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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먹는 의사"…유언비어 속에 진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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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아이를 먹는 의사"…유언비어 속에 진실이 있었다

[근대 의료의 풍경·34] 영아 소동

1888년 6월 18일 조선 주재 미국 공사 딘스모어(Hugh A Dinsmore)는 외아문 독판 조병식(趙秉式)에게 공문을 보냈다. "외국인들이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삶아 먹고 쪄 먹는다는 헛소문이 갑자기 생겼는데, 조선 정부에서 방(榜)을 만들어 한성 각처와 지방(城外)에 게시하면 소문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미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영국, 독일 공사들이 합동으로 외국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폭행을 엄단할 것과 폭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순찰을 강화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조병식에게 발송했다.

이에 대해 외아문에서는 즉시 상응하는 대책을 취할 것을 약속하는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 정부는 사람들이 여러 명 모여 있지도 못하게 하고 위반자에게 극형(極刑)을 다짐하는 등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강압 조치를 구사했다. 이른바 "영아 소동(baby riots)"을 둘러싼 외국 공관과 조선 정부의 대응이었다.

▲ 미국 공사 딘스모어가 외아문 독판 조병식에게 보낸 1888년 6월 18일자 공문(국한문 번역본). "외국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삶아 먹고 쪄 먹는다"는 악성 유언비어에 대한 조치를 촉구했다. ⓒ프레시안
6월 10일 무렵부터 한성에서 시작하여 전국 여러 곳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서양 사람들이 어린이를 유괴해서 수프를 끓여먹는다, 아기의 심장과 눈을 도려내어 외국인의 요리상에 올린다, 어린아이를 납치해 삶아 먹고 눈알은 빼내 약이나 사진 자료로 사용한다, 어린아이를 외국으로 빼돌려 노예로 팔고 있다는 등이 소문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영아원, 제중원과 같은 서양식 병원, 공사관 등 외국인들이 관여하는 시설이 그러한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장소로 지목되었다.

실제 이러한 소문으로 폭력 사태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폭력의 피해는 대중들에게 외국인의 앞잡이로 여겨진 조선인에게만 미쳤다. 외국인들은 위협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피해를 받았다고 보고된 경우는 없었다. 이러한 일이 조선에서 있기 몇 해 전 중국 텐진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여러 예수회 신부와 수녀, 프랑스 공관원 등 외국인이 많이 살해되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폭도"들도 감히 서양인에게는 실제로 폭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일까?

당시 제중원에서 일하던 미국인 여의사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1851~1921, 언더우드 부인)은 이러한 소문이 외국인뿐만 아니라 제중원에 대한 적대감과도 관련이 있다고 기록했다.

"몹시 악의를 품은 몇몇 사람이, 외국인들이 어린아이의 심장과 눈알을 도려내어 약에 쓰려고, 어린아이를 훔쳐 오는 사악한 조선인들에게 돈을 준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소문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끔찍한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이를테면 독일, 영국, 미국 공사관에서 어린애들을 잡아먹는다는 것이었다. 이 피에 굶주린 작업의 총본부는 물론 병원(제중원)인데, 병원이 약을 만들고 병을 치료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느 날 내 진료소에서 돌아오자 험악하게 생긴 남자들이 내 가마를 둘러싸더니 가마꾼들에게 나를 다시 병원에 태워다 주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테러였으므로 그 다음 날 가마꾼들은 나를 절대로 태워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말을 타고 도시 한복판을 지나 병원으로 갔다. 제중원 학당의 책임을 맡고 있던 언더우드 씨가 나를 호위해 주었다. 흥분이 고조되었던 어느 날 저녁에는 미국 공사관으로부터, 폭도들이 우리가 사는 집에 쳐들어가려 한다는 제보가 있으니 공사관에서 총을 쏘아 신호를 하면 신변의 안전을 위해 공사관으로 급히 피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호튼,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 1908년 판. 15~17쪽)

▲ 호튼의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에서 "영아 소동"을 언급한 부분. 호튼은 제중원에서 일한 최초의 "진짜"(제20회) 여의사였다. ⓒ프레시안
헤론도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8년 7월 23일자 편지에서 헛소문이 제중원과 관련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아기들을 약으로 사용한다는 소문으로 인해 14~15일 동안 의료 사업이 크게 피해를 입었지만, 분명 의료 사업은 조선인들의 마음을 얻는 길입니다."

"영아 소동"이 막 발발할 무렵인 6월 11일, 미국 주재 조선공사관에 근무하던 알렌은 선교본부의 사브리(Dr. Savry. 엘린우드가 장기 여행을 간 동안 조선 선교에 관한 일을 대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에게 다음과 같이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의 행동을 우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최근 조선에서 오는 소식들은 조선 정부가 선교사들 때문에 상당히 골치를 앓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외아문 독판은 제게 보낸 편지에서 선교사들은 매우 다루기 어렵고 법을 어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주요한 선동자들이고 다른 사람들, 아마도 (육영공원) 교사들이 그들을 제지하려고 애쓰지만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중 집회를 열어 조선어로 설교하고 세례를 준다고 합니다. 또 이것이 가톨릭의 예수회 수도사들을 자극했으며, 그래서 그들 역시 대놓고 전도를 하고 잘 알려진 높은 곳에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그들을 점잖게 타일러 기다리라고 했으며, 약속을 지킬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무례할 뿐입니다."

