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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vs 영국…<제중원> 운영을 둘러싼 막후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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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국 vs 영국…<제중원> 운영을 둘러싼 막후 경쟁

[근대 의료의 풍경·35] 제중원 운영권 ①

제중원에 관한 논의의 마지막으로, 제중원 운영권이 에비슨(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게 이관되고 제중원이 다시 대한제국 정부로 환수(반환)되는 과정을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자.

1885년 6월 조선에 와서 5년 남짓 제중원에서 일한 헤론이 1890년 7월 26일 서른넷의 아까운 나이에 이질로 사망했다. 헤론의 사망 직후 한성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지부는 긴급히 대책 회의를 열고, 조선 정부가 동의한다면 이 기회에 선교부가 제중원을 인수하여 선교병원으로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언더우드가 선교지부를 대표해서, 알렌이 선교지부 멤버의 자격으로 제중원 일을 맡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알렌은 마침 이 요청을 받기 며칠 전인 7월 21일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직은 사임(8월 1일)하고 제중원 의사 일은 맡겠다고 했는데, 선교지부가 이를 거부하자 사태는 복잡해졌다.

이때 알렌은 제중원이 원래 자기 개인에게 맡겨졌던 것이므로 선교부 산하 기구가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 언더우드는 선교부가 그곳에 의료 선교사들을 파견해 왔던 것이므로 선교부 산하라고 맞섰다.

이들의 논쟁은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중원이 엄연히 조선 정부의 기관인 점과, 미국의 선교본부에서는 조선 정부가 "제중원 의사"로 감리교, 영국성공회, 가톨릭 등 다른 교파 사람을 임명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사정을 생각하면 생뚱맞은 것이었다.

그 뒤 상황은 알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정부는 알렌을 제중원 의사로 임명하여 월급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으며(제14회) 미국의 선교본부도 알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때부터 1891년 4월 빈튼이 도착할 때까지 알렌이 제중원의 진료를 주도했다. 이에 선교지부는 알렌의 감독 아래 제중원에서 일하는 것에 동의한 하디(Robert A Hardie·1865~1949)를 임시로 써줄 것을 알렌에게 요청했고 알렌이 이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디가 1월부터 제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렌은 선교본부의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1891년 1월 5일 및 2월 23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저는 제중원을 정식으로 선교지부에 넘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동에 자유스러울 것입니다. 그들은 의사 한 사람이 파송될 때까지 하디 의사를 저의 지도 아래 제중원 일을 하도록 해 줄 것을 저에게 제의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동의해서 하디 의사가 제중원 일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와 함께 일하기로 했습니다. 하디는 경험이 없는 젊은이로 일을 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박사님이 곧 의사 한 사람을 보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1891년 1월 5일자)

"저는 하디에게 제중원을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적절함의 본보기로,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아 자기 아기의 탯줄을 어떻게 묶는지도 몰랐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하디가 근무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뒤부터 그가 제중원 일을 보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박사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오는 중이라는 좋은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하려 합니다. 저는 그가 유능하고 신사이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1891년 2월 23일자)

▲ 하디(河鯉泳)의 조선 선교 40주년 기념식을 보도한 1929년 9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 이 당시 그의 직책은 기독신보사 사장이었다. 하디는 그 뒤로도 5년 더 조선에서 활동하다 1935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무려 45년 동안이나 조선에서 선교사로 봉직했다. ⓒ프레시안

하디의 제중원 근무는 단명으로 끝난 것 같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에는 하디가 1891년 4월에 부산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오랜 동안 의료 선교 사업을 했다고 되어 있다. 요컨대 헤론이 사망하고 빈튼이 도착할 때까지 약 8개월 동안 알렌이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근무하면서 제중원 의사로 겸무했다. 알렌은 오전 10시 공사관에 출근하기 전과 오후 4시 퇴근한 뒤에 환자를 진료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렌의 열성과 무관하게 진료는 파행적일 수밖에 없었다.

1891년 4월 3일 빈튼이 한성에 도착하여 근무를 시작함으로써 제중원의 의사 문제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5회에서 살펴보았듯이 빈튼이 제중원 경비 사용 문제를 제기하고 나아가 5월 11일부터 7월 3일까지 근무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 빈튼(Charles C Vinton·1856~1936). 1891년부터 1893년까지 제중원 의사를 지냈고, 1905년 제중원 환수 과정에서는 미국 북장로교를 대표하여 약정서에 서명했다. 사진 설명의 "K.R.T.S"는 "조선성교서회(聖敎書會)"를 뜻하며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출판사로 사흘 전인 6월 25일, 120돌을 맞았다. ⓒ프레시안
미국 공사관의 주재로 빈튼이 <제중원 규칙>을 준수할 것을 다짐하며 7월 4일부터 근무를 재개함으로써 고비는 넘겼지만, 빈튼을 신뢰하지 않게 된 조선 정부는 그 과정에서 영국성공회의 선교단체인 "해외복음선교회"에 소속된 와일스(Julius Wiles)를 제중원 의사로 임명하려고 했다.

