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독일에서 떨치다…"태권도로 거짓 세상을 격파하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독일에서 떨치다…"태권도로 거짓 세상을 격파하라!"

[권은정의 '아우토반 코리안'] 태권도 사범 정선채 씨

오후 7시 30분. 직장에서 하루일과를 마친 수련생이 태권도 도장 '정'에 속속 도착한다. 마이스터 정과 인사를 하고 서둘러 대기실에서 도복을 갈아입고 매트 위에 선다. "사범님께 경례!" 구령 소리에 맞춰 "태권" 소리가 우렁차다. 베를린 남쪽 알트마리앤도르프에 있는 정선채 사범의 태권도 도장 '정'의 어른반 수업 모습이다.

태권도가 독일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65년 친선 시범단의 뮌헨 방문 때였다. 폭발적인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5년 뒤 독일 정부는 체육부 산하에 태권도 부서를 신설했다. 또 얼마 뒤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한다. 독일 태권도 국가 대표 팀이 생겨났을 때 감독은 당연히 한국인 사범이었다.

태권도는 코리아와 동의어였다. 지금 태권도는 독일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중 스포츠 중 하나다. 독일 땅에서 태권도가 풍성한 열매를 맺은 공은 온전히 파독 광부로 온 태권도 사범들의 몫이다. 그들은 갱도에서 온몸이 녹초가 되는 일과를 마치고도 저녁이면 어김없이 도장에 섰다. 태권도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젊은 광부는 푸르게 살 수 있었다.

▲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태권도 사범 정선채 씨. ⓒ한민영

정선채 사범이 독일 온 지는 36년째다. 그도 '태권의 꿈'을 광부 신청서 밑에 감추고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1974년부터 아헨 지방에서 탄광 근무를 했다. 그러고 나서, 독일에서 꿈을 펼쳤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이런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스페인 마드리드가 그의 첫 출발지다. 왜?

"탄광 일을 좀 하다가 스페인에서 태권도 사범 초청을 받고 그쪽으로 날아간 거죠. 광산 일이 어려워 한참 고생했었는데, 이게 내 길이다 싶어 망설임 없이 갔지요."

사실 정 사범은 군대 시절에 하사관 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태권도 교관으로 복무했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광부 시절 그도 선진이 운영하던 태권도 도장에 나가서 일을 거들었다. 그래서 잘 안다. 그는 "태권도 독일 개척은 선진들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 시절 행사 때마다 정 사범은 태권도 시범을 보이곤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스페인 쪽에서 초청장을 보낸 것. 분명 찬스였다. 언어 장벽, 음식 장벽, 온갖 어려움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모두가 <로보트 태권브이> 노래를 따라 부르던 때, 그는 마드리드에서 진짜 태권브이로 살았다. 스페인 역시 태권도 불모지대. 개척의 사명이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일본 가라테는 도장까지 있었는데 태권도는 모르더라고요. 스페인 가라테 협회에서 태권도를 받아줘서 한 분야를 점령하고 들어갔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도 보면 볼수록 우리 태권도 동작이 좋거든요. 또 잘하기도 하니까. 태권도 인구가 점점 늘어나니 자연히 파워가 세졌지요. 코리안 가라테로 알던 사람들이 태권도를 정식으로 알게 된 거지요."

마드리드 한복판에 태극기 걸어놓고 태권을 날리면서 정사범의 명성도 따라 날렸지만 모든 게 쉽지는 않았다.

"그때는 도전도 많았어요. 스페인 애들이 호기심으로 태권도 사범과 겨루고 싶어 했죠. 도전이 오면 받아줘야 했어요. 살아야 하니까. 제가 싸움도 좀 했으니 그 경험을 살렸죠. 그쪽 애들이 운동은 잘해요. 제가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대결해서 이겼는데, 나중에 유단자 애들이 전부 나가떨어져 버리는 바람에 체육관 주인이 내게 막 화를 내기도 했죠. 하하하!"

청년 정선채에게 스페인 시절은 도전과 응전의 시대였다. 마드리드에서 3년 마치고 오렌세 지방에서 또 3년 남짓 태권도 도장을 운영했다. 정 사범의 뛰어난 실력 덕분에 각계각층에서 수련생이 구름떼 같이 몰려왔다. 그의 시범이 지역 신문을 장식하는 일은 흔했다. 덕분에 돈도 꽤 벌었지만, 그는 "당시에는 경제관념이 희박해서 모으지는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속이 되게 없었다"고 자신의 젊은 날을 간략히 정리했다.

평생 태권도로 자신을 다져온지라 정 사범의 말과 성격 또한 정권을 날리는 것처럼 솔직하다. 무슨 말이든 돌려서 못하고 좋게 보이려고 과장하거나 다르게 말하지 못한다. 곧이곧대로, 그랬으면 그랬다고 솔직, 정직, 담백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손해도 좀 봤을 것이다.

