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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권은정의 '아우토반 코리안'] 튀빙겐 대학 이유재 교수

젊은 역사학자 이유재. 그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한 지 1년도 안 돼 독일 튀빙겐 대학 한국학과 교수로 임명되자 이곳 한인 교포 사회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파독 광부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한인 1.5세가 일궈낸 또 하나의 성공담이기 때문이다.

이유재 교수는 튀빙겐 대학에서 2010년 봄 학기부터 가르치고 있다. 이 교수의 정확한 직함은 '주니어 프로페서'. 이 제도는 독일 학계의 독특한 제도로 시행된 지 얼마 안 되는 정책이다. 주니어 프로페서를 놓고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흔히 가장 보수적인 학술 체제라는 평가를 듣는 독일 대학 교수 임용 제도를 혁신적으로 바꿔보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제도입니다. 보통 독일에서 교수가 되려면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또 교수 자격 논문 심사(Habilitation)를 거쳐야 하는데 주니어 프로페서는 그 단계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로 생겨났습니다.

일단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고 이 자리에 임명되면 6년 동안 교수 자격으로 학업, 연구, 행정 등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이름으로 연구비를 타 올 수도 있고 수업도 하고 석·박사 지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6년 후에 평가를 받아서 긍정적이면 정교수가 되는 것이지요. 하빌리타치온과 상관없이 정교수가 된다는 말이지요."

독일 전체에서 한국학 분야에서는 그가 두 번째로 주니어 프로페서가 되었다. 앞으로 몇 단계의 평가를 거쳐야 하지만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 수가 얼마나 늘었느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외부에서 연구비를 끌어오는 능력과 학과를 이끌어 가는 조직력도 평가 항목에 들어간다.

게다가 개별 연구 업적으로 박사 학위 논문과는 별도로 단행본으로 출간된 연구서가 1권 있어야 한다. 독일 사회에서 교수 자리에 오르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일단 궤도에 올랐지만 만만치 않아 보인다.

"예, 사실 어깨가 아주 무겁습니다."

진지하고도 신중하게 소감을 피력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 자신감이 묻어 있는 듯하다. 사실 한국학 분야에서 평소 그는 촉망받아온 신진 학자다. 그간 한국학과 관련해서 그가 꾸려온 각종 프로젝트나 활동 내용은 이곳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박사 학위 논문 통과 이전에 대학에서 그를 채용하기로 결정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독일 튀빙겐 대학교 이유재 교수. ⓒ프레시안

이유재 씨의 부친은 1970년대 후반에 파독 광부로 와서 그 후 베를린에 정착해 살고 있다. 어머니와 막내가 먼저 아버지와 합류했고 이유재 씨는 형과 함께 그 1년 뒤에 베를린으로 옮겨왔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나서였다. 아주 어릴 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자라 철이 들 무렵도 아닌 시기였을 것이다. 말 배우기도 어려웠을 텐데 언어 소통의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만큼 공부를 잘했던 소년이었나? 그가 아니라는 표정으로 웃는다.

"베를린에 와서 다시 4학년으로 입학했어요. 여기 학교에 온다고 따로 준비를 한 게 없었죠. 그땐 시험을 치면 답안지 위에 이름만 쓰고 마칠 때까지 그냥 앉아있었어요. 첫 성적표엔 점수가 없었어요. 실력 확인이 안 되었으니까요. 공부를 얼마나 못했으면 그랬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중등 교육 과정에 들어가야 했다. 독일은 그 때부터 학생의 진로를 실업 교육과 인문 교육으로 나눈다. 그의 담임은 인문 학교인 김나지움으로 가기에는 어려울 것 같으니 실업 교육도 받을 수 있는 통합 학교로 가는 게 좋겠다고 권했단다. 그의 부친이 일언지하에 잘랐다. '너를 왜 독일로 데리고 왔겠느냐, 공부시키기 위해서다. 무조건 김나지움으로 가라!'

그래서 라틴어 교육도 받고 13학년을 마치고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 시험)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온 사람답게 학년별로 자신의 인생을 대략 정리한다. 그의 말에서 그 과정의 어려움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이 지낼 만했던 모양이다. 한국에서 독일로 옮겨 앉는 과정이 불편하거나 어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가볍게 던져보았다. 그가 대답을 무거운 톤으로 했다.

"제게는 독일 사회가 편하지 않았어요."

입속에 생각을 물고 있는 듯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 사회가 특별히 내게 불편하게 대해서가 아니었어요. 한국에 대한 향수가 너무 컸던 것이 문제였지요. 이곳에 우리 가족이 다 있었는데도 힘들었어요. 한국에 계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컸던 것 같고……. 처음엔 이곳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요. 한국에 돌아가려고 했어요. 가능하면 한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에게 유년 시절과의 이별은 이주의 체험과 겹쳐진다. 고향 마을 실개천에 자신의 유년을 놓아버리는 의식을 치루기도 전에 먼 나라로 떠나야했던 소년은 상실의 고통을 정말 심하게 앓아야했다.

