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 전부터 종교에 관해 가지고 있던 오랜 질문들이 되살아났고, 새삼 지금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내가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또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거의 100년 전 양계초가 "이성적 근거 없이 종교를 믿는 것은 무조건 종교를 비판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한 말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본 선불교의 모습이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도대체 할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철학적 교리뿐만 아니라 역사적 실현 과정으로도 이해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이 책은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해주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연인들의 진실은 "사랑한다"는 말과 헤어진 행위를 함께 고려해야 얻어질 수 있을 터이다.
서양인 승려가 쓰고, 개신교 목사가 번역하다
▲ <전쟁과 선>(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지음, 정혁현 옮김, 인간사랑 펴냄). ⓒ프레시안 |
"하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기독교와 폭력의 역사에 관한 자료 층이 불교의 그것보다 훨씬 더 두껍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에 빤히 보이는 술수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고 자신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이런 변에 대한 솔직한 심정은 "이런 좋은 책을 번역해주어서 그저 고맙다"는 것이다. 영어책으로 읽지 않게 해준 데 대한 고마움, 그리고 전공자가 아닌 데도 이런 좋은 책을 찾아내는 혜안을 가진 목사님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국 기독교가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해준 데 대한 감사!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일본 불교가 과거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나는 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불교가 타종교여서도, 저지른 범죄가 가벼운 것이어서도 아니다. 종교의 궁극적 관심은 자칫 근본주의로 흘러 자기 통제를 상실한 전쟁 기계 그 자체가 되는 일이 기독교사와 불교사를 위시하여 거의 모든 종교의 역사에서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거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끔찍한 광기가 마치 종교의 고유한 유전자와 같은 것으로서 필연적이며 극복 불가능한 내재적 요인이가를 따지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면 종교는 그 자체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일 것이다."
출판사 리뷰에 따르면, 이 책은 2006년에 제2판이 발간되던 당시에 이미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는 물론 폴란드어판까지 출간되어 유럽에서 열렬한 관심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어판까지 출간된 상태이다. 특히 일본어판은 일본 불교계의 "늦어도 너무 늦은" 전쟁 참회 성명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쟁과 선>의 한국어판은 최근에 역시 "늦어도 너무 늦은" <친일인명사전>의 발간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의 문제가 결코 지나가버린 과거사가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현재임을 일깨우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를 끌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불교의 지하 세계
서문에는 저자 빅토리아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우리에게도 매우 낯익은 일처럼 느껴졌다.
"1970년 봄 나는 선불교 지도자 니와 렘포(1905~1993)의 방에 불려갔다. 당시 그는 도쿄에 있는 에이헤이사 별원 사찰의 주지였다. 그는 내가 조동선승이자 조동선종 관계 대학인 가와지마 대학의 불교학과를 졸업한 학생이기 때문에 일본의 반베트남전 운동에서 활동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조언해주었다. 그는 나의 저항 운동이 비폭력적이며 합법적이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선승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승적을 박탈당하게 될 걸세.'"
우리도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일화가 아닌가! 저자는 이 에피소드가 자신의 생애 결정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사건이 촉매가 되어 그는 그 후 25년 동안 선승(禪僧=선불교의 승려)이 사회와 그 구성원들, 국가와 복지, 그리고 정치와 사회적 행동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구해왔다고 한다.
불교(또는 종교)는 과연 정치에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불교(종교)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고고한 정신 세계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해왔는가? 그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자신이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에서 모험하게 만든 유명한 토끼 구멍에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본 역사적인 일본 불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불교의 지하 세계에서 만난 사상과 인간들은 지상의 그것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지하 세계에서 전쟁과 살육은 부처의 자비의 현시로 묘사되었다. 선불교의 '무아(無我)'는 천황의 의지의 명령에 절대적이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복종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종교의 목적은 국가를 보위하고 감히 그 국가의 자기 확장의 권리에 맞서는 다른 나라와 인간들을 처벌하는 것이었다."
불교의 '무아'는 나라고 하는 불변하고 영원한 자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너와 나는 모두 연기(緣起)적 존재로서 실체가 없다는 개념이다. 연기적 존재라는 것은 나와 너를 포함한 이 세계 모든 존재자들의 근원적 관계성을 설명하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는 나, 아니 내가 나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욕망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세상 만물의 평등과 근원적 일치를 설명해주는 대단히 심오하고 아름다운 말이라고 평소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 '무아'가 "천황의 의지의 명령에 절대적이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복종"이 되다니! 저자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의 토끼구멍'에 빠진 것 같다고 고백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탐험하고 다닌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이 이상한 나라에는 군인의 차려 자세가 선불교의 명상과 동일한 상태임을 주장하는 선불교 선사가 나온다. 선불교는 군사들의 정신 자세를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불교 선사 및 불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을 전심으로 돕기 위해 '자비와 충성'의 가치를 높이 들고 전장을 신앙 전파를 위한 경연장으로 생각하라고 독려하였다.
▲ 군인의 차려 자세는 선불교의 명상과 동일한 상태이다. ⓒ인간사랑 |
전쟁과 불교-전쟁은 불교적 자비의 표현
이 책에는 전쟁과 선불교의 관계에 관련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러일전쟁 당시 톨스토이는 평화주의 입장에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비판하는 일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 지도자들이 자신과 연대하여 협력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즈키의 선 스승인 샤쿠 소엔(1859~1919)에게 자신과 연대하자고 요청했으나, 아쉽게도 다음과 같은 답장을 받았을 뿐이라고 한다.
