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측면 공격에 이은 크로스는 찾아볼 수 없었고 하프라인에서 그냥 가운데로 질러대는 '뻥축구'였다. 굳이 묘사하자면 70~80년대 한국축구의 모습에서 변병주마저 빼버리면 딱 그날의 그리스였다.
이날 원톱으로 등장한 박주영은 상대 공격진을 완전히 휘저으며 허물었다. 장신의 그리스 수비수들 머리 위로 솟구쳐 헤딩을 하는 모습에서는 그의 공격력이 계속 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전반전 골키퍼와 일대일로 맞선 상황에서 득점에 실패한 모습은 아직도 그가 가다듬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한 마디로 드리블이 길었다. 이는 박지성의 득점 장면과 확연하게 대비된다. 아직 박지성이 한 수 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리오넬 메시는 무섭긴 무섭다. 지난 12일 밤(한국시간) 열린 나이지리아전에서 메시는 예의 위력을 보여주며 '지쳤다'던 말을 무색케했다. ⓒ뉴시스 |
드리블이 결정한다
그가 슛을 하기 직전 마지막 드리블이 딱 한 걸음 길었던 관계로 뒤따라온 그리스 수비수가 슈팅 순간 간신히 공에 발을 댈 수 있었고 박주영도 멀찍이 달아난 공을 향해 안간힘을 다한 슈팅을 해야 했다. 그 결과 공은 달려 나온 그리스 골키퍼의 몸에 굴절돼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이는 박지성의 득점장면과 비교된다. 박지성은 그리스 왼쪽 수비수가 중앙 수비수에게 패스를 하는 순간 달려들어 볼 트래핑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공을 낚아채 30여 미터를 질주한다. 이때 두명의 수비수가 따라붙었는데 박지성은 이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도 공을 발에 달고 다니듯 했다. 그의 축구화와 공은 고무줄로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드리블 중 공이 발에 붙어 있었기에 상대 골키퍼가 달려 나와 각을 좁히기 전 반대쪽 포스트로 여유 있게 찔러 넣을 수 있었다. 패스, 트래핑과 더불어 축구의 가장 중요한 기본기인 드리블이 왜 중요한지 박지성은 너무나도 환상적인 모범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러한 환상적인 드리블을 경기 내내 보여주는 선수가 있으니 그는 바로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다. 올해 스페인 프리메라리그 득점왕이자 이번 대회 골든볼(MVP) 수상이 유력한 세계 최고의 공격수 메시는 한국 대 그리스 전 직후 벌어진 대 나이지리아전에서 그의 존재 자체가 아르헨티나의 운명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그는 서너명의 수비수를 앞에 두고서도 이를 드리블로 돌파한다. 그 역시 드리블로 적진을 돌파할 때는 공이 발에 붙어 다닌다.
그런데 그의 드리블은 박지성처럼 축구화와 축구공이 고무줄로 연결되어 있는 정도가 아니다. 그가 드리블 할 때 그의 축구화와 공은 '초강력 찍찍이'로 붙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상대 수비수들로부터 수많은 발들이 날아들어도 그의 발에서 공을 떼어내질 못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어이 슈팅으로 연결한다. 그것도 온 힘을 다해 골문을 보고 때리는 게 아니라 골대 구석만을 골라 찬다.
아르헨티나전, 누가 결정하는가
17일 한국팀은 메시 외에도 이구아인, 테베즈, 밀리토 등 세계 최고의 공격수들을 보유한 아르헨티나와 맞서게 된다. 이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득점을 할 수 있는 득점기계들이다. 공격에 비해 약하다고 알려졌던 수비진도 나이지리아전에서 한 골도 허용하지 않으며 안정감을 보였다. 과연 한국팀은 아르헨티팀을 상대할 수 있을까. 무승부라도 가능할까. 한 골이라도 넣을 수 있을까. 진다면 몇 골이나 허용하게 될까.
그런데 이러한 예상은 별 의미가 없다. 세계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아르헨티나와의 경기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장 결정적 요인은 아르헨티나의 공격력이 아니라 바로 한국의 골키퍼다.
나이지리아 전에서 드러난 아르헨티나의 공격력을 볼 때, 이들 공격진은 한국을 상대로 세골 이상은 충분히 넣을 수 있는 실력을 갖췄다. 그렇다면 한국의 공격진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과연 몇 골을 넣을 수 있을까. 아마 운이 좋아도 한두 골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한국팀에게 관건은 한국의 공격이 과연 몇 골을 넣어 추격하느냐보다는 골키퍼 정성룡이 상대방의 소나기 슈팅을 막아낼 수 있느냐, 즉 결정적 슈팅 몇 개를 막아내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게 낫다. 한국팀이 넣을 수 있는 골이 한두개에 불과한 반면 정성룡이 막아야 할 골은 서너개,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의 첫 경기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아르헨티나는 나이지리아에 파상공세를 펼치며 몰아붙였지만 결국 경기 초반 터진 에인세의 선취골만으로 경기를 마무리했야 했다. 선취골 이후 골대 구석구석으로 날카롭게 날아갔던 슈팅들이 (아르헨티나의 유효슈팅 총 7개) 나이지리아의 골키퍼 엔예아마의 선방에 모두 막힌 것이다. 엔예아마는 인간이 그렇게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줬다. 그 결과는 실제 경기내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1대0이라는 스코어였다.
정성룡, 영웅이 될 것인가
정성룡은 그동안 오랜 세월 한국팀의 붙박이 골키퍼이던 이운재를 밀어내고 이번 월드컵 선발 자리를 차지했다. 키가 크고 골키퍼로서의 능력이 앞설뿐 아니라 정확한 킥력이 고려된 결과다. 첫 경기인 그리스 전도 실수 없이 잘 치러내 그의 선발 출전은 굳어졌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전은 그에게 골키퍼로서의 절망을 안겨 줄지, 아니면 한국팀의, 아니 한국 국민들의 영웅이 될지를 판가름 하는 절대절명의 경기가 될 것이다.
▲나이지리아의 골키퍼 빈센트 엔예아마는 아르헨티나전이 끝난 후 "(많은 골을 막도록 도와준) 신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정성룡은 신의 도움 없이도 영웅의 지위에 오르길.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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