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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 뺨치는 <제중원>…"내 손가락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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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 뺨치는 <제중원>…"내 손가락은 어디에?"

[근대 의료의 풍경·33] <제중원> 보고서 ⑨

마지막으로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른 입원 환자들의 치료에 대해 살펴보자.

생식기 질병

생식기 질병으로 제중원에 입원한 환자 8명은 모두 남자로, 그 가운데 4명(평균 나이 20.8세)은 포경, 2명(30, 32세)은 생식기 부위의 부종, 2명(43, 45세)은 음경상피종양을 가지고 있었다.

포경이 있던 사람들은 포피(包皮)를 잘라내는 등의 수술을 받고 평균 19.8일 만에 완쾌되어 퇴원했다. 부종 환자 가운데 1명은 부기를 뽑아내는 천자술(tapping)을 받고 3일 만에 치료 효과가 좋은 상태에서 퇴원했고, 다른 1명은 외과적 처치는 받지 않고 15일 만에 완치되어 퇴원했다.

음경에 상피종양(<보고서>의 기록만으로는 악성인지 양성인지 판단하기 어렵다)이 생긴 환자 가운데 1명은 음경 절단술을 받고 24일 만에 완치되어 퇴원했다. 여기서 "완치"라고 한 것은 수술 부위가 잘 아물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반면에 다른 1명은 음경 절단술을 거부하고 8일 만에 퇴원했다.

음경 절단술을 시행한 환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의료 기술뿐만 아니라 환자에 대한 의사의 윤리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절이었다. 요즈음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의사가 일방적으로 음경을 잘라낸다면 어떻게 될까? 손해 배상은 말할 것 없고, 의사 면허도 취소될 것이다. 또 당시 미국에서 의사가 그런 행위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과연 제중원 환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음경을 절단 당하고 진정으로 만족했을까?

"손가락, 발가락, 음경을 절단하는 경우 우리는 환자와 길게 상담하지 않고 그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아차리기 전에 절단했다. 환자들은 항상 결과에 만족했다." (<보고서> 30쪽 "입원 환자에 대한 설명")

▲ <보고서> 30쪽. "환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손가락, 발가락, 음경을 절단하더라도 환자들은 만족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프레시안

외상

외상으로 입원한 환자는 골절 7명, 탈구 2명, 총상 4명, 칼에 의한 창상 4명, 낙상 2명, 화상 2명, 타박상 1명 등 모두 22명으로 전체 입원 환자의 8퍼센트를 차지했다.

골절 환자는 콜레 씨 골절이 생긴 40세 난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평균 나이 38.3세)였으며, 골절이 생긴 부위는 쇄골(빗장뼈), 전두골(앞머리뼈), 하악골(아랫턱뼈), 슬개골(종지뼈), 요골(앞팔뼈), 경골(정강이뼈) 등 다양했다. 5명은 부러진 부위를 부목으로 고정했고, 2명은 부러진 곳의 피부를 수술실로 꿰매서(봉합) 치료했다.

슬개골 골절 환자는 고정술로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한 채 불과 이틀 만에 퇴원했지만, 나머지 환자들은 대개 치료 효과가 좋았다. 경골이 부러진 환자는 <보고서> 작성 당시까지 90일 동안 입원하고 있었다.

각각 슬(무릎)관절과 견(어깨)관절이 빠진(탈구) 40세 남자와 60세 여자는 손상이 너무 오래 되어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고 각각 6일, 3일 만에 차도 없이 퇴원했다.

총상 환자 4명은 20~26세의 남자로 3명은 손가락에, 1명은 머리 부위에 총에 의한 창상을 입었다. 손가락 총상 환자 3명은 모두 손가락 절단 수술을 받고 완치되어 평균 41.7일 만에 퇴원했다. 이 경우도 "완치"는 수술 부위가 잘 아물었다는 뜻일 것이다. 머리 총상 환자는 드레싱 치료를 받고 33일 만에 완치되어 퇴원했다. 아마 상처 부위를 석탄산수 등으로 소독하고 깨끗한 붕대로 감아주는 치료였을 것이다.

칼에 의한 창상 환자도 4명이 입원했다. 그 가운데 복부에 상처를 입은 환자는 드레싱 치료로 회복되어 10일 만에 퇴원했고, 상처 부위가 명기되지 않은 3명은 상처 부위를 꿰매는 수술(봉합술)을 받고 완치되어 평균 42.3일 만에 퇴원했다.

타박상 환자 3명 역시 드레싱 치료와 배농술을 받고 치료 효과가 좋은 상태에서 퇴원했으며, 화상 환자 2명은 외과적 처치는 받지 않은 채 회복되어 퇴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큰 사지 절단 수술은 환자의 거부로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큰 사지 절단 수술을 전혀 하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절단이 필요한 환자가 여럿 있었지만, 다리를 잃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환자들은 죽어서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보고서> 30쪽 "입원 환자에 대한 설명")

그러나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7년 1월 3일자 편지를 보면 사지 절단과 같은 큰 수술을 하지 않은 이유가 환자의 거부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저는 조선에 오기 전에 경험이 전혀 없었고,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이 제중원과 같이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병원에서 시술해야 할 큰 수술을 다룰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큰 수술)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사지 절단 수술을 하지 못했던 이유가 환자의 거부 때문이든 알렌의 실력 부족 때문이든 간에, 사지 절단 수술은 당시에도 여전히 위험이 크게 따르는 수술이었다.