ⓒ한민영
정 사범의 도장에는 각종 트로피, 상패, 상장이 가득하다. 대회를 휩쓸었다는 표시다. 벽마다 걸린 사진 속에 그는 주로 붕붕 날아다니는 모습이다. 얼핏 보면 이소룡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액자 속 프랑스 잡지 표지에는 그가 3단 높이에서 쌍발 차기로 두꺼운 나무판을 동시에 격파하는 모습이 나와 있다. 진정 '태권 마이스터'의 멋진 모습이었다.

마이스터로 살아오면서 영광의 순간이 셀 수 없이 많았겠지만, 이제 정 사범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표정이다. 후진 양성을 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태권도가 어떻게 스며들게 할 것인지가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다. 태권도 안에서 독일과 한국 간의 거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 사범이 한국어 구령으로 독일 수련생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 대한민국! 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의 자부심, 자긍심' 그런 대답을 기대하면서 유럽인에게 태극기를 걸어놓고 가르치는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아이고, 처음엔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그런 느낌이 좀 드는 것 같네요. 한국에서 공부 많이 해야 올라가는 자리에 있는 분들 있잖아요. 예를 들면 판사, 변호사, 의사…. 그런 독일 사람들이 우리나라 태극기에 앞에서 경례를 할 때는 솔직히 참 흐뭇해요."

정 사범에게는 태권도 종주국에서 왔다는 큰 자부심이 있다. 독일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그를 '마이스터 정'이라고 부른다. 마이스터, 독일 사회에서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키는 이 호칭은 아무에게나 붙여주지 않는다. 평생 자신을 연마하면서 태권도를 가르치는 그에게 독일인들이 존경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단 정 사범에게 태권도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가르침에 깊은 매력을 느껴 떠나지 못한다. 독일인 내과 의사 알리 박사만 하더라도 제자가 된 지 20년이 넘는다. 30대 중반인 에릭 씨는 18세부터 정 사범에게 태권도를 배웠다. 사는 동네가 꽤 멀리 있지만 결석을 한 번도 안하는 변호사 제자도 있다.

경찰관 올리버 씨는 태권도 실력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영어 교사 안젤리카 씨는 7년째 수업을 받고 있는데 동작이 아주 멋지다. 주부 스테파니 씨는 아들을 보내다가 태권도가 좋아서 등록을 했다. 태권 동작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그 전에 하던 운동을 다 그만둔 이도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정 사범을 흠모한다.

"우리 마이스터는 형식에 매달리지 않고 개인의 능력에 맞춰 가르친다. 그는 경쟁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좋다."

정 사범의 수업 시간은 20년 넘게 한결같다. (수업료도 옛날 그대로다. 다만 마르크에서 유로로 바뀌었을 뿐이다.) 공부를 하는 태도도 늘 같다.

"제가 어영부영 게으름 피우면 가르칠 수 없어요. 여기 사람은 운동하면서 동작에 의문이 들면 반드시 물어요. 여기에서 왜 이렇게 막아야 하느냐 하고 물으면 역학적으로 가속도가 붙어서 옆구리를 틀면서 이렇게 한다, 이렇게 정확히 답을 해야지, 그게 아니고 태권도는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하면 진짜 촌놈이 되는 거지요."

한국 태권도의 진수를 보고자 베를린 사람은 정 사범을 많이 찾는다. 그가 시내에 있는 존 에프 케네디 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르친 지도 벌써 6년이 되어간다. 1주일에 이틀 수업에 현재 학생 수가 150명인데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금 도장으로 옮긴 지는 17년이 되어간다. 200명이 넘는 단원이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큰 규모다. 한국에서 유럽 지역 경기나 연수를 나오면 묵을 수 있는 시설도 있다. 한국대학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최준철 사범이 3년째 정 사범을 도와서 일하고 있다.

도장 수업은 유아반에서 어른반까지 고루 다 있다. 정 사범은 그 중 청소년반 수업이 힘은 들지만 특히 애착이 간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통해 좋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독일 청소년은 수업을 아주 잘 받아들여요. 자기주관이 뚜렷하지만 또 겸손해요. 저는 개인 도장이지만 학교 식으로 운영합니다. 말 안 듣고 정직하지 않으면 보내버려요. 아이들이 나에게 '마이스터'라고 불러주니 그 이름값을 해야지요. 좋은 말 많이 해주려고 합니다. 담배피우지 마라, 부모님 공경해라, 학교 숙제해라. 방 청소해라….

물론 나는 그렇게 다 못했지만요, 하하하. 마이스터가 말하면 잘 통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니까 부모들이 좋아합니다."