"비록 부처님은 살생을 금하였으나, 그는 또한 모든 중생들이 무한한 자비의 수행을 통해 함께 연합할 때까지 평화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소이다. 따라서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조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오."
'분별하지 않음(무분별)'과 '자비'를 말하는 선불교 선사의 입에서 나오는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다"는 말은 얼마나 이상하고,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그에 비하면 평화주의를 말하는 톨스토이는 마치 어린아이같이 순진하다는 느낌마저 준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의 군사 활동에 대한 제도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담은 원칙들이 제시되었는데, 다음 세 가지 사항이 추가되었다. 1)일본의 전쟁은 정의로울 뿐 아니라 사실상 불교적 자비의 표현이다. 2)일본의 전쟁에서 죽기까지 싸우는 것은 부처와 천황의 은덕에 보답할 수 있는 기회이다. 3)일본의 군대는 언제든 궁극적인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된 수만 명의 보살들로 구성된다.
한번 삐꺽 생각을 잘못하면 천리만리 먼 길로 사이가 떨어지는 것인가 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자비를 말하는 불교인들의 입에서 "전쟁은 불교적 자비의 표현이다"는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언제든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보살들'로 구성된 일본 군대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카미카제와 일본 신사에 모셔져 있는 죽은 젊은이들의 사진들이 오버랩되며 머리가 복잡해져갔다.
이러한 이상한 나라의 승려들이 한 이상한 말들이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조동선의 대가이자 학자인 사와키 코도(1880-1965)는 선과 전쟁의 통합을 지지하고, "살생을 금하는 계율이 칼을 휘두르게 하는 것이다. 폭탄을 던지게 하는 것이 바로 그 계율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무슨 모순되는 말일까?
난템보는 선의 정수는 '지키(直)'라는 단어 속에 들어있다고 설명하며, 이는 일본의 정신으로서 "자비로운 살생보다 훌륭한 보살생은 없다"고 하였다. 1905년 샤코 소엔은 불교가 일본의 정신에 공헌한 것은 '자기 희생'이라는 개념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태도야말로 불교가 일본 정신에 공헌한 가장 자명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생명을 살리려는 것인가, 죽이려는 것인가?
황도불교의 탄생-석가모니불이 아닌 천황 숭배
1930년대 이후 황도불교(번역자 표현으로는 '황국의 길 불교')는 통치자의 법에 불교가 전면적이고 분명히 예속함을 의미하였다. 사이오 벤쿄(1876~1971)는 "불교에서 삼보(三寶 : 불교의 세 가지 보물. 불·법·승)를 경모하는 것은 천황의 명령을 의문 없이 받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단언하였다. "황도불교에서 원칙적으로 숭배해야 할 형상은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그 계보를 일만 세대에 걸쳐 이어온 천황 폐하"라는 것이다. "진종은 누구든지 국가에 반역한다면 아미타불은 그를 구원 대상에서 제외할 것이다. 진종에서 황국의 국가 정책에 복종할 것을 주장하지 않는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조동선종 히야시마 토모지로(1886~1953)는 "불교는 그저 전쟁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를 따른다. 불교는 전쟁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선한 전쟁을 열광적으로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한 전쟁'을 내세우지 않는 전쟁이 인류 역사상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선한 전쟁'이란 문자 그대로 '전쟁'을 의미하는 수식어일 뿐이다. 일본 불교는 나아가 천황을 금륜성왕, 또는 속세의 '여래'라고 보았다. 그러나 금륜성왕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의 신민들에게 지혜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덕으로만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법과 세금,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무기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른 나라에 불의와 불법이 난무할 때 그는 반드시 "폭력이라는 무기를 든다"는 것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이 사회 진보를 촉진하는 무력으로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화 시대의 선불교-기업과 선
이제 전쟁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왔으니, 불교가 전쟁에 협력했던 일은 지나가버린 과거가 되어버린 걸까? 우리는 선을 활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보게 된다. 좌선을 통해 나온다고 추정되는 '무한한 능력'이 전장에서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전후 일본에서, 일부 사업가들은 그것을 일본의 파괴된 산업적 기반을 재건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사업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선불교를 상급자에 대한 규율과 복종, 그리고 충성이라는 전통적인 가치들을 복원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은 무아 상태로 일해야 합니다."
사카이 토쿠겐(1912~1996)은 기업이 선불교를 곡해하는 또 하나의 예를 보여준다. 그는 신입 사원 프로그램에 관여한 지도적인 선사이다. "우리에게 할당된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전 우주적 생명의 일부가 되며, 우리의 본래적인 진아(眞我)를 실현한다." 토쿠겐에게는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 무욕의 상태로 전념하는 것이 깨달음 그 자체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는 신입 사원 훈련 프로그램의 인기 강사였다. 신입 사원들에게 노동해서 얻는 이익으로서 깨달음을 약속할 수 있는 서구 기업이 있을까?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는 개신교 노동 윤리는 분명 여기에서 호적수를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선불교 지하 세계의 탐험은 너무도 어지러워 내게는 힘에 벅찬 듯하다. 양계초처럼 얼음물을 마시지는 못하더라도 찬 물이라도 한 잔 들이켜야겠다. (양계초는 자신의 서재를 '얼음물 마시고 정신차리는 방(飮氷室)'이라고 불렀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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