조선 정부는 외아문 독판 민종묵이 미국 공사 허드에게 보낸 6월 27일자 공문에서 "다른 의사로 교체할 수 있다"라고 경고한 것을 실행에 옮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렌과 헤론 등이 오래 전부터 우려하던 사태의 일보직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북장로교 선교부가 제중원을 아예 장로교 소속의 선교병원으로 전환시킬 결심을 굳혔을 법도 하다. 이때의 사정을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직접 중재에 나선 알렌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1년 7월 3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침내 외아문 독판이 빈튼 문제를 국왕에게 가져갔습니다. 국왕은 "미국에서 조선의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온 사람이 화가 나서 병원 문을 닫는다면 차라리 떠나는 편이 낫다"라고 했답니다. 국왕은 만일 빈튼이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의사로 교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조선 정부 관리들은 제게 와서 다른 의사를 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저는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제중원 의사 자리를 복음선교회의 와일스 의사에게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박사님께 이미 영국 영사와 모든 영국인들이 제중원을 차지하기를 희망해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와일스 의사는 허드 공사의 친구이고 가족 의사입니다. 그러나 허드 공사는 이 일을 영국에 넘기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로 외아문에서 이틀 반을 보냈습니다. 그는 마펫(Samuel A Moffett)과 빈튼과 빈번히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에게 제중원의 중요성을 보여 주면서, 그들이 포기하려는 그 병원을 영국 주교가 얻기 위해서 큰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가톨릭에서도 갖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 어제 빈튼 의사는 당장은 제중원에서 계속 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선교본부는 더 이상 당신을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정부가 이렇게 강경한 자세를 보였지만, 빈튼이 근무를 재개하지 않았을 경우 실제 행동에 옮길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파국에 가까운 사태를 겪은 이후에도 빈튼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의 별다른 조치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빈튼은 1891년 9월 1일부터 조선 정부가 마련해 준 사택에 진료소를 꾸려 환자를 진료하며 전도 활동을 벌였다. 자기 집에서 환자를 진료한 것은 빈튼이 처음은 아니었다. 알렌과 헤론 때부터 이미 그러했으며 그들은 종종 제중원 진료보다 제중원 바깥의 진료가 일이 더 많고 힘들다고 선교본부에 호소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제중원 진료를 방기한 것은 아니었다.

또 엘러스(번커 부인)의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태도에 제중원 관리들이 크게 불평한 적도 있었지만(제20회) 엘러스는 "제중원 의사"가 아니라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식으로 임명받은 제중원 의사 빈튼이 근무에 극히 태만하고 불성실한 것은 엘러스의 경우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조선 정부의 법률 고문인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1846~1899)는 "빈튼의 행동은 뉴욕 법에 따르면 월급을 받고도 그것에 해당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므로 횡령에 해당한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법률 조항 이전에 도덕성과 신의에 관한 문제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1885년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데에 반해 1891년에는 대안이 없지 않았다. 와일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여러 선교단체의 의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조선정부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실무적으로만 생각하면 그들 가운데에서 제중원 의사를 임명하면 될 문제였다. 하지만 와일스나 또는 다른 의사를 제중원 의사로 임명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조선 정부는 제중원 의사를 교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못했다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 모른다. 제중원의 정상적인 운영만을 생각한다면 조선 정부의 이 같은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외교적 고려"라는 측면을 덧붙이면 정부의 태도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1885년 제중원 설립 때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조선 정부와 국왕에게는 외교적 고려가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중원 의사의 교체로 미국과의 관계가 파탄나지는 않았겠지만 조선 정부는 적지 않은 외교적 부담을 져야만 했을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미국은 여러 외국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조선(국왕)이 유일하게 기대하고 의지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게 제중원 의사의 임명 문제는 빈튼과 와일스 등 개인 의사 중에서 호불호에 따라 선택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에 조선 정부와 국왕에 충성스러운 조선인 의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조선 정부에 보다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제중원은 분명히 조선 정부 병원이었다. 그렇지만 병원의 핵심 기능인 진료를 담당할 조선인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조선 정부의 병원이 되기는 어려웠다. 조선 정부도, 미국 공사관도, 외국인 의사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 학당을 준비한 1886년초부터는 그 학당을 통해 조선인 의사를 양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16~18회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중원 학당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원래의 의도인 의사 양성에 실패한 정확한 연유를 알기도 어렵다. 이 또한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조선인 의사를 양성하지 못한 결과, 제중원 의사 문제에서 조선 정부가 미국(북장로교)에게 계속 끌려 다녀야만 했던 것은 분명하다. 갑오·을미 개혁 정부가 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교"의 설립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여(제7회) 제중원을 되돌려 받으려고 시도했고 예산을 책정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병원 건물을 마련하고 직원을 배치하고 운영비를 지출하더라도 진료를 담당할 조선인 의사가 없으면 명실상부한 조선의 정부 병원, 왕립 병원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9년 동안의 제중원 운영 경험을 통해 학습했던 것이다.

