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조지아
크루그만은 인접한 텍사스주에서는 금융소비자 보호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주택가격이 올랐을 때 추가 대출을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었던 반면 조지아주에서는 그러한 장치가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 결과 조지아주의 소형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해 준 결과 이들 은행들이 무더기로 도산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필자 역시 텍사스주의 금융소비자 보호제도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텍사스 주는 개인이 파산할 때 100만 불 상당의 주택은 파산자의 소유로 인정하는 관대한 파산법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반결손법(anti-deficiency law)이라고 해서 집값이 떨어져 주택구입을 위해 받은 대출액보다 적게 되는 경우 집주인이 그냥 걸어 나가면 손실은 대출은행이 모두 부담하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소비자 보호장치가 있다.
이런 장치로 인해 대출은행들은 대출상환능력을 세심하게 따지지 않고 대출해 주었다가는 금방 부실화되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출을 해야한다. 그 결과 텍사스주는 금융위기를 큰 어려움없이 헤쳐나가고 있다. 개인파산법 도입의 역사가 200년에 이르는 텍사스주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조지아주에서는 뒤늦게 직접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규제하려 노력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2002년 신용카드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필자 같은 게릴라들이 텍사스주 방식의 금융소비자 보호 장치를 마련하자고 주장했었다. 자조섞인 게릴라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당시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린 돈은 갚아야 한다'는 도덕률에 벗어나는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며 자기 확신이 강했던 전문가 집단, 정책집행 기관, 그리고 정치인들 모두 하나같이 귀를 닫았다.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막 죽어가고 있던 순간에 오히려 필자에게 설교를 늘어놓던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200년 전 미국 텍사스주의 촌놈들이 깨달았던 단순한 진리를 이들에게 알리기는 불가능했다.
2004년 이후에는 미약한 금융소비자 보호제도와 미국에서 대공황 이전에 유행하던 후진적 주택담보대출이 조합된 한국의 금융시장은 매우 위험하니 주택가격 거품을 주의해야 한다고 아무리 떠들어대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정책당국이 필자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이해할 만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 열을 모아서 물어보면 필자와 같은 답을 하는 한 사람을 찾기도 힘든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변동금리대출 위주의 스페인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주택담보대출은 안전하다고 우기고 있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만을 확대재생산하는 이 사회의 모습이 처연할 뿐이다.
대화하지 않으면 심판할 뿐
선거 며칠전이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주위의 핀잔을 받으면서도 이번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할 수 있다고 우겼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이것저것 다 고려해서 안된다고 결론낸 사항에 대해 희망이 있다고 우겼으니 기가 찼던 모양이다. 그래도 끝까지 여론조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우겼고, 최소한 경기도는 희망이 있을 것으로 공언했다. 김문수 지사가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한 언론기관을 고소한 사건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쫓겨난 경기도민들의 분노가 만만치 않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예측은 절반만 맞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필자가 보고싶어하는 여론의 추세를 반만 보았다.
필자가 여론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김수영 시인의 '풀'이 상징하는 민초의 생명력에 대한 깊은 믿음이다. '촛불'은 대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민초들의 목소리였는데, 그 목소리를 뭉게버린 후 정부는 폭정을 거듭하고 있다. 만약 민주화 혁명 이전의 상황이었다면, 견딜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 대대적 저항이 들불처럼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선배들 덕분에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불필요한 희생을 치를 필요가 없다. 민초들은 기다리는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납작 엎드려서 지내며, 남들 앞에서는 무표정하게 대통령을 지지하고 여당을 지지한다고 할 것이다. 고도로 여론조사 기법을 개선하지 않는 한 진심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민초들의 입과 귀를 막은 폭정의 결과이니 누굴 탓하랴.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는 직간접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광풍이 이제는 대중적인 철학자에게 미치는 이 상황이 얼마나 민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인지 그들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향후 모든 선거에서 어떤 경우에도 안심할 수 없는 가시방석 위로 스스로 올라선 형국이다. 광장을 열지 않는 자들의 숙명이니, 결자해지, 지금이라도 빨리 광장을 열기 바란다. 대화하지 않는다면 심판할 뿐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를 다 막아버렸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경제논평을 일삼는 필자는 더 이상 이명박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귀가 열려 있지 않은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다. 간혹 구색을 맞추기 위해 필자같은 사람의 의견을 구하면 마지못해 맞춰줄 뿐이다. 일반인들의 경제교육을 위해 잘못된 사례로 현 정부의 정책을 거론하는 정도다.