"행복했던 나의 유년 시절이 강제로 박탈당했다는 그런 느낌이 아주 강했어요. 그래서 늘 잃어버린, 빼앗긴 그 뭔가를 되찾기 위해서 한국으로 가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프레시안
청소년기의 그에게 한국은 손닿기 어려운 아름다움과 그리움, 그런 것과 동의어였다. 반드시 내 힘으로 다시 손안에 잡으리라는 소망이 가슴에 늘 들끓었다. 김나지움을 다닐 때도, 대학에 가서도 틈만 나면 그는 한국에 다니러 갔다.

그러던 중 마침내 오랜 갈증을 본격적으로 풀 기회가 왔다. 대학 때 교환 학생 프로그램으로 외국에서 1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을 택했다. 1990년대 중반 서울에서 한국 현대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렇게 바라고 그리워했던 고향을 찾을 수 있겠다는 설렘이 있었는데…. 근데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름다움과 편안함, 그런 것을 담고 있는 공간도 사람도 이젠 없는 것이었어요. 나의 고향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그 때서야 깨닫게 된 거죠"

그때 자신의 안에서 어떤 스위치가 딸깍, 돌려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한다. 무지개를 좇던 소년이 어느 날 문득 무지개의 실체를 알아버렸다고 할까, 한국에 대한 그리움, 그 강한 애착에서 드디어 자신을 놓아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고국에서 대학 생활은 신나고 재미있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산악회에 들어가 지리산도 오르고 설악산도 올랐다.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부인도 그때 만난 인연이다.

그리고 베를린에 돌아온 이유재에게 인생 제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유년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청년은 강건해졌다. 한국은 이제 먼 곳에 두고 온 애틋한 그리움이 아니라 분명한 시발점이었다. 이제 할 일이 분명해 보였다. 한국계 독일인. 이곳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그 뿌리를 든든히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이유재 교수는 주위 한인 2세들을 찾아서 만나고 모임을 만들었다. 그 전까지 그는 다른 한인 2세들과 잘 모르는 사이였다. 수업 마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선선한 저녁 공기를 쐬며 집으로 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젊은이가 태도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베를린에 살고 있는 2세 친구들과 뜻을 맞춰 단체 '한가람'을 창립했다. 독일 내 최초의 한인 2세 단체였다. 잡지 <한가람>도 펴내기로 했다.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보는 한국을 담아내자'는 취지였다. 이유재가 일을 하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한가람>을 창간하면서 따로 매체를 꾸리지는 않았다.

대신 한인 1세들의 높은 조직력과 왕성한 활동 역량으로 구축해놓은 인프라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당시 교포들이 내는 매체 <한인회보> 안에 별도의 지면을 배당받아 잡지를 창간했다. 그렇지만 방식은 자신의 것으로 고집했다. 독일어로 기사를 쓰겠다고 한 것이다. 어른들은 서운해 했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한국어로 쓰는 게 맞지 않느냐, 우리말로 하지 않겠다니, 쯧쯧….'

이런 타박에 젊은 친구들은 강변했다. '우리 2세들의 소통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다. 한국어로 우리의 모든 의사를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 독일말로 하겠다.' 약간의 갈등을 겪었지만 꿋꿋하게 지냈다. 그리고 그 후 어엿하게 독립하여 <한가람>은 연 700부 정도를 발간하는 계간지 규모로 성장했다.

김나지움시절 학교 신문과 교지 편집 활동을 하기도 했던 이유재 교수는 <한가람>을 발행하는 것 자체가 바로 한인2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작업이었다고 확신한다.

"2세들의 정체성. 그 전에는 없었던 것이었어요. 잡지를 만들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어요."

ⓒ프레시안
대학원에 가서 역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이유재의 활동 반경은 더욱 넓어졌다. 2005년 독일정부에서 주관하는 '독일 노동 이주 50주년 행사'가 있었다. 1955년 이탈리아 노동자로 시작된 각국별 독일 노동 이주를 기념하기 위한 큰 행사였다. 이유재 교수는 한국 이주 역사를 주제로 그 행사에 동참했지만 크게 실망했다.

