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정책 중 하나였던 세종시 수정안 처리 문제에 대해 직접 "국회 표결에 맡기겠다"고 밝혀, 지난해 9월 정운찬 총리가 처음 들고 나온 뒤 정치권을 큰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던 세종시 문제의 '출구전략'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국회 표결"은 또 다른 '입구전략'이 되고 있다. 정부와 청와대, 그리고 일부 친이계 의원들이 "상임위에서 부결되더라도 본회의에 상정하겠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 상임위에서 표결 처리하자는 여야 합의를 깬 주장이다. '상임위에서 부결됐던 안도 폐회 또는 휴회 중의 기간을 제외한 7일 이내에 의원 30인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는 국회법 87조를 근거로 들었다. 제헌의회부터 17대 국회까지 이런 사례가 모두 36번 있었다는 부연 설명도 있다.
하지만 의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최근 25년 동안에는 단 2건 밖에 없었다. 야당 뿐 아니라 한나라당 친박계 의원들도 당장 반발하고 나섰다. '독단적 국정운영'과 이에 따른 극심한 정치갈등. 지방선거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 22일 국토해양위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됐다. 하지만 논란은 끝난 게 아니다. ⓒ뉴시스 |
1. 서명 의원 100명, 목표치 채울 수 있을까
세종시 수정안의 본회의 상정은 '엄포'에 그치지 않았다. 22일 국회 국토해양위원회에서 세종시 수정 4개 법안이 모두 부결되자 23일 친이계 의원들은 행동에 들어갔다. 서명 작업은 본회의 상정을 위한 첫 번째 난관인 셈이다. 임동규 의원이 서명을 주도해 이날 오후까지 16명의 의원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 의원은 '100명'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당내에서 친이계로 분류할 수 있는 의원 110여 명이다. 이중 상당수가 중립에 가까운 친이계다. 100명은 일종의 최대 목표치다. 하지만 본회의 상정을 위한 30명을 채우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과연 서명 작업이 얼마나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겠냐는 점이다. 본회의 부의는 야당과 갈등 뿐 아니라 당내 계파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일부 친이계 의원들과 쇄신파 의원들은 반대하고 있다. 김영우 의원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수정안을 본회의에 올리면 친이, 친박 싸움으로 국민에게 비친다"며 "역사와의 대화도 중요하나 지금은 국민과의 소통, 국민통합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성식 의원도 <평화방송>과 인터뷰에서 "국회에 대고 정부나 청와대 참모들이 반드시 본회의까지 올려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든가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국회에 대한 존중의 자세가 아니다"며 "요컨대 모든 것을 잘못하면 다 잃을 수도 있는 잘못된 과정"이라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본회의 상정을 위한 의원수를 확보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겠지만, 정치적 명분까지 확보하는 것은 무리라는 얘기다.
2. 여야간 의사일정 합의는 원천적으로 불가능
한나라당 친이계 의원 30명 이상이 본회의 상정을 요구하는 서명을 받더라도 본회의에 바로 상정되는 게 아니다. 각종 의안을 본회의 표결에 부칠 때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를 거쳐 온 게 국회의 오랜 관행이다. 민주당은 상임위 부결 이후 이 문제와 관련된 어떤 의사일정에도 합의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했다.
전현희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23일 "상임위에서 부결된 법률안은 폐기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월드컵 축구 예선탈락 팀을 다시 본선으로 올려달라고 하는 생떼쓰기와 다름없다"고 밝혔다. 전 대변인은 "최근 25년간 국회에서 부의 요구는 2건이 있었지만, 실제로 본회의에 상정되어 표결에 붙여진 전례가 없다"고 말했다. 17대 국회에서 2건의 부의 요구가 있었으나 여야간 합의에 실패해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했다.
민주당은 당분간 '상임위에서 부결된 안건을 본회의에 다시 올리는 것은 여야 합의 위반'이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한나라당을 압박하겠다는 입장이다.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다른 야당들도 마찬가지다.