알렌은 선교본부의 로우리(Dr. Lowrie)에게 보낸 6월 22일자 편지에서는, 언더우드의 집에 있는 소년들이 부자연스러운 목적을 위해 있다고 조선인들이 굳게 믿고 있다고도 했다.

"영아 소동"은 한성에서는 6월말, 다른 지방에서도 7월 하순에는 대체로 진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헤론은 다음과 같이 새로운 사태의 발발을 우려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선교본부로 보냈다.

"다른 소동이 분명 또 일어날 것 같아 미리 경고해 드리려고 이 편지를 씁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외국인들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1888년 9월 25일자)

"선교사들 외에도 데니 판사, 딘스모어 공사, 이안 뮐렌도르프 씨를 포함하여 모든 외국인이 거의 예외 없이 아이들을 사 먹는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1888년 10월 5일자)

"사태가 무르익어 갑니다. 어쩌면 다음 달에 폭발할지 모릅니다. 아이들을 훔쳐간다는 소문이 다시 퍼지고 있습니다." (1889년 4월 28일자)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라는 이야기 자체는 근거가 없는 낭설일 터이다. 그러한 헛소문은 서양인들의 낯선 행동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이 날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호튼도 "왕비의 파멸을 획책하는 적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라고 썼다.

문제는 객관적으로 보아서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유언비어의 생산은 무지와 음모 때문일 수 있지만, 그것이 전파되고 수용되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와 배경이 있다. 즉 이것은 1880년대 중반 이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넓혀가고 있던 서양 나라들과 서양인에 대한 적대심과 불안감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 남한산성의 수어장대(守禦將臺)(호튼의 위의 저서에서). 병자호란 이래 한성 남쪽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인 이곳은 1880년대부터 선교사들의 별장으로 쓰였으며, 제중원에서 일하던 외국인 의료인들은 여름철에 도시의 무더위를 피해 이곳에서 지냈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 의료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는 조선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프레시안

▲ 인천의 알렌 별장(<사진으로 보는 인천 한 세기>. 2003년). 1893년, 고종의 이궁(離宮) 예정지 옆에 지어졌다고 한다. ⓒ프레시안

조선은 이전에도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등 서양의 군사적 침략을 받았지만 이 유언비어 사건의 직전인 1885년부터 1887년까지는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했다. 또한 군사적 침탈 외에도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일상적인 측면에서 서양 세력의 진출이 확대되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이를 체험한 민중들이 서양에 대해 우려와 불안감을 갖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 1885년 4월부터 1887년 2월까지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던 영국 해군 소속의 데어링호 선장 데이비스(가운데)와 페가서스호 선장 그렌펠(데이비스의 오른쪽)이 거문도 주민들과 찍은 사진(김용구 지음. <거문도와 블라디보스토크>. 2008년). "신사의 나라" 영국은 1885년 4월 20일, 청나라와 일본 정부에 점령 사실을 알렸지만, 당사자인 조선 정부에는 한달 뒤에야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거문도에 잠시 머문다"라고 통보했다. ⓒ프레시안
1882년에도 조선 민중들은 일본이라는 외부 세력의 진출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그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 임오군란이었다. 임오군란 당시 자신이 애써 일구어온 종두장이 "폭도"들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린 모습을 보고 지석영은 무지한 민중들에게 배신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근대화"의 의미와 손익(損益)이 똑같을 수는 없었다.

1888년 "영아 포식(捕食)"이라는 유언비어가 생산, 유포된 것 역시 조선 민중들이 서양이라는 외부 세력의 진출에 대해 임오군란 때만큼 격렬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의중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한 민중들의 저항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헤론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9년 7월 11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몽매한 조선인들은 우리가 온 뒤로 살기가 더 힘들어졌다고들 합니다. 쌀값과 옷값이 오르고 화폐 가치는 전보다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떨어졌습니다. 관리들은 외국 상인들이 많은 돈을 수탈해가서 자신들이 차지할 돈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양쪽 모두에서 미움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걱정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앞에 폭풍이 몰아칠까 염려됩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전보다 더 주변을 잘 살피고 조심해야만 합니다."

서양 제국에 대한 민중들의 불안과 우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근거 있는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189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 등이 더욱 노골적으로 이권을 침탈했고, 급기야는 일제가 조선(대한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고 강점하는 과정에서 일제를 지원했다. 민중들의 생각이 터무니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모든 서양인과 일본인을 제국주의 침략의 하수인으로 보는 것도 지나친 생각이다(제4회).

요컨대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라는 소문 자체는 황당한 유언비어지만, "영아 소동"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조선이 아무 힘없는 아기처럼 침탈당하는 현실을 민중들이 정확히 꿰뚫어 보고 반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들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괴담이건, 농담이건, 은유건, 유언비어건, 여론이건, 선거건 하나라도 허투루 대해선 안 된다. 선거에 나타난 민심을 잘 읽어야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언비어에 담긴 민중들의 마음도 제대로 헤아려야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민중들의 의중은 읽으려 하지 않은 채, 언로를 봉쇄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정당한 주장조차 괴담으로 몰아세운다면 그러한 자들은 숨어들 쥐구멍도 찾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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