ⓒ한민영

정 사범은 독일에 오래 살다보니 이제는 거의 독일 사람이 다 된 것 같다고 웃는다. 생활 방식이나 사고방식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곳은 거짓말이 안 통하는 사회예요. 우선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거짓말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때 정직하게 말하면 그게 더 인정받는 사회지요. 다음부터는 서로 신뢰관계가 형성되는 것이거든요."

정 사범의 도장에서는 단순히 태권 동작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인성 교육이 태권도 정신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언젠가 청소년반 남자애 하나가 여학생 대기실을 훔쳐본다고 여학생들이 하소연을 해왔다. 그 남자아이를 불러서 그랬냐고 물었더니 딱 잡아떼더라는 것이다. 몇 번을 물어도 부인하기에 그날로 체육관에 나오지 못하게 했단다. 사정을 알게 된 부모가 달려와 사정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이 '가르칠 자격이 부족하니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수련생 중에는 유단자가 꽤 많다. 그간 국가 대표를 키워내기도 했지만 아직 챔피언이 없는 게 유감이다. 세계 챔피언, 올림픽 선수도 만들어내고 싶은 꿈이 있다. 현재 독일태권도협회가 있지만 태권도 종주국 사범으로서의 자존심이 정 사범으로 하여금 협회 가입을 머뭇거리게 한다. 옛날 그의 제자가 현재 협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 사람들이 특별히 태권도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니에요. 독일 사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이 다 태권도에 열광하지요. 운동이 좋잖아요? 멋있고. 태! 이건 발동작, 권! 이건 손동작, 그리고 도! 이건 정신. 이렇게 몸과 정신 운동이 동시에 되니까 좋은 거지요. 저도 한국에서 여러 운동을 다해봤지만 역시 태권도가 제일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발차기, 때리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움직임으로 혈액 순환도 잘되고 운동 신경이 발달하지요. 여성한테도 아주 좋아요. 우리 단원 중에도 여성이 많아요."

태권도에 대한 일편단심이다. 한국인으로 사는 자세도 그렇다. 2세 모국어 교육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려있다고 정 사범은 믿는다. 그의 남매는 한국 학교를 한 번도 다니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자란 애들처럼 우리말을 아주 잘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내가 고민을 많이 했지요. 아마 한 1년 동안은 고민했던 것 같아요. 아이들하고 독일어를 하면 나한테도 유리하겠지만, 우리말과 문화를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하다 결론내리고 굳게 마음먹었지요. 애들이 독일어로 물어오면 딴청을 피우곤 했지요. 결국 답답하니까 우리말로 하더군요. 좀 강하게, 무리를 했지요. 다 커서는 저한테 고맙다고 해요. 하하하."

정 사범은 이 대목에서 자랑스럽게 가슴을 활짝 폈다.

ⓒ한민영
동서독 분단 시대 때부터 정 사범은 베를린 시민으로 살았다. 한국인으로서 독일 통일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통독 이후 어떤 차이점을 느꼈을까.

"활기가 느껴지지요. 그런데 분단 당시에도 동서독 간 왕래가 자유로운 편이었어요. 방문 신청하면 오갈 수가 있었어요. 기차도 통과되었지요. 우리도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많이 했어요. 통일 전이라도 기차 통행이 자유롭게 된다면, 우리는 유럽을 그저 기차로만 다닐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야 답답하게 갇혀 살았다 하더라도 우리 2세는 좀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고국을 무지하게 사랑한' 그에게 1980년 광주항쟁 소식은 엄청난 울분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고향 떠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찾았다. 전국체전에 독일 교포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했을 당시 발전한 고국이 참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웠노라고 한다. 그 이후부터 태권도와 관련된 각종 대회와 행사 참가를 위해 수련생과 수시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고국 소식은 늘 마음에 가장 먼저 닿아요. 특히 정치에 관한 뉴스는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여기나 거기나 보통 사람은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에 신경 못쓰고 살잖아요. 그럴수록 정치인들이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색내려고 하는 그런 정치 말고, 특히 선거 때 공갈 약속하면 안 되지요. 그게 비겁한 것이거든요!"

ⓒ한민영

태권도로 단련된 정 사범의 삶은 올곧다. 그의 일상은 정직과 성실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가 질색하는 사람은 말만 앞세우며 허장성세를 부리는 이들이다. '비겁하다'는 한마디로 정리하고 만다. 띠 낮은 애들 괴롭히는 유단자, 약하고 없는 사람들을 내리누르고, 강한 사람 앞에 비굴하게 엎드리고, 권력 앞에서 아부하는 작자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정치인, '연기력은 뒷전이고 복근만 자랑하는 연예인'.

그에 따르면 이 모두가 '비겁한 자'들이다. 태권으로 거짓 세상을 격! 파! 마이스터 정의 꿈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