이탈리아, 터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 다른 나라가 크게 다뤄진 데 비해서 한국은 충분히 대변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한국의 독일 이주 역사 특별전을 따로 하겠다'는 당찬 계획을 세웠다. 규모나 취지 면에서 역사학 전공 대학원생이 품기에는 다소 무리한 계획이었지만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전문성, 시간, 돈.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몇몇 친구들과 차근차근 실천에 옮겨나갔다. 학술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의 단체를 만들자, 그리고 능력을 키우자, 그런 각오로 모여서 공부하고 활동을 알리기 위한 글을 써냈다. 사단법인 '코리엔테이션'을 만들어 자금을 확보했다. 독일 연방정치교육센터와 독일 신미술협회, 한국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먼저 국제 학술 대회를 열었다. 본에서 열린 그 대회에 미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영국, 독일 학자들이 참가했다. 성과가 아주 좋았다.

이어서 한인 이주사 특별 전시회를 열었다. 2009년 10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공식 행사인 아시아 태평양 주간에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비전문가들이 처음으로 기획한 전시회였지만 주요 언론을 비롯하여 이곳 사회 전반으로부터 성공적인 전시회라는 평가를 얻었다. 2010년 상반기 동안 중부 독일 지역을 석 달간 순회 전시하기도 했다.

애초 전시회를 목적으로 '코리엔테이션'이란 단체를 만들었지만 그 의미는 자연히 확대되었다. 독일 사회에 기여하는 한국인, 독일에서의 한국인의 위상을 알리자는 목적이 담겼다.

"우리 한국 교포는 이주민으로서 모범 케이스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주민으로 이 사회 내 동등한 일원으로 살아가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요.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주는 압박을 견디어 내야 하거든요. 독일 정부는 우리 한국인들을 성공모델로 세워 보이고 싶어 하는데, 앞부분만 보려고 하지요. 이주민 내에서 위계 질서를 세우려는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이유재 교수는 지난 2008년 독일 메르켈 수상이 마련한 이주민 정상 회담에 초대받았다. 당시 정부 각 부처 각료와 이주민 관련 단체 대표들이 모인 큰 자리에 한국인 대표로 나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주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내세웠다.

"흔히 이주민은 문제아라 생각하는데, 오히려 이 사회를 풍부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주민도 그 점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고요. 이주민 2세, 독일 한국인으로서 불평등한 차별을 호소하고 우리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게 필요합니다."

이유재 교수는 한인 이주민에 대한 권리 주장을 넘어선, 범아시아적인 안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현재 베를린 안에서 베트남 이주민은 아시아 이주 단체 중에서 수적으로는 제일 크지만 활동 내용이 따로 없다. 베를린 시내 지하철역마다 있는 꽃집은 거의 베트남인이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파워가 있지만 베트남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도 없다. 이주민 권리를 찾기 위해 다함께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코리엔테이션의 회원 숫자는 10명 내외다. 소수 정예 인원으로 큰일을 해낸 셈이다. 친목 단체 성격은 사양하고 프로젝트 중심으로 활동하다 보니 회원 배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앞으로는 달라질 것 같다고 이유재 교수가 귀띔한다.

ⓒ프레시안

어떤 사람은 이유재 교수를 가리켜 곰같이 우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내성적이고 누가 말 걸기 전에는 한마디도 안한다. 앞에 나서기보다 가만히 지켜보는 쪽이다. 그는 스스로 능력파는 아니지만 노력파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 그가 튀빙겐 대학 한국학과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우선 목표는 학생들이 많이 오도록 하는 것이다.

"바이에른 주를 비롯해서 남부 독일 쪽에 한국학과로서는 튀빙겐이 유일하지요. 굉장한 강점인데 지금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독일은 한국처럼 서울 중심으로 학교가 되어 있지 않고, 독일 학생은 이동률이 높지가 않아요. 예를 들어 함부르크 학생이 저 남쪽 뮌헨으로 가는 일은 거의 없지요. 남부 독일을 커버해서 한국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튀빙겐으로 모으는 일부터 해야지요!"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현대 한국사를 중심으로 가르칠 계획이다.

"19세기 중반의 정치, 사회, 경제, 역사 문화 전부를 가르칠 것입니다. 물론 어학을 중심으로 해서요. 한국 근현대사는 한국 식민지와 분단을 모르면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분단과 냉전을 핵심 연구 주제로 설정해서, 19세기 중반 이후 개항기를 시작으로 초국가적인 식민성, 냉전 문화를 깊게 다루려고 합니다."

학과 정원이 있는지 물었다. 그가 활짝 웃는다.

"우리 학과 정원이요? 아직은 무제한입니다!"

그는 이제 다시는 유년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대신 이제 그는 독일 땅에서 자신의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가뭇없이 날아가 버린 줄 알았던 고향이란 아름다운 무지개는 사실 없어진 게 아니었다. 늘 손안에 잡고 있었다. 독일에서 한국을 가르치는 성년이 된 이유재는 이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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