▲ 1880년대의 고관절 절단 수술 사망률(<A Textbook on Surgery>, 미국 D Appleton and Co, 1889년). 고관절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의 사망률이 64퍼센트였고, 외상 환자의 사망률은 무려 82퍼센트였다. 당시 뉴욕 시립병원과 육군병원 등 미국 일류 병원의 치료 성적이 이 정도였으니, 사지 절단 수술은 여전히 목숨을 건 도박 행위였다. ⓒ프레시안

궤양

궤양으로 입원한 환자는 19명으로(전체 입원 환자의 7퍼센트), 여기에서 궤양은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 등 요즈음 흔히 보는 소화성 궤양이 아니라 피부, 관절 부위에 생기는 궤양이다. 남자가 17명으로 대부분(89퍼센트)을 차지했고, 평균 나이는 34.8세였다. 궤양이 생긴 부위는 목 1명, 부위가 기록되지 않은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발목, 발바닥 등 하지(下肢)였다.

이 가운데 17명은 외과 처치를 받은 기록이 없으며, 1명은 절제술, 다른 1명은 "이식술"(grafts)을 받은 것으로 적혀 있다. 이식술을 받았다는 환자는 30세 된 남자로 발에 천공성 궤양이 생긴 환자였다. 어떤 조직을 어떻게 이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입원 210일 만에 치료 효과가 "양호"한 상태로 퇴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는 이식 시의 거부 반응에 대해서도 개념이 없던 시대로 이식술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어쨌든 환자들은 1명을 제외하고는 치료 효과가 좋은 상태로 평균 33.1일 만에 퇴원했다.

▲ 19세기 후반 궤양 환자의 치료법(<Modern Surgical Therapeutics>, 미국 D G Brinton, 1878년). 주로 브롬 화합물로 치료했다. 적어도 살균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프레시안

골관절 질병

골관절 질병 환자 10명은 모두 골관절에 괴사가 생긴 환자로 남자가 9명(평균 나이 31.2세), 여자가 1명(20세)이었다. 괴사가 생긴 부위는 대퇴골(넓적다리뼈) 3명, 슬(무릎)관절 2명, 중족골(가운데발뼈) 2명이었으며, 제1족지골(엄지발가락뼈), 늑골(갈비뼈), 견(어깨)관절이 각각 1명이었다.

수술은 부골절제술 2명, 절단술 1명, 제거술 1명이었다. 그리고 수술을 거부한 중족골 괴사 환자 1명을 제외하고는 치료 효과가 괜찮았다. 입원 일수는 평균 21.7일이었다.

부골절제술을 받은 환자 1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제중원에서 처음 수술로 치료한 경우로 <보고서>에 따르면 치료 효과가 대단히 좋았다. 하지만 아무런 경험이 없는 조선인에게 마취를 맡긴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취과 의사가 따로 독립되기 전에는 외과 의사의 일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한 가지가 마취였다. 일제 강점기 백인제가 외과 의사로 명성을 날렸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뛰어난 마취 솜씨였다.

"특수한 사례 한 가지를 언급한다. 증례 1은 첫 번째 입원 환자이자 최초의 수술 환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 훈련받지 않은 조수들이 클로로포름 마취를 해야 했으며,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환자는 오그라든 다리의 상처에서 고름이 흐르는 채로 실려 왔다. 악취가 너무 심해 아무도 그 환자와 같은 방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12년 동안 그 병을 앓아 왔다. 며칠 동안 상처를 처치한 뒤 수술을 해서 약 15센티미터 길이의 골침과 대퇴골막을 제거했다. 그는 빠르게 회복되어 24일 만에 목발로 걸어서 퇴원했다. 그리고 그는 1년 가까이 건강하게 지내고 며칠 전 보통 사람처럼 똑바로 서서 병원에 찾아 왔다." (<보고서> 30~31쪽 "입원 환자에 대한 설명")


복수

복수(腹水)로 입원한 환자는 7명으로 모두 남자(평균 나이 55.6세)였으며, 복수가 생긴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다. 당시까지만 해도 복수의 원인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고, 따라서 치료도 대증요법으로서 천자술을 시행하는 정도였다.

천자술을 받은 환자 가운데 1명은 입원 4일 만에 사망했으며, 다른 3명은 천자술을 받고 상태가 나아져서 평균 26.7일 만에 퇴원했다. 다른 2명은 별다른 처치를 받지 않고 퇴원했으며, 1명은 <보고서> 작성 때까지 천자술을 받지 않은 채 10일째 입원 중이었다.