3. 박희태 의장, 악역 기꺼이 맡을까
본회의 상정에 실질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박희태 국회의장이다. 여야 의사일정 합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박희태 의장이 수정안을 직권상정할 것인가가 실제 본회의에서 표결이 이뤄지냐를 결정짓는다.
박희태 의장은 23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직권상정 여부에 대해 "국회는 여야 당대표의 합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면서 "지금 여야 원내대표들이 굉장한 협상력과 타협력을 가진 정치의 베테랑이기 때문에 저는 합의도 하고, 국회를 잘 운영할 수 있게 해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답했다. 여야 합의에 따른 상정을 희망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끝내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직권상정을 감행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국회법대로 하겠다"며 완전 부인하지는 않았다.
박 의장의 정치적 성향을 감안하면 능히 총대를 맬 수도 있어 보이지만 이제 막 임기를 시작했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 '지뢰', 친이계가 흔들리면 레임덕 앞당길 수도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지뢰'는 3개의 난관을 무사히 통과해 세종시 수정안이 본회의 표결에 부쳐질 경우 놓여 있다. 야당과 한나라당 친박계가 반대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돼 세종시 수정안은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가결, 부결이 아니라 찬성표가 몇표 나오냐는 점이다.
임동규 의원이 제시한 '100명'은 마지노선이다. 22일 국토해양위에서 친박계로 분류되는 최구식 의원이 찬성표를 던졌던 것처럼 친박계에서 이탈표가 나올 수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접어놓을 수 없다. 강성이 아닌 중립성향의 친이계 의원들이 이탈해 '기권'을 던져, 실제 찬성표가 예상보다 훨씬 적게 나올 경우 일차적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는 것은 이 대통령이다. 한 친박계 의원은 "본회의에서 찬성표가 적게 나올 경우 이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찬성표의 숫자가 갖는 정치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여권에서는 '표 관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청와대에서의 '표 관리' 정황이 조금이라도 드러날 경우 야당이 이를 크게 문제 삼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기어이 본회의까지 가져갈 경우, 싸늘하게 돌아선 민심에서 한발 더 멀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위험 부담이다. "수도권만 잡으면 된다"는 게 정권 핵심과 친이계 주류의 계산으로 보인다. 세종시와 함께 충청권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하지만 세종시 수정안 문제는 이제 '충청권'의 문제가 아닌 '오만한 권력'의 문제로 전환됐다. 여권에서 세종시 수정안 부결을 전후로 "수정안이 부결되면 모든 혜택을 백지화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이를 더 부추겼다.
지방선거 이후 '보수대연합'을 주장하고 나섰지만 충청권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고 있어 세종시 문제에 있어 한나라당과 각을 세울 수 밖에 없는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는 23일 "만일 여당이 상임위 부결로 폐기 처리하지 않고 본회의 표결까지 몰고 간다면 이 정권의 정치적 자살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회창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본회의에서) 부결되어 종결되었을 때 지난 지방선거에서 친노세력이 주축이 되어 승기를 잡은 민주당은 과거의 친노정권 대 현 정권의 대립에서 과거 정권인 친노정권이 승리한 것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기했다. 이 대표의 해석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의문이나 민주당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유일한 목적은 친박계 흔들기?
그렇다면 본회의 상정을 주장하는 이유는 뭘까? 박근혜 전 대표를 겨냥했다는 게 친이계가 아닌 여야 의원들 대다수의 분석이다. 민주당 핵심관계자는 "본회의 상정은 박근혜의 이름으로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됐다는 기록을 남기겠다는 의도 외에는 없다"고 말했다.
만에 하나, 친박계가 대거 이탈할 경우에 대한 기대가 존재하는 것도 부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친박계를 흔들 강력한 무기는 2012년 총선 공천권이다. 이미 이 대통령과 친이계는 2008년 총선을 포함해 임기 중 치러진 몇 번의 선거를 통해 '공천권'의 무서움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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