자유
더 큰 자유라는 개념은 또한 발전, 안보 및 인권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 설사 어떤 젊은이가 자기 통치자를 투표로 선택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가 에이즈에 걸려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면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다. 마찬가지로 어떤 젊은 여자가 살아가는 데 충분한 돈을 벌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일상의 폭력과 그늘 속에 살고 있고 조국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말할 수 없다면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다. (282쪽)
존재를 최종적으로 지배하는 법칙을 마르크스는 '투쟁'이라고 말했다. 쿠바는 에스파냐와 맞선 혁명 이후,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혁명을 이루어냈다. 자신의 자유와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투쟁'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굴복'과 '복종'에 길들여진 노예의 삶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쿠바인들은 미국의 봉쇄 조치와 자본주의의 유입에서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을 이끌고 참여했다. 오랜 서구 열강들의 통치 속에 길들여지지 않고 해방을 일구어낸 '혁명'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쿠바인들에게 자유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더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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