국왕은 외국인 의사를 "미국에서 조선의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온 사람"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의사들의 더 중요한 목적과 목표는 기독교 선교였다. 그것도 미국 북장로교회가 주도하는 선교였다. 그 앞에서 다른 것들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목적뿐만 아니라 활동의 내용도 그러했다. 알렌과 헤론이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그들의 주된 활동 무대는 제중원보다는 오히려 제중원 바깥이었다. 제중원에서의 진료도 선교를 위한 것일 때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제중원은 1894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운영권이 이관될 때까지 선교가 허용되지 않았다. 즉 선교병원이 아니었다. 선교의사들과 선교부의 불만이 쌓일 것은 자명했다. 제중원을 선교의 교두보로 생각하고 자족했던 초기와는 사정이 점점 달라져갔다.

사태가 빈튼의 복귀로 일단 마무리된 것을 조선 정부의 승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 공사가 이틀반 동안이나 외아문에 가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것을 제중원 의사 문제에 관해 조선 정부가 주도권을 가졌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뿐이었음이 1894년에 생생히 드러났다.

조선 정부가 운영을 관장하던 제중원의 마지막 의사 에비슨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1893년 6월 16일이었으며, 한성에 올라온 것은 그해 9월초였다. 에비슨이 한성에 와서도 곧바로 제중원에서 근무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제중원과 관련한 빈튼의 역할을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박사님께서 한성의 의료 업무를 에비슨에게 맡기라고 지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빈튼 의사가 그 일을 포기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제중원이 작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가장 필요할 때인 여름 내내 문을 닫았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빈튼은 시골에 있으면서 매주 두 번 오후에 오겠다고 제안했답니다. 정말로 그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제중원은 이곳에 있는 미국 최고의 기관(America's best institution)입니다. 우리는 지난 해 제중원이 영국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박사님을 위해 막아냈습니다. 그 뒤로도 빈튼은 제중원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 그를 해임하는 분명한 지침을 보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893년 9월 3일자)

"저는 공사관이 제중원을 영국인들에게 넘기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병원을 지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제중원을 넘기는 것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교지부) 사람들이 빈튼을 퇴출시킬 수 없기 때문에 제중원은 성가시기만 한 무용지물(white elephant)이 되었습니다. 저는 선교지부 사람들이 골치 아파서 제중원을 포기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1893년 10월 26일자)

"지난 번 편지에서 선교지부가 정부 병원을 포기할지 몰라 두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 박사가 선교지부 사람들을 설득해서 제중원을 계속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에비슨 의사가 아주 흡족하게 일하고 있으며, 제중원 관리들은 에비슨이 업무를 잘할 수 있도록 그가 요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제게 약속했습니다." (1893년 11월 11일자)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이 편지들을 종합하면, 선교본부에서 빈튼 대신 에비슨이 제중원에서 근무하도록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빈튼이 두 달 가량 지시를 거부함으로써 선교지부는 아예 제중원을 포기할 지경까지 갔다가 겨우 사태가 수습되어 에비슨이 제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초기부터 제중원에 관여해서 제중원의 의의를 잘 아는 언더우드와 알렌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또한 제중원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뿐만 아니라 미국 공사관(결국 미국 정부)의 커다란 관심 사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무를 시작한 지 열흘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에비슨에게 만족해 했다는 것은, 거꾸로 빈튼이 그 동안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너무나 당연한 에비슨의 행동이 예찬의 대상이었고, 그러한 평가가 에비슨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하지만 1년 뒤 제중원에 닥칠 커다란 변화를 예측하기에는 아직 이른 때였다.

지난 34회 글에 대한 '문천'님의 댓글에 감사드리고 수용합니다. 호튼의 책과 알렌의 편지에 나온 내용을 충분히 확인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인용해서 생긴 필자의 잘못이었습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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