각기

각기 환자는 4명 모두 20~30세의 젊은 남자였다. 특이한 것은 <보고서>에서 "beriberi"라는 서양식 병명보다 "kakke(脚氣)"라는 일본식 병명을 더 많이 사용한 점이다. 그만큼 일본에서 환자가 많이 발견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 의학이 서양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각기 환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과적 치료를 받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발열성 질병으로 분류된 것으로 보아 키니네를 복용했을 것이고 그밖에 신경염, 부종, 권태감 등의 증상을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을 받았을 것이다. 아직 각기가 비타민 B1(타이아민) 결핍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환자 1명은 28일 만에 사망했고, 나머지 3명은 평균 8.7일 만에 각기가 나아서 퇴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각기는 일종의 "문명병"이라고 할 수 있다. 각기는 기원전 1000년 무렵의 중국 고서들에도 증상을 묘사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는 오래 된 병이지만 근대 이전까지는 그리 흔한 병은 아니었다. 각기가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끈 것은 187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주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대규모로 발병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나중에 역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환자들이 대체로 지나치게 도정(搗精)한 쌀이나 밀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새로운 도정 방법에 의해 비타민 B1을 많이 함유한 곡물 껍질이 깎여나감으로써 비타민 B1 결핍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 에이크만(Christiaan Eijkman·1858~1930). 그의 각기병 연구에서 "비타민" 개념이 생겨나 의학과 영양학에 새로운 문이 열렸다. ⓒ프레시안
19세기말 네덜란드 식민지인 자바에서 일하던 네덜란드 의사 에이크만(Christiaan Eijkman·1858~1930)은 자신이 진료하던 죄수들에서 각기가 많이 발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각기가 음식물, 특히 백미 쌀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에이크만은 백미 대신 현미 쌀을 죄수 환자들에게 섭취하게 함으로써 각기를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이크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닭과 비둘기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1897년 그는 실험 동물에게 백미 쌀만을 먹게 하여 각기 증세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으며, 다시 현미 쌀을 줌으로써 각기를 치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에 따라 에이크만은 쌀 껍질 중의 어떤 성분이 각기병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필수영양소"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렇게 에이크만은 처음으로 각기의 정체와 그 치료법을 과학적으로 규명했을 뿐만 아니라, "결핍성 질환"을 실험적으로 유발하는 데 성공했으며 또 "비타민"의 개념을 도입했다. 에이크만은 이러한 업적으로 1929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이장성 발열

열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반복하는 이장성(弛張性) 발열(말라리아와는 다른 것으로 분류되었다)로 입원한 환자(3명)에게는 별다른 처치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열이 났으니, 당연히 키니네(금계랍)를 주었을 것이고 치료 효과가 좋아 평균 6.7일 만에 퇴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체로 열의 원인과 무관하게 해열제를 써서 열을 떨어뜨리는 식의 치료를 했다. 요즈음과는 치료의 철학이 크게 다른 시절이었다.

콜레라성 설사

콜레라성 설사로 입원했던 환자는 한 살짜리 남자 아기와 25세 된 남자였다. 1883년에 콜레라균이 발견되었지만 제중원에서 세균 검사를 하지는 않았다. 설사의 양상을 보고 콜레라성이라고 진단을 했을 것이고 "콜레라 혼합물"로 치료했을 것이다. 콜레라 혼합물은 황산, 아편, 박하, 고추로 이루어졌는데, 이 가운데 아편(양귀비)은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지사제(止瀉劑)로 써오던 것이다. 그런데 아편이 단순 설사가 아닌 콜레라성 설사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까? 어쨌든 환자는 각각 3일과 4일 만에 완치되어 퇴원했다.

▲ 빌로트가 수술하는 모습(1880년대). 이 당시까지도 평상복 차림의 청중들이(의료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있다) 보는 가운데 수술을 했다. 빌로트를 비롯한 외과 의사도 마스크와 수술 장갑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이다. ⓒ프레시안
나머지 질병들도 대체로 증상을 보고 진단을 내렸고, 치료도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서양 의학은 18세기 후반부터 이론적으로는 그 전의 히포크라테스-갈레노스 의학과 크게 달라졌지만,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점에서는 아직도 큰 발전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었다.

서양의 외과는 1840년대 마취술의 개발로 한의학 등 다른 문명권의 외과와 차별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양의 수술도 "外科"라는 한자 용어가 말해 주듯이 아직은 사람 신체의 겉(外) 부분에만 머물고 있었다. 물론 오스트리아의 빌로트(Theodor Billroth· 1829~1894)와 같은 세계 최첨단의 외과 의사는 1880년대부터 위궤양 수술, 위암 수술 등 복부(腹部) 수술을 시작했지만 당장 뚜렷한 성과를 낸 것은 아니었으며, 또 그것이 보편화되기까지는 몇십 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따라서 제중원에서 본격적으로 선 보인 근대 서양 의술은 물론 전통 한의술과 여러 가지로 대비되는 것이었지만 크게 우위를 보이는 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그런 새로운 의술을 혹은 받아들이기도, 혹은 거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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