이러한 상황이 이번 정부의 일만은 아니다. 참여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비판했던 때는 탄핵기각 판결 이후 깍두기 머리를 하고 나타난 대통령과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이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연속적인 헛발질을 해 댈 때였다. 그 이후 선거 때마다 연패하면서도 전혀 바뀌지 않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의미없는 외침일 뿐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마지막까지 참여정부를 비판한 진보진영의 인사들은 참여정부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은 분들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비극은 처음부터 이 정부를 비판하는 합리적 보수의 씨를 말려버린 사실에서 비롯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권력에 아부하기에 급급한 보수 지식인들의 모습에 기가 찰 지경이다. 정부 비판은 뒷전이고 대통령의 정적과 야당 흠집내기에만 열을 내고 있는 언론 같지 않은 언론들이 부르는 용비어천가에 취해 지내는 권력의 모습이 불쌍하게 보일 정도다. 이번 선거를 통해 민초들은 따끔한 경고를 한 것이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을 이명박 정부에게는 사실상 사형선고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민주화 이후 우리는 네 번 연속 정부의 실패를 목격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6.2선거는 반전의 시작일 뿐
이명박 정부의 폭정을 통해 과거 독재권력에 뿌리를 둔 보수의 태생적 한계를 확인했다는 의미를 넘어, 6.2 선거결과는 보수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몇 가지 방증을 보여주었다. 특히 선거운동 기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복지 공약을 활발히 개진하는 모습은 4년 전과 크게 달랐다. 더 이상 묻지마 개발 공약이 난무하지 않았고, 보수 후보들도 색깔은 달리 하지만 자신들만의 복지정책을 부각시키느라 노력했다. 규제완화와 감세, 기업 지원을 통한 경제활성화 같은 보수적 주장들에 대한 신뢰는 떨어진 것으로 정치권 스스로 평가하는 모습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재벌과 부자 몰아주기 정책의 폐해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진보진영의 주장을 각색한 복지정책이 대세였고, 서울의 경우에는 직접적 개발 공약이 아닌 디자인이라는 변형된 의제를 제시했다. '삽질경제'라는 상징어에 공감하는 유권자들에게 더 이상 개발공약이 먹히지 않는다는 반증이었다.
반면 경기도가 아니라 서울에서 더 강한 심판풍이 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예측이 심각하게 틀린 부분이다. 고원 상지대 교수의 평가대로 '서울이 구조적, 인구학적으로 보수화되었다는 가설은 이제 깨졌다'는 시각에서도 중요하지만, 경제적 요인이 결정 요인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한 대회전이 남아있다는 의미도 된다. 다시 말하면 진보와 보수의 진검 승부는 이제부터이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한나라당이 먼저 위기 의식을 느끼고 변화를 주도하기 위한 몸부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년간 반복된 자기중심적 사고에 의한 오만한 국정운영 기조가 바뀔 가능성은 낮다. 과거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가 임기 중반을 넘기며 대중의 지지를 상실했고, 변화를 통해 지지를 회복하지 못한 채 레임덕을 맞았다. 기회를 포착한 진보진영도 변화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내부적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다른 정당을 포용하지 못하는 옹졸한 자세로 미루어볼 때, 참여정부 당시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이 보여주었던 단결된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승부는 누가 먼저 변화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었는가에 달려있다.
당당한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기대하며
▲ 2일 지방선거에서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당선을 희망하면서 서울광장에 모여든 지지자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20-30대의 젊은 층이 대거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구조적으로 정치권이 변화하기 어렵다면, 변화의 단초는 대중 정치인 개개인의 활약에서 찾아야 한다. 이번에 당선된 자치단체장과 교육감, 지방의원들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큰 빚을 졌다. 화창한 6월 초 예년처럼 놀러가기를 포기하고 서로서로 투표를 독려한 젊은이들에게 큰 빚을 졌다. 그들에게 보답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다시 투표장을 찾을 이유는 없다. 그들 젊은이들에게 진보의 열정을 심어주어야 한다.
진보진영의 환경은 모든 것이 열악하다. 필자가 미국 조지아주의 예를 든 이유는, 진보정치인의 역사적 책무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필자가 금융소비자 보호제도의 강화를 주장했을 때, 그들은 일제히 포퓰리즘이라고 몰아세웠다. '빌린 돈은 갚아야 한다'는 경제학의 기초와 사회생활의 기본 명제를 부정하는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폄하했다. 이런 대한민국에서 자본에 각색된 지식을 꿰뚫고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진보 정치인은 크나큰 각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방법론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거친 진보진영의 논의를 현실화 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선택은 형극의 길이고 정치적 미래를 위험하게 하는 길이지만 결국 지지자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반면 편안하게 지방 관료들과 함께 재벌연구소의 보고서를 끼고 산다면 지지자들은 고통 속에 신음하게 된다.
각성을 통해 당당한 포퓰리스트가 되라. 그렇다고 아무 정책이나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 효과가 증명되고 이론적으로 검증된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런 정책에 대해 열린 귀를 가진, 시대를 통찰하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기대한다. 그 때 비로소 진보의 시대